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교회 공동체 속 ‘과정’의 중요성

입력 : 2017.07.17 18:28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과정(課程)'이란 해야 할 일의 정도, 일이나 상태가 진행하는 경로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process, curriculum, course 등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빈부, 학식, 문화, 성격, 힘 등 다양한 차이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차이 때문에 겪는 인류의 고통은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인류에게 차이가 없는 것이 하나 있다면, 과정일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삶에서 누구나 내가 목적하는 것을 이루고 성취하기 위해, 과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과정의 진실, 피, 눈물, 땀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으며, 정직하고 공정하며 신실한 노력으로 얻어지는 결과와 과정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것입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교사는 교사로, 예술가는 예술가로, 자신이 희망하고 소원하는 바를 달성하려면, 시작과 끝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그 과정을 통과해야 만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이란 공생애를 사시기 위해 30년이라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지나오셨습니다. 이 시절 육신의 부모와 이웃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이후 세례 요한으로부터 요단강에서 앞으로 이룰 성령의 세례를 위해 친히 인간들이 받는 물세례를 받으시며, 가나의 혼인잔치를 시작으로 골고다 언덕까지의 과정을 십자가로 매듭지으시고, 부활의 소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과정에는 기뻤던 일과 슬펐던 일, 그리고 수난과 고통의 나날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자가 형틀의 고통을 감내하시며,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이 땅에서의 일들을 마무리하시면서, 다시 "본 그대로 오리라"는 약속을 주시며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정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과정은 질서를 지키며 순리대로 행해져야 합니다. 그 순리와 질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중간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신실한 과정의 땀 속에는 훌륭한 성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 실패했더라도, 다시 용기 있는 믿음으로 도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 공동체란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함께하는 성도들과의 공동생활, 곧 공동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활동을 근간으로 모든 생활과 신앙, 이념을 함께하는 조직을 말합니다. 초대교회가 보여준 공동체의 모범을 모델로 신앙생활을 하고픈, 곧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기쁨과 슬픔, 희망과 아픔에 함께 동참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의지를 담은 표현이 곧 '공동체 생활'입니다.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거듭된 밀실담합과 이웃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약속했던 당회의 신뢰를 무참히 짓밟는 지도자들이 있다면, 그 잘못된 과정의 결과는 쭉정이와 알곡을 가릴 때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툭 하면 눈치 보기에 급급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비인간적이고 상식을 초월하는 신앙인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비신앙인들로부터 괄시를 받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한 제자보다 더 진한 배신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중직자의 자질을 갖추고, 리더십과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성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과 성경 말씀을 늘 묵상하며 성경적인 행동과 지식을 겸비했을 때에야, 장로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 어떨까요? 장로가 장로로 보여지지 않을 때, 교회는 분쟁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공동체는 개인의 자유와 의사를 묵살해선 안 될 것입니다. 공동체는 서로 소통하고 함께 나누면서 더불어 꿈을 꾸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는 반드시 주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에 찾아오는 성도들 모두가 꿈을 꾸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곳이 돼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께서 당부하시고 명령하신 복음을 위해 모든 과정을 거기에 집중하여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위해서는 첫째로 서로 사랑해야 하고, 두 번째는 이웃의 불행을 나의 불행으로 여겨 그들을 위로하며,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어려운 난관이 부딪혔을 때, 항존직이라면 누구나 이 난관을 헤쳐나가겠다는 확실한 뜻을 드러내야 합니다. 물론 다 같은 생각일 수는 없지만, 옳은 일이라면 과감히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윗사람 눈치나 보면서 남의 말만 듣고 소신도 없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안수집사나 권사를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지요!

교회 최고 지도자인 장로는 어린 양 떼들을 위해 밤낮 없이 수고해야 합니다. 양들을 살리고 세우는 일은 바로 교회 지도자들의 낮은 자세를 통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목이 곧아 '갑질'을 행사할 때,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을 죽이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 중에도 눈치 보기에 급급한 분들이 많음을 심히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저기서는 옳은 말을 하면서, 당회나 권력 있고 힘 있는 지도자들 앞에서는 딴소리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지도자들 때문에 양들은 피곤하며, 그 피해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신앙인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명정대하고 공평해야 합니다. 요즘 사회가 교회를 질타하는 것은 바로 이 정직성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중적인 사람들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럴까요? 교회 안에 주님은 계시지 않고, 모두 힘 있는 자들이 주님을 대신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떼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양떼가 없으면 목자는 필요 없습니다.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심초사 양들을 살피고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목자이며 지도자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명을 잊은 채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는 만성이 되어 버려, 자신의 사명을 잊은 채 권력의 재미를 더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노라면, 참으로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마련해 주신 삶을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 채, 눈앞에 보이는 신이 되어버린 돈과 권력과 명예를 좇아가는 삶에만 치중해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있어도 상처를 주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은 뒷전인 채 금수저라고 뽐내며 웰빙을 자랑하고 외치지만, 주님께서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어느 누구든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이므로, 이 귀한 시간을 쓸데 없는 허무한 것을 위해 낭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중직자로 있던 교회를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이웃 교회를 기웃거립니다. 그곳에서 정착을 잘 하는가 싶더니, 또 장난을 치며 중직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을 칩니다. 결국 힘 있는 권력에 아부하여 중직자가 되는 일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하지만 중직자가 되는 그 과정 속을 들여다 보면 심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또한 비성경적이며 비 신앙적이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교회가 지금까지 옛 구습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은 실로 슬픈 일입니다. 지금 이 귀한 시간이 없다면, 내일도 미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귀한 시간을 헛되이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신 바 되신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만이, 신앙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영원한 희망은 오직 주님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 기다림을 통한 신앙인으로서의 과정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효준 장로(덕천교회,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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