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
▲미자와 옥자의 행복한 한 때. 사람과 자연의 조화에 대한 열망을 영상화하고 있다.
※이 칼럼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2015년 7월,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사자 세실(Cecil)이 한 미국 치과의사에 의해 잔혹하게 사냥당한 일이 있었다. 논란이 일자 이 미국인은 그 사자가 그렇게 유명한지 몰랐으며 사냥 과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는 현지인 사냥꾼을 고용해 동물보호구역 내부에 살고 있던 사자 세실을 사냥허가구역까지 유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냥을 실행한 구역 자체는 합법적이었지만, 사냥의 과정은 편법적이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주요 언론사들은 일제히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세실이 마치 짐바브웨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민 사자'인 것처럼 소개하였고, 미국 치과의사의 행태에 짐바브웨를 비롯한 아프리카 각국이 크게 분개한 것처럼 보도했다. 국내 언론들도 주로 서방 언론의 기사를 번역해서 소개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사태가 진행되는 것으로 여겼다.

실상은 달랐다. 사실 세실이라는 사자의 죽음에 분개한 것은 동물애호 개념이 투철한 서구인들이었을 뿐, 짐바브웨 사람들은 별반 관심이 없었다. 사자 한 마리 죽은 일로 동요하는 서구인들에 대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시선은 단지 위선자를 보는 시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자를 보호한답시고 호들갑을 떤 것도 서구의 백인들이고, 사자를 주로 사냥하는 것도 서구의 백인들이었다.

그들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았던 시절 행했던 반인류적 범죄들, 그리고 신식민지주의(neocolonialism, 형식적으로는 독립을 허용해 주면서 실질적으로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주의)를 통해 현재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자행하고 있는 억압과 착취를 생각하면, 사자 한 마리 죽인 일로 애도의 감정에 휩쓸리는 서구 백인들의 태도는 아프리카 현지인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단지 유흥을 위해 동물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결단코 적절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세실의 사냥에 대한 서구인들의 비판에도 문제는 있다. 생명이 있는 존재를 그리 사랑한다면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옥자
▲짐바브웨 사자 세실과 이를 사냥한 미국인 치과의사.
◈윤리와 동물: 서구로부터 유래된 동물애호사상의 허상

사자 보호 운동에 대해 한 가지 사례만 더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조이 아담슨(Joy Adamson, 1910-1980)은 영국 유명 화가이자 저술가 및 동물보호운동가였다. 그녀는 케냐의 어린 사자 엘사(Elsa)를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데 성공한 일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1956년 당시 남편과 함께 아프리카 케냐 북부에 살고 있었다. 남편 조지 아담슨(George Adamson)은 케냐 사냥허가구역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과 동료 관리인을 공격한 암사자를 사살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을 공격한 이유가 세 마리의 새끼사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부인인 조이 아담슨은 죽을 운명에 처한 어린 사자 세 마리를 집으로 데려와 기르기 시작하였다. 세 마리 모두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그녀는 두 마리를 네덜란드 로테르담 동물원으로 보내고, 남은 한 마리의 암사자 엘사를 정성껏 키운 뒤 야생적응 훈련을 시켰다. 그녀의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엘사는 최초로 사람에 의해 키워진 뒤 야생 적응에 성공한 사자로 기록됐다. 아담슨은 이 과정을 책으로 펴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엘사는 야생으로 돌아간 뒤 몇 마리의 새끼사자를 낳은 후 병으로 죽었다. 반쯤 자란 새끼사자들은 주변 인가를 공격해 가축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에 이들이 사냥꾼에게 잡혀죽을 것을 예상한 아담슨은 이들을 포획해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옮겨 놓았다. 엘사와 새끼사자들의 일을 계기로 그녀는 평생 아프리카 사자들의 생명보호를 위해 일했다.

그러나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1980년 그녀는 사자에게 먹힌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그녀가 돌보던 사자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녀는 사자에게 죽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고용했던 케냐인들에 의해 살해된 뒤 사자에게 던져진 것으로 밝혀졌다. 고용인들은 아담슨이 현지인들을 헐값으로 부려먹은데다, 그 헐값의 월급마저 몇 달째 체불하면서 사자에게 줄 고기를 살 돈은 아끼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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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보호 운동에 앞장서 유명해진 조지-조이 아담슨 부부. 조이 아담슨은 사자는 보호하고 돌보았으나 사람을 천대하고 무시한 까닭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 사건은 서구 동물 애호사상이 내포하고 있는 본연의 내적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동물 애호사상은 기본적으로 자연 섭리와 생명에 대한 무한한 존중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 개인이나 단체의 기호를 반영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서구의 동물윤리는 사자는 아끼고 살리려 하면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인 빈곤과 착취는 외면하고 있다. 개의 도축은 흉악한 범죄 취급을 하면서도, 소∙돼지∙닭의 도축에는 거리낌이 없다.

다시 말해 동물보호 및 애호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고 이중적이다. 오늘날과 같이 육류 섭취 기회가 비교적 흔한 상황에서 굳이 개를 먹는 행위를 비호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도축과 육류 섭취라는 차원에서 개, 소, 돼지, 그리고 닭 사이에 과연 무슨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이 질문을 제기할 대상 중에는 당연히 영화 <옥자>도 포함된다.

◈심리와 동물: 동물애호의 심리학

전편에서 지적하였듯, 서구의 동물보호 및 애호사상은 애초 기독교 문화로부터 유래된 것은 아니었다. 굳이 기원을 따지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에 대한 관심을 지목할 수 있고, 이것이 중세의 대표적 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를 통해 기독교적 동물관(觀)의 일부로 편입된 사실을 주목해볼 필요는 있다.

아퀴나스의 동물에 대한 이해 가운데는 사람보다 열등한 가능태(δύναμις, dunamis)를 지닌 존재라는 규정, 그리고 사람과 유사하게 지적 자기의식을 가진 개체로 볼 수 있다는 규정이 혼재돼 있다.

오늘날 기독교적 관점에서 동물보호를 정당화하는 동물신학자나 생태여성신학자들은 후자의 규정을 환영하는 가운데 동물에게 사람과 평등한 생명권을 부여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사고의 전환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존중하고 회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관점이 아니라 심리학 관점에서 동물애호는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미국 심리학자 헤롤드 허조그(Harold Herzog)는 '다윈주의와 사람-동물 간 교류 연구(Darwinism and the Study of Human-Animal Interactions)'라는 논문을 통해 진화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사람과 동물의 심리가 주변환경에 적응하는 진화의 결과로 형성됐다는 심리학 이론)의 관점으로 동물애호에 대하여 분석한 바 있다. 허조그는 사람이 동물을 보호하고 애완동물을 기르는 데 대해 주로 네 가지의 심리학적 이론이 제시된다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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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가 옥자에게 보이는 헌신적 애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심리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사람이 가진 생명에 대한 애착(biophilia)이다. 이 이론은 1984년 하버드대 동물연구 전문가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 다수의 동물애호가들과 생태학자들이 환영하는 것이다.

윌슨은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달리 생명체 및 생명활동 자체에 대한 특별한 본유적 관심과 애착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윌슨의 견해대로라면 동물을 사랑하고 애호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심리적 특성으로 규명된다.

이 이론은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며 동물보호에 대한 보편적 윤리 정립을 정당화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정설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일단 모든 사람이 동물이나 생명활동을 사랑한다고 하는 현실적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고, 특정 종(species)에 대한 광범위한 혐오증(biophobic, 바퀴벌레, 쥐, 뱀 등에 대한 일반적인 혐오의 심리)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단지 이론에 불과할 뿐, 현실에 의해 지지되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두 번째는 의인화 성향(anthropomorphism)이다. 이 이론은 펜실베니아대 동물학 교수 제임스 서펠(James Serpell)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서펠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수만년에 이르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주로 수렵, 즉 동물의 사냥에 의지하며 살아 왔다. 사냥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지만, 다른 한편 인류는 특이하게도 사냥감에 대한 동정심과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유독 사람에게서 확연하게 보이는 의인화 성향 때문이다.

영리한 사냥꾼이자 포식자로 살아온 사람은 자신의 사냥물에 자기 감정을 투사하는 능력, 즉 사냥물도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데 공감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심리적 특성 때문에 사람은 특별히 동물을 살육하는 데 대한 뿌리깊은 죄책감을 갖고 있고, 이것이 동물보호 및 애호사상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서펠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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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를 도축하려던 미란도 사 직원은 미자가 내민 사진을 보고서 그녀가 옥자를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을 알고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동물에 대한 사람의 의인화성향을 표현한 장면이다.
세 번째는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과학주의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가 주장한 밈(meme) 이론이다. 도킨스가 규정하는 밈이란 사람의 심리 속에 작동하는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로서, 주로 구전 전승과 모방에 의해 자가복제를 수행하는 원동력이다. 허조그는 동물보호 및 애호 사상이 주로 20세기를 기점으로 발흥한 점에 주목하고, 이런 사상들이 밈의 작용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 사례로 허조그는 1980-1990년대 미국에서 분 달마시안(Dalmatian) 열풍을 제시한다. 1968년만 해도 달마시안이라는 견종은 미국 애완동물 선호도 순위에서 27위를 차지하였으나, 1994년에는 9번째 선호하는 동물로 선정됐다. 그러나 불과 7년 후인 2001년 달마시안에 대한 선호도 순위는 58위로 급락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달마시안이라는 견종이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61년 디즈니 유명 애니메이션 <101마리 달마시안(101 Dalmatians)>이 개봉된 후 대중의 달마시안에 대한 선호도는 지속적으로 상승돼 왔다.

도킨스식 해석대로라면 '달마시안을 기르고 싶어하는' 밈에 의해 형성된 모방심리가 1990년대까지 존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6년 <101마리 달마시안>이 실사영화로 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 달마시안에 대한 선호도가 급락한 것은 미디어와 대중이 달마시안에 대해 일종의 식상함을 느끼면서, 달마시안을 기르고자 하는 밈이 급속하게 쇠퇴한 결과로 풀이될 수 있다.

네 번째는 저명 생태학자 스티븐 켈러트(Stephen R. Kellert)가 주장한 이론으로, 사람이 동물 및 자연 생태를 다루는 행태를 지극히 현실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켈러트에 따르면, 사람이 동물을 대하는 기본적 태도는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것으로, 실용주의적(utilitarian)이고 지배주의적(dominionistic)이며, 평등하고 자애로운 관계 성립이 불가능한 부정주의적(negativistic) 성향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켈러트의 이론은 특별히 윌슨의 이론, 즉 생명에 대한 보편적이고 본유적인 사랑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다.

◈예언과 동물: 이사야서 11장에 대한 상반된 해석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면 위 네 가지 이론 중 첫 번째(생명체에 대한 보편적∙본유적 사랑), 두 번째(동물에 대한 의인화성향), 그리고 네 번째 이론(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가치판단)이 수긍될 만한 것으로 판단된다. 왜 그런지는 사람과 동물의 이상적 관계를 예언하는 이사야서 11장 해석을 토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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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 11장에 기록된 창조섭리의 회복을 표현한 사진.
이사야서 11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세상을 예언하는 대목으로서, 특정한 형태의 구원이 이루어진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 대목은 특히 유대교에서 큰 사랑을 받는 부분으로,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이후 매년 건국기념일마다 봉송되는 성구이기도 하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10)."

이사야 11장 해석에 있어 흥미로운 사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해석 방식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 전문 종교학자 크리스토퍼 레이턴(Christopher Leighton)과 아담 그레거먼(Adam Gregerman)은 이사야 11장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해석 관점의 차이에 대하여 면밀하게 연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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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 옥자, 새끼돼지가 함께하는 평화로운 숲속. 포식자와 피식자가 서로를 아끼며 공존하는 모습은 이사야서 11장의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의 분석에 의하면, 유대교는 이사야 11장 전반부, 즉 이스라엘의 정치적 구원과 융성함에 강조점을 둔다. 이는 소위 시오니즘(Zionism)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민족중심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으로 반영된 해석이다.

이런 해석의 기원은 12세기 유대교 신학자 마이모니데스(Maimonides, 1135-1204)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이모니데스는 이사야 11장의 예언이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에 국한된 것이며,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와 같은 표현들이 모두 이스라엘의 평화로운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은유적 예언이라고 해석한다. 신학자인 동시에 자연과학자이자 의사이기도 했던 마이모니데스는 메시아의 도래가 자연생태까지 급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해석을 수용하지 않았다.

반면 기독교의 경우 전통적으로 이사야 11장을 그리스도 강림 이후 이 땅에 펼쳐질 구원 상태에 대한 실상을 예언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에서 이사야 11장을 언급하며 메시아의 도래 이후 유대인과 이방인 전체를 포괄하는 전우주적(universal) 구속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다(롬 15:8-12).

레이턴과 그레거먼이 조명한 바울의 이사야서 해석은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전망과 맞물려 이사야 11장의 예언을 읽히는 그대로 해석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나 인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 이후 파괴된 생태계 질서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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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제사는 노아의 홍수 때 짐승을 먹는 것이 허락되기 이전, 이미 가인과 아벨의 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었다. 이 사실을 통해 아담의 타락 직후 사람과 동물의 관계가 원래의 조화로움을 상실하였음이 확인된다.
문제는 회복의 방식과 시점이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기독교적 해석에 의하면 이사야 11장에 기록된 사람과 동물의 관계 회복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실현된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초월적 역사이자 완전한 종말론적 회복이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인위적으로 동물과의 관계를 회복해보려 해도 재림 이후에 실현될 회복의 모습에 이르기는 역부족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사람이 보편적으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윌슨의 이론은 당장에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의해 입증될 이론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온전한 창조섭리의 회복이 이뤄지기 전까지 사람은 의인화성향과 인간중심적 심리에 의존해 동물을 대할 수밖에 없음을 수긍하게 된다. 죄책감을 감내한 채 도축하고 이용하는 것, 이것이 사람과 동물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진보적인 기독교적 관점, 즉 동물신학이나 생태여성신학의 관점으로 보면, 이사야 11장에 기록된 메시아의 도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라 '초림'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미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으므로 오늘날의 현실에서 창조질서 회복, 즉 사람과 동물의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계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창조질서 회복의 명분은 사람이 담당해야 할 생태적 책임과 윤리를 부각시킨다는 차원에서는 강점이 있을지 모르나, 인위적이고 불완전한 회복을 향한 전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정치적 해석과 유사한 면모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이사야 11장의 종말론적 예언은 완전한 사실 자체일 수 없고, 단지 사람에게 특정한 정치적 혹은 윤리적 지침을 부여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동물신학이나 생태여성신학의 해석은 사람의 생태에 대한 사랑을 유형화하고 이를 장려한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고, 의인화 성향으로부터 유래되는 죄책감을 덜어주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현실적 태도인 인간중심적 심리에 대해서는 공허한 대답만을 전달해줄 소지가 크다. 윤리적 이상은 숭고할지 모르겠으나, 결론적으로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론으로 귀결되고 말 가능성이 높다.

◈사람과 동물: 가축이자 식량

그래서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면, 영화 <옥자>의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동물을 가장 적절한 태도로 대하는 이는 주인공 미자가 아니라 미자의 조부 희봉(변희봉 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숙련된 농부로서 자연친화적인 동물 사육법을 실천한다.

동물들이 최고의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하고, 그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동물과 자연 생태가 어떤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지를 알고 있고, 이 지식을 손녀인 미자에게 전수한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도축에 주저함이 없다. 10년이나 공들여 길러 온 슈퍼돼지 옥자를 미란도 사에 다시 내어주는 데도 전혀 감정적인 동요가 없다. 그는 아직 창조섭리가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현실에서 동물이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가진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대한다. 그가 슈퍼돼지와 닭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미자와 옥자가 구출해온 새끼돼지가 미자네 집 마당에서 뛰어다니다 닭들을 놀래킨다. 이에 희봉은 돼지에게 주의를 준다. "닭 놀라게 하지 마." 그에게는 모든 동물이 적절하게 평등하다.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다. 어차피 사람과 동물의 교감이란 온전할 수 없음을 평생을 통해 체감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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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의 조부 희봉.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과 동물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반면 미자에 대한 옥자의 태도는 현실을 앞서 있다. 미자는 옥자를 돌보는 가운데, 돼지를 가축이 아닌 가족으로 대한다. 어떤 의미로 옥자는 미자에게 있어 조부인 희봉보다도 중요한 존재다. 미자는 옥자를 통해 사람과 자연의 완전한 조화를 시도해 보려 한다. 이런 시도는 사람의 영혼에 각인된 창조섭리의 회복에 대한 갈망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시도는 현실에서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옥자라는 특정한 개체와의 관계는 우호적이고 평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물 전체에 일반화될 수 없는 개별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이 피상적으로 아름다운 개별 사례는 구속 이전 사람과 동물 사이의 본질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은폐하고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1870년 겨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당시 프랑스 수도 파리는 프로이센군에 의해 4개월 간 포위되어 있었다. 파리 시민 전체가 고립되어 식량 부족으로 아사 직전에 이르자, 애완견은 물론 동물원의 사자와 코끼리를 비롯해 길가에 돌아다니는 쥐까지 잡아먹으며 연명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당시 가족처럼 아끼던 애완동물을 잡아먹어야 했던 파리 시민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개인적으로 비감을 느낀 사람들이 일부 존재했겠지만, 거기에 대하여 윤리적 책임을 물었던 문헌을 찾아볼 수는 없다.

사람의 삶에 도움되도록 활용하고 필요할 때는 거리낌없이 먹는 것, 애초에 이것이 성경적인 사람-동물의 관계일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영화 <옥자>는 소소한 재미는 부여할지 모르나, 기독교인들의 삶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