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4장 내적인 인격으로서 아니마(2)

인격의 원형은 근본적으로 정신을 이루는 바탕으로서 특성을 갖는다고 했다. 정신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본래 있는 특성으로 내재된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여성적인 특성이 내부적으로는 남성에게서 정신의 특성을 이루면서도 외적으로는 인격으로 표출되는 것이 된다. 그 중에서 아니마는 여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했다. 어떤 남성도 여성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을 정도로 완전히 남성적이기 만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1. 아니마의 긍정적 측면

아니마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아니마의 긍정적 측면은 여성이 남성에 대해 갖는 긍정적 특성이다. 이런 특성이 여성의 긍정성으로 작용하는 것이 되면서, 이는 또한 남성 안에서 긍정적인 성격으로 작용하여 또 다른 긍정적 및 부정적인 이미지의 남자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이 되기도 한다. 아니마의 긍정적인 측면은 여성이 갖는 존재적인 측면에 기대어 기술할 수 있다.

1) 남성의 섬세함으로서 아니마

남성의 섬세함은 아니마의 특성이다. 남성의 섬세함은 전술한 여성적인 특성의 수용성, 생명의 산출성, 양육성, 참고 기다리는 인내성, 풍부한 감정 등에 해당한다. 남성의 섬세한 특성은 무의식적인 여성적 태도에서 가능해진다. 정신의 깊은 곳에서 작용되는 아니마의 특성은 남성이 쉽게 흉내를 낼 수 없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예술가, 시인, 그리고 문학가는 이런 아니마의 특성을 작품 속에 형상화한다. 아니마의 특성은 매우 섬세한 성격으로만 묘사가 가능하다. 작가가 이런 섬세함을 갖추지 못하면 그것을 화폭이나 작품에 형상화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때로 이런 아니마의 특성은 이념에 결부되어 또 다른 특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술만이 아니라 물질이나 어떤 주의나 사상에 투사되어 독특한 성질을 나타낸다. 정몽주(鄭夢周)의 '님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한용운(韓龍雲)의 '님은 갔습니다. 아아 님은 갔습니다" 할 때에의 '님'이나 그 밖의 시와 노래에 반영된 '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매우 낭만적인 섬세함으로 그 표현이 가능해진다.

더욱이 아니마와 관련해서 모든 남성이 기대하는 사랑과 행복에 관련되는 어머니의 따뜻함, 부드러움 등은 남성이 가질 수 없는 여성의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은 남성이 영원히 그리워하는 여성성이자 모성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자는 마음에서 여성을 그리는가 하면, 또한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이런 아니마의 특성이 남자에게는 중요한 때에 작용한다면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이런 특성은 실제로 일상에서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남자는 아니마의 긍정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결혼 상대자를 찾는데도 발휘된다. 아니마에는 여성을 보는 눈, 세심한 주의력, 마음 깊은 곳까지를 헤아리거나 볼 수 있는 능력, 더욱 영적인 섬세한 삶으로 인도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보다도 세밀한 직업에 종사하거나 연주를 하는 것은 아니마의 덕분이다. 남성은 이런 아니마의 특성으로 때로는 여성보다도 예민하고 세밀한 분야에서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아니마는 남자에게 있어서 적절한 결혼 상대자를 찾는 능력을 갖게 할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견해에도 작용한다. 아니마는 성적인 욕망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남자가 평범한 여자에게 넋이 나갈 정도로 빠져들면, 그의 친구들은 "도대체 저 친구, 저 여자에게서 뭘 본 거야?"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 친구가 본 것은 물론 아니마이다. 그 아니마란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단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의인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성이 유달리 낭만주의적 사랑을 추구한다면, 이는 아니마의 특성이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낭만적 사랑은 여성의 세밀하고 부드러운 특성을 그리는 것으로서 그 충족을 원하는 것에 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니마의 이미지는 실존하는 여자에게 투사될 수 있으나 실존하는 여자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니마는 성적으로 유혹적일 뿐 아니라 아주 원숙한 지혜로 묘사된다는 점에서다. 그러면 유달리 사랑을 희구하는 남성은 이런 아니마의 특성을 그리는 것으로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2) 남성의 내적인 길 안내자로서 아니마

우리는 삶에서 갑자기 어려움에 봉착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는 정신의 판단이 정확하게 기능하지 못하기에 갈등하면서 방황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어떤 것이 옳은지, 또는 어떤 구별을 하여 나아갈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답답해하는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반드시 윤리적인 측면을 넘은 것도 있고, 윤리적인 측면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남성은 여성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니마가 역할을 할 때다. 남성의 윤리적인 정신이 무의식 내에 숨겨진 사실을 식별할 수 없을 때, 아니마는 그것을 발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여성이 나서서 그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갈 길을 제시하여 문제의 해결을 돕는 때다. 이런 경우의 아니마는 인격에서 남성의 마음을 참된 내적 가치와 조화시키고 심원한 내적인 깊이에로 이끌어가는 일이 된다.

아니마의 내적인 길 안내는 여성의 영감에 의한 작용의 결과이다. 남성보다 뛰어난 여성의 영감은 종종 남성에게 유익한 경고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인 것에 방향이 지워진 여성의 감정은 개인적으로 덜 관계가 지워진 남성의 감정이 발견하지 못한 길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영혼의 인도자'(Psychopompos)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니마는 빛의 천사로서 괴테의《파우스트》가 보여주었듯이 최고의 의미로 이끌어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여성이 천상으로 인도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내는 이 작품은 여성성인 아니마를 찬양하면서 끝난다. 아니마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세상의 유일한 특성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적인 '라디오'가 어떤 종류의 파장에만 동조하고 관계가 없는 것은 배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위대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는 것과도 같다.

이 내적인 '라디오'의 수신을 확립하는데 있어 아니마는 내적인 세계와 자기에의 안내자가 되고 중개자가 된다. 이 바람직한 기능은 남성이 아니마로부터 보내지는 감정, 무드(분위기), 기대, 공상 등을 진지하게 선택하고, 그것들을 문장, 그림, 조각, 작곡, 무용 등의 모습으로 정착시킬 때에 활동하게 된다.

아니마는 더 깊은 심원에로의 통찰이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남성이 이런 일을 함에 인내심을 갖고 초조해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면, 보다 깊은 무의식의 소재가 다른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이전의 소재와 관련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남성이 무의식의 소리를 듣고 간과하지 않으면, 좋은 작품의 소재를 발견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과도 같다. 이는 문학에 있어서의 많은 예가 내적 세계의 안내자이며 중개자로 나타내는 이유이다.

이것은 단테(Dante)의 《신곡》(神曲)에서 주인공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Beatrice)나 《황금의 당나귀》(The Golden Ass)유명한 저자인 아폴레이우스(Apuleius)를 보다 더 고귀하고 영적인 삶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의 꿈에 나타난 여신(女神) 이시스의 역할과도 같다.  

3) 남성인격의 조화성으로서 아니마

아니마는 내적 인격으로서 무의식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면서도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기능도 갖는다. 아니마는 깊은 무의식에 작용하여 진정한 자기와의 관계와 조화를 이루어 인격의 원만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아니마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인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마력을 가졌다는 점에서다.

우리는 대개 '사랑하는 것'(loving)과 '사랑에 빠진'(falling in love) 것을 구분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에 대해 고마워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평범한 실패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진 장엄함을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런 것을 투사하면서 살았지만, 이런 투사의 안개를 걷어내면 그 사람 자체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이란 분명 경이로운 존재이지만, 투사의 안개에 가려 상대의 깊이와 고귀함을 보기 어렵다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제 사랑은 어느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 사람 자체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간에 원형적 혹은 신적인 세계에 침투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갑자기 신과 여신으로 보이는데, 상대를 통해 서로 초개인적이고 초(超)의식적인 존재 영역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이 체험은 폭발력이 강하고 쉽게 불타오르는 신의 광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은 화려한 문체로 이런 체험을 묘사한다. 사랑에 빠진 여인이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지켜보면, 이들은 서로를 넘어서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넘어서 상대의 아이디어나 감정과 사랑을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 자체와 사랑하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신, 에로스를 바라보는 프쉬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랑에 빠지는 것을 신의 방문과도 같은 것이라 보는 이유이다.

아니마의 사랑의 특성이 내면의 원형적 인격을 만나는 것이라면 이는 인격의 조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특성은 반드시 무의식으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의 연결성도 내포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연결성에서는 육체와 지혜라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융이 아니마 개념을 설명하기 위하여 즐겨 인용하는 소설은 라이더 해거드(Rider Haggard)의 《그녀》(She)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의 '그녀'는 아주 아름다운 여자일 뿐 아니라, 불사(不死)의 여사제(女司祭)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녀는 고대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고 감추어진 교리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 어떤 남자가 정서와 본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면, 여자는 그 남자에게 성적 매력을 발휘하여 그에게 '육체의 지혜'를 가르쳐 주어 인간의 품으로 그를 돌려놓는다. 이렇게 되는 경우에 때로는 아니마는 무의식의 화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여자는 그에게 초월적인, 아주 오래된 지혜를 갖춘 사람으로 보인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는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황야의 이리》(Der Steppenwolf)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소외된 남자의 원형인데, 그의 소외상태를 불쌍히 여긴 한 평범한 젊은 여자가 그를 유혹하여 환상적으로 심리의 발전을 도와준다. 그렇게 하여 그는 마침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중적인 특성은 육체와 정신의 연결성에서 이해되기 쉬운데, 성적인 경험은 반드시 성적이라고 볼 수 없는 느낌과 정서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 줄 수' 있다. 사랑에 빠져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적인 경험도 결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이해라는 전반적인 차원도 결여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적인 것을 경험함으로써 '열정'과 정서적인 가치를 알게 된다. 성적인 관계는 '인생의 의미' 그 자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정리

우리는 지금 앞장에 이어서 내적인 인격으로서 아니마에 대해서 기술했다. 인격의 원형은 근본적으로 정신을 이루는 바탕으로서 특성을 갖는다고 했다. 정신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고 본래 있는 특성으로 내재된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여성적인 특성이 내부적으로는 남성에게서 정신의 특성을 이루면서도 외적으로는 인격으로 표출되는 것이 된다. 그 중에서 아니마는 여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했다. 어떤 남성도 여성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을 정도로 완전히 남성적이기 만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 소장,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