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2장 원형의 생성과 특징(3)

원형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다만 원형이란 이미 '이전에 형성된(praeformiert)' 것일 뿐이다. 원형은 "결코 전통이나 언어 또는 민족이동으로 점차 전파되어 온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저절로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런 외적인 매개의 영향을 받음이 없이 재생되는 것이다."

융의 언급에서 원형이란 사람의 신체의 각 기관이 이미 그렇게 형성되도록 조건이 지어져 있듯이 정신(Psyche)도 또한 그 자체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의 구조란 본래 거기 이미 있던 것을 우리는 다만 그때그때 새로이 발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1. 자연적인 정신의 산물

원형에서는 인간의 뇌와 정신의 구조 간에 비교가능성이 가능할지 모른다. 유기체의 물리적 환경과 상호 연관되듯이 원형이란 자연의 물리적인 조건과 관련되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원인으로 삼거나 결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살아 있는 신체란 그 특수한 여러 기능으로 환경 조건에 대한 하나의 적응 체계를 이룬다. 마음(Seele)도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신체 현상에 대응하는 그런 기능 체계의 기구(Organ)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신체적인 제약 아래에 있는 감각기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인 규칙성에 대한 정신적 병행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융은 신화의 생성을 자연의 물리적 조건에 대응하는-거기서 연유된 것이 아닌-정신적 반응의 소산으로 보는데, 이는 매일 매일 해가 뜨고 밤이 바뀌는 현상인 것이다.

자연적인 정신의 산물이라는 점은 설명이 곤란하다는 점을 내포한다. 이런 원형에 대하여 다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기대어 비교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사고(思考)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에만 있는 자발적인 기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데아가 완전히 정신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데, 이는 이데아가 정신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정신이 이데아 덕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가 정신에 의존하게 된다.

이데아론에 대한 해석은 현대의 전형적인 새로운 해석이지만, 어떤 그리스 사람도 이렇게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하는 정신의 대상을 항상 현실론적이고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고, '대상'을 진정으로 정신에다 마주 세웠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은 그때그때마다의 사고에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에다 맞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에서는 사람들이 세계를 자기 밑에 예속시킬 만큼, 스스로를 추켜세우지 않고, 오히려 인간은 자연에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데아를 미리부터 존재하면서 관조한다는 바탕 위에서, 참된 인식의 영원히 변치 않는 대상으로서, 순수한 사고에 나타나는 현실이라고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관조한다'는 말은 아마도 객관적인 이데아는 단순한 정신과 이 정신의 가능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이데아는 원형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이데아를 원형과 유비시키는 것이 그다지 무리가 아니라는 점이라고 볼 수 있다.

2. 정신의 모사물로서 원형

원형은 정신에 관계된 것이기에 정신의 모사물을 상정할 수 있다. 원형은 정화하게 알 수 없지만, 수많은 해를 거듭하면서 정신은 모사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그것은 태초의 시간 이래 인각된 상(像)의 형태로 정신적으로 모사(模寫, abbilden)된 것으로 보려는 시각이다. 원형이 정신의 모사라는 시각은 원형의 시각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원형은 그 특성상 비공간적이고 무시간적이며, 그리고 변치 않는 어떤 것이자 사고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원형이 감각적이고 시-공간적인 현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자연의 물리적 현상에 대한 환상적 비유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융이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매일 아침 영웅의 신(神)이 바다에서 탄생하여 해의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르며 서쪽으로 향하는 그것이다. 서쪽에는 태모(太母, Grosse Mutter)가 있어 그를 기다렸다가 그가 서쪽으로 오면 저녁에 그를 삼켜 버린다. 밤중에 그는 용의 뱃속을 헤매어야 하며, 이 밤의 구렁이와 무시무시하게 싸운다. 그런 다음에 아침에는 그 영웅의 신(神)이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믿는다.

이런 현상은 원형이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이데아가 현실적인 사고나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적인 실재성이라는 점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원형의 실재성은 비록 관념적으로 실재하지만, 수학과 논리학의 타당성과도 같다는 것이다.

수학에서 2×2=4라고 하는 명제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2직각이라는 명제는 세계의 어떤 권력을 가지고도 취소할 수가 없는 것과도 같다. 이런 명제들은 절대로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부터 이 명제들이 타당하기 시작했으며, 또 세계가 없어져 버린다면, 이 명제들의 타당성이 중단되지 않겠는가의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도 같다. 이런 것을 말하면 신화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학자들에게서 신화란 단지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원시인들이 시도한 결과라는 것이지만, 융은 이에 반대한다. 자연과학이나 자연철학이면 몰라도 점성술이나 신화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다. 그것들은 오직 불가해한 현상을 설명하는 필요성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의 물리적인 과정이 환상적인 변화 과정에 동화되어 파악되었다 본다. 그리고 다시 무의식으로 하여금 비슷한 상(像)을 재생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정신이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물리적인 사실에 대한 환상을 기록한다는 점에서다. 

3. 강렬한 감동의 산물

원형은 강렬한 감동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융은 동아프리카의 엘곤산 위에 사는 원시 종족인 엘곤족을 관찰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그 종족들은 해가 뜰 때 손바닥에 침을 뱉어 해를 향하여 쳐든다. 그 행위는 그들에게는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다. "저 해가 신이냐?"고 융이 그들에게 물었으나 그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해가 동쪽에서 바로 떠오르는 순간 그 해는 신으로 간주되었다가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을 때는 신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티스타'(athista)라는 말이 있는데 '해'라는 뜻도 되고 '신(神)'이라는 뜻도 된다.

해 뜨는 것,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느끼는 해방감이란 마치 밤과 그에 대한 불안이 그러한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 동일한 신성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리적인 것보다도 그의 정감(情感, Affekt)이 더욱 가까운 것임을 시사해 준다. 실로 밤은 구렁이요 귀신의 찬 입김이며, 아침은 한 훌륭한 신( 神)의 탄생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융은 폭풍이나 번개, 비와 구름이 상(像)으로서 마음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정동에 의해여 생긴 환상이 상으로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강렬한 감동은 원형을 형성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원형은 강렬하고 감동적이며 다채로운 경험은 원형군의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원형은 모든 조상들의 아버지, 어머니와 아이에 대한 것들이고, 남편과 부인, 마술적인 인격, 신체와 마음을 위협하는 것 등에 대한 것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루어진 원형의 군(群)이 인간의 종교적 생활을 조절하고, 심지어는 정치적 생활을 조절하고 형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는 원형의 생성과 원인론에 관한 것이 아니고 보다 더 근원적인 인류의 체험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원형의 군과 관련하여 원형의 생성은 쉽게 알 수 있는 점이 아니라는 특성에서 각 개인이 생후에 경험한 개인적이 역사를 넘어선 그 이전의 수백만 년에 걸친 인류의 체험이 원형의 존재와 관계되리라는 점을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융은 원형이 반드시 후천적이라든가 그 원인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역사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간 곳에서 시작되는 출생 이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인류의 체험과 원형이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묘사들은 모두 원형의 생성에 대하여 어렵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무수한 세월을 지나서 강렬한 감동이 개인의 정신에서 원형을 생성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신의 원형과 관련하여

신의 원형은 원형을 생성하는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이런 것이 맞다면 인간은 보이는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정신의 특성이 신의 특성과 닮았다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의 원형과 관련하여 정신의 복합적인 특성인 콤플렉스를 생각할 수 있는데, 원형은 콤플렉스의 핵심이라는 점에서다.

원형은 심리 및 정신에서 중심이나 핵심으로 작용하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작용은 자석처럼 관계있는 경험들을 끌어당겨서 콤플렉스를 형성한다. 이러한 경험이 증가되어서 충분한 세력을 얻으면 콤플렉스가 의식에 침입할 수가 있다. 다만 원형이 의식과 행동에 나타난 경우는 원만하게 발달한 콤플렉스의 중심이 되었을 때이다.

신의 원형에서 '신의 콤플렉스'가 발달한 경우는 그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이 세계를 경험함에 따라서 신의 원형과 관계있는 경험이 그것에 결합되어 콤플렉스를 형성한다. 이 콤플렉스는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점차 세력을 얻어 결국에는 의식에 침입할 수 있을 정도로 된다. 신의 콤플렉스가 지배적으로 되면 당사자가 무엇을 경험하든지, 어떻게 행동하든지에 대한 것이 모두 신의 콤플렉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 경우 당사자는 모든 것을 선악의 기준으로 지각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악인에 대해서는 지옥의 불과 천벌을, 선인에게는 영원한 낙원을 설파하고 죄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난하며 회개를 촉구하는데, 이는 자신을 신의 예언자,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신이라고 확신하여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할 사명감을 갖는다.

그것은 자신 외에는 이러한 일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여기는데서 연유한다. 이런 사람은 광신자 또는 정신병자로 취급을 받는다. 이런 현상은 콤플렉스가 자신의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물론 콤플렉스가 무한적으로 세력을 가진 극단적인 경우이다. 반면에 이런 사람의 '콤플렉스'가 정신전체를 점령하지 않고 정신의 '일부'로서 작용하고 있었다면, 그는 인류를 위해 크게 기여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5.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집단무의식의 원형론에 대하여 기술했다. 원형이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유형이 있으며, 정신에서는 어떤 작용을 하는지에 대해서 고찰한 것이다. 이런 원형은 집단무의식의 바탕으로서 존재하는 특성을 가졌다고 했다. 모든 것에 원래의 형태라는 원형이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보이는 가시적인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점에서다. 특히 이 원형은 인간의 정신에서도 일정한 원형이 존재하거나 나타난다는 사실은 정신의 깊은 곳을 알 수 있는 것과 더불어 인간성의 근본을 깨닫게 만든다.

원형이 원래의 형태로 존재하지만 그것이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인간의 정신에서 유전적으로 물려내려 오고, 그것은 집단무의식의 원천이 된다는 점은 정신의 가장 깊은 곳이 어딘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런 원형은 기독교적으로 창조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해 본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은 원형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만약 우연히 만물이 생겨났다면 동일한 형태의 모양이나 모습을 굳이 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과 관련하여 필자가 모 대학원에서 분석심리학을 한 학기 동안 강의할 때에 이런 논의가 이루어져 참석자들이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에 기뻐하기도 했다. 다만 이런 원형에 대하여 지면 관계상 원형의 발견에 대하여는 기술하지 않았으나 이는 후술하게 될 치료의 부분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