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역사적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부패무능한 죄인들에게 가슴 떨리게 하는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나를 위해 이 도리를 내셨구나. 이 은혜가 없었다면 어쩔 뻔 했을까'라고 감읍하며, 자신의 생애가 이 은혜에 대한 보은이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이는 이신칭의의 전파자들인 아브라함(갈 3:6), 하박국(합 2:4), 바울(롬 1:17)뿐만 아니라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 의(義)를 더 주목하는 이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 그랬듯 모두 이신칭의를 배척했으며 오늘날도 여전합니다. 그런가 하면, 정반대로 이신칭의 남용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신칭의에 대해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된다고? 구원은 따논 당상이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야"라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진정한 은혜는 남용자들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의 그 남용자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남용자들로 인해, 이신칭의는 공격자들로부터 '기독교 타락의 원흉'이니 '타락한 시대의 면죄부'라니 하는 오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대개 무늬만의 교인들입니다. 그들이 구원의 확신 운운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쉬운 종교(easy religion)'의 매력에 홀릭돼 나온 객기(客氣)일 뿐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참된 구원 개념에는 결코 그런 객기가 따라 나올 수 없습니다.

'이신칭의'만이 남용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역시 흔히 남용되는 것 중 하나였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인내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공의에 무관심한 분으로 치부됩니다. 물론 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회개의 동인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거지꼴의 탕자를 벗은 발로 맞아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은(눅 15:20), 우리에게 회개의 담력을 갖다 줍니다.

성경도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참아주신 하나님의 인내가 죄인에게 회개와 구원을 갖다 준다고 말씀합니다(벧후 3:8-9).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갸륵한(admirable) 인내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그들의 구원도 없었습니다(벧후 3:15).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암 3:2)'라는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 사랑을 독점한 민족이었습니다. 양자됨, 언약, 율법, 예배, 메시아가 모두 그들에게서 나오는 놀라운 특권을 입었습니다(롬 9:4).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배교했고, 그들을 돌이키려고 보낸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내민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고 있습니다(롬 10:21).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는 그들이 회개를 이룰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개인으로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잔해했던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인내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는, 가장 극악한 악인조차 구원에의 여망을 갖게 할 만큼 갸륵한 것이라 고백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5-16).'

반면 하나님의 인내를 남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죄와 벌을 쌓는 기회로 악용됩니다. 악행에 즉각적인 심판이 시행되지 아니하므로, 그들로 죄짓는 일에 더욱 담대하게 하여, 종말에 세상을 자신을 소멸(燒滅)시킬 타작 마당으로(마 13:40) 만듭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다음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남용하는 이들의 책임 소재를 따져보고자 합니다. 칭의유보자들은 율법이 배제된 은혜 일변도의 이신칭의 같은 가르침이 은혜의 남용을 낳았다고 주장하며, 자비의 남용을 없애려면 그런 것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자동차 사고가 나니 세상의 모든 자동차를 다 버리자'는 논리 같아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해를 도우려면, 무엇보다 남용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를 악용하는 자들을 두려워 아니하시며,-인류는 얼마나 하나님의 인내를 악용했습니까?-그들 때문에 결코 그의 자비를 중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자비를 행사하실 때 염두에 두는 것은 자비의 악용자들이 아닌 선용자들이었으며, 악용자들 때문에 복음을 변개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용을 막기 위해 이신칭의를 변개시키면 구원 경륜이 훼방받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악용자들을 위해 복음을 변개시킨다 해도, 그 변개된 복음으로는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9)'고 하신 말씀을 확대 적용시키면, 복음의 남용자(가라지)들을 처리하려고 복음을 손대다 그것으로 구원받을 알곡까지 다칠까 염려한다는 뜻으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사 43:4)'라는 말씀 역시, 택자의 구원은 가라지의 넘어짐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지나침이 없으며, 이는 복음이 택자와 남용자들 모두를 위할 수 없다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한시적 넘어짐 위에서 이방인의 구원이 성취된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는 절정을 이룹니다.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롬 11:11-12).' 이는 단지 복음이 남용자(실족자)를 생겨나게 할 것 이상을 말한 것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까지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의 설교까지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고 하신 것은, 그의 설교를 듣고 실족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리스도는 소수에게만 구원의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셨고, 다수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려진 돌이었습니다(벧전 2:7).

순교자 스데반 집사의 설교 역시 소수의 택자들에게만 구원의 복음이었고, 다수에게는 넘어지게 하는 돌부리였습니다. 그를 향해 돌팔매질을 한 자들은 흉악한 악인이 아니라, 복음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경건한(?) 유대교도들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자가 항상 명심해야 할 사안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의 남용자들을 염두에 두지 말고, 복음을 듣고 소담하게 열매 맺을 알곡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복음의 남용자들이 생겨나도 변개 없는 순수 복음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복음을 듣는 청중들 중에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청중이 당장 복음을 받아들이진 않지만, 때가 되면 복음을 받아들일 잠재적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복음을 말하여, 그들이 구원에의 부름을 받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동시에 설사 청중 모두가 불택자들일지라도 복음이 설교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지 못해 회개치 못했다는 핑계를 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이 복음 전파를 명하신 것은 택자 구원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불택자들을 정죄하기 위해섭니다. 복음은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복음이지만, 믿지 않는 불택자들에게는 정죄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 10:9)'는 말씀은 아주 부드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구원받지 않으면 심판에 처해진다는 아주 두려운 경고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고, 안 믿는 자에게는 정죄가 되는 심판과 구원의 분깃점입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는 예수님의 말씀도, 구원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아니한 자는, 심판 때에 그 복음이 그를 정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의 남용을 하나님의 지나친(?) 자비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자비를 남용한 것은 전적으로 남용한 자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똑같은 복음인데도 어떤 이는 그것으로 구원을 받고 어떤 이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가 됐다면, 이는 전적으로 넘어진 자의 탓입니다. 가라지와 알곡이 똑같은 토양에서 물, 양분, 햇빛을 동일하게 흡수했는데도, 어떤 것은 가라지가 되고 어떤 것은 알곡이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신칭의의 남용에 대한 책임 소재 역시 분명해집니다. 똑같은 복음을 들었음에도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가 됐다면, 이는 전적으로 넘어지는 자의 책임입니다. 이신칭의로 인해 걸려 넘어진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비롯해 로마 가톨릭, 칭의유보자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이신칭의로 인해 넘어진 자들의 책임을, 지나치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과 지나치게(?) 은혜를 강조한 이신칭의 설교자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롬 11;20, 22).',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벧전 2:7-8).'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알기쉬운 이신칭의(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