그 옛날 중세 시대, 유럽 왕들은 ‘치유의 기적’을 행했다는데…

입력 : 2017.08.06 17:19

[송광택 목사의 인문 고전 읽기 17] 서유럽 역사 속의 교권과 왕권

기적을 행하는 왕
기적을 행하는 왕

마르크 블로크 | 박용진 역 | 한길사 | 600쪽 | 28,000원

왕의 치료 의례는 왕의 초자연적 성격과 관련된 오래된 관념에서 탄생했다. 만약 이러한 믿음이 의례가 탄생한 직후 곧 없어져 버렸다면, 이 의례는 지속되지 못했거나 적어도 큰 인기를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없어지기는커녕 굳건하게 버텨냈고,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미신과 혼합되면서 더 확대되었다.

손대기 치료가 지속적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나, 예전부터 내려오던 반지의 주술적 치료법이 왕실의 진정한 의식으로 변화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각의 관습을 종교적 숭배의 분위기 속에 놓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즉 중세 마지막 4, 5세기 동안에 백성들이 군주를 에워쌌던 경이로운 분위기를 전제로 살펴보아여 한다는 것이다.

왕과 사제가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었고, 똑같을 수도 없었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사제는 완벽하게 정의된 초자연적 질서에 관한 특권이 있었다. 중세에 아무리 강력하고 오만한 군주라고 하더라도 미사에서 성체를 축성하거나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며 하나님을 제단으로 모실 수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황제가 악마를 쫓아낼 줄도 모르므로 '퇴마사'보다도 못한 사람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가차 없이 지적했다. 고대 게르만 사회나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 같은 다른 문명에서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사제-왕'이 존재했을 수 있다. 중세 기독교사회에서는 이러한 '혼성' 권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저자에 의하면, 성스럽고 기적을 행하는 왕권이라는 관념은 중세 전체를 통해 활력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전설, 치료 의례, 현학적이면서도 민중적인 신앙 등의 보고(寶庫)로서, 왕정의 도덕성 대부분을 만들어내며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프랑스 왕과 영국 왕이 연주창이라는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뿐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들까지도 이 왕들에게 찾아가 연주창이라는 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왕이 여행 중이라면 쫓아가서 치료를 받으려 했고, 쫓겨난 왕에게 찾아가기까지 했다.

저자에 따르면, 왕이 치료했다는 연주창은 오늘날의 병명으로는 결핵성 경부 임파선염으로서, 목 부위 임파선에 염증이 생겨 부어오르는 임파선염의 일종이다. 그 증상이 목에 나타난다 하여 경부라는 단어가 그 원인이 결핵균에 있으므로 결핵성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왕은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했을까? 놀랍게도 왕은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병을 고쳤다고 한다. 기껏해야 민간요법 서적이나 기담집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이 책에서 다루는 소재다.

성과 속, 즉 교권과 속권이 분리되어 대립하기도 하고 협조하기도 했던 역사는 서유럽 정치사의 특징이며, 나아가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비잔티움 제국이나 이슬람 세계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교권과 속권의 관계설정이 첨예한 문제였다. 블로크에게 성과 속의 관계는 지나가 버린 과거의 차디찬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적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에 관한 연구와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연구를 결합'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역사가로서 훌륭한 저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나치에 항거해 50세가 넘는 나이에도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붙잡혀 총살형을 당한 실천적 지식인의 상징적 인물이다.

책은 블로크의 저서 중 첫 번째 것으로서,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답변한다. 블로크는 이러한 기존의 설명 방식에 더하여, 기적의 대상이 되는 민중의 입장에서 기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도 같은 비중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송광택 목사(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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