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이신칭의는 자기 의(義)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죄인들을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이 자기 의를 위해 뭔가 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이신칭의를 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신칭의는 칭의유보자들의 공격처럼 바울, 루터 시대에 비로소 등장한 '시대의 아들(a creature of the age)'이 아닙니다. 시대를 불문한, 무능한 죄인들을 위한 자비의 선물이었고, 처음부터 모세와 선지자들에 의해 가르쳐졌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0-22)."

이신칭의는 자기의 무능을 인정한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복음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유대인들에게 그랬듯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입니다(롬 9:30-33).

인간의 전적 무능을 가르치는 성경 내용들이 많지만 대표적인 두 사례가 있는데, 그 하나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중풍병자입니다(요 5:2-8). 천사가 물을 동하는 시간에 연못에 들어가기만 하면 고침을 받을 수 있는데도, 연못을 지척에 두고도 언감생심 헛물만 들이켰습니다.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에 대한 또 하나의 예가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선천성 소경입니다. 이들은 한 번도 눈을 뜬 적이 없기에, 본다는 말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고, 본다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그들이 소경됨을 알지 못하기에, 눈을 떠야겠다는 꿈도 꾸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로 인한 인간의 생득적이고도 절망적인 무능을 상징합니다.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교수가 그의 저술에서 절망적인 인간의 무능을 빗댄 선천적인 소경에 대한 우화는 공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어느 날 정상인이 선천적인 소경들만 사는 동네에 들어가서 '나는 눈을 떠서 태양을 봅니다'라는 말을 했다가, 소경들로부터 '그것은 당신이 눈꺼풀을 깜빡이다 일어난 착각일 뿐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라고 비웃음을 샀다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영적 소경인 불신자들이 눈 떤 기독교인들에 대해 보이는 조소와 흡사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고 하신 말씀도, 영적 소경된 유대인들의 비참함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들뿐이겠습니까? 죄로 영적 무지에 빠진 모든 인간은 다 선천적인 소경과 같습니다. 만일 평생 그의 영안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영적 세계를 못 볼뿐더러, 자신이 영적 소경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들을 향해 '당신은 죄로 죽었다'라고 말해주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라고 쏘아붙이는 그들의 태도에서 비애를 넘어 절망을 봅니다. 그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는 때는, 눈이 열려 영적인 세계를 볼 때 뿐 입니다. 중생이 바로 죄로 죽은 자가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이고, 이 중생을 통해 비로소 전에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 1:18)'고 말한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그리스도 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최후의 경험이기에,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죽음을 과거사로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죽음에서 중생한(엡 2:1) 그리스도인만이 과거에 자신이 죄로 죽었던 사실을 반추할 수 있습니다.

중생과 동시적 사건인 칭의도 마찬가집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이 불의하다는 것을 자각할 수 없습니다. 현재적 칭의가 유보된 채 종말의 칭의를 준비하는 칭의유보자들을 볼 때, 한 번도 무엇을 본 적 없는 소경이 자신의 소경됨을 알고 눈뜨기를 준비하는 것처럼, 죽은 자가 자기의 죽은 것을 알고 살아나기를 준비하는 것처럼 말도 안돼 보입니다.

그리고 전적 무능에 대한 자각과 의의 확신은 서로 정비례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곧 자신이 전적 무능자라는 확신이 강할수록, 의의 확신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이는 그의 믿음이 신빙성 없는 자기 의에 기반하지 않고, 실패 가능성 제로인 믿음의 의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자기 무능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심으로 의뢰하니,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사랑이 부어진 결과입니다(사 57:15, 롬 5:5).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을 볼 때, 대개 '저들의 확신 배후에는 남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겠지?'라는 추정들을 하는데, 이는 정반대의 유추입니다. 오히려 그들 안에 전혀 의지할 것이 없어 믿음의 의(義)만을 붙든 결과라 함이 옳습니다.

이 원리대로라면, 자기의 가능성을 볼수록 구원의 확신은 줄어든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이는 확률이 높을수록 확신도 커진다 는 통계학적 원리와는 배치되는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인간의 가능성에 따라 붙는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이렇게 자기에게서 '의의 가능성'과 '의의 불안정성'을 동시에 보는 사람들은, 자기 의를 유지하고 극대화하기위해 행위적 의에 집착하게 됩니다.-율법주의자들의 형태가 바로 이러합니다-그러다 보니 점점 그들은 바리새화(Pharisizer) 됩니다.

바울이 과거 유대교인이었을 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 3:5-6)"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율법에 몰두했던 것이나, 루터가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거의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의에 몰입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의의 확신'의 상관 관계를 이해하도록, 세 부류의 사람들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가는 어느 신학자의 글이 도움이 될 만합니다.

전방 3km의 목적지까지 완주를 계획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아주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믿고  '그 정도쯤이야'라고 자신만만해 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인간을 완전하다고 믿는 원죄 부정론자들로서, 자신의 노력으로 의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누가 잘못됐다면 그것은 자신의 부패성 때문이 아니라 주위의 오염된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교육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이 환경이며 사람에게 해줄 특별한 교육은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상의 교육 서비스는 그들을 간섭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가르쳐보겠다고 덤비는 순간 사람은 망쳐지기 시작한다고 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Return to nature)'의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 '맹모삼천지교'의 자연주의 교육론, 종교다원주의가 그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아주 건강한 편도 아니며, 그렇다고 전동 휠체어를 의존해야 할 만큼 중증 환자도 아닌, 무릎 관절통을 가진 사람입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고 절망적으로 보이지도 않은데, 정작 그 자신은 염려와 불안에 쌓여 있으며, 과연 자신이 통증을 감내하며 목적지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회의가 가득합니다. 이들은 인간이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완전히는 아니고 그들에게는 여전히 의를 이룰 능력이 있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계몽주의를 비롯해 로마천주교도, 칭의유보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선한 것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지만, 동시에 그 노력이 구원을 보장해 주리라는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이는 그들의 능력이 불안정하고 불연속적이기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칭의유보자들의 두려움은 바로 이러한 류의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전혀 거동이 불가능하여 자기 힘으로는 단 1m도 걸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염려의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는 자기 힘으로 가기를 단념하고 전동 휠체어의 힘을 빌리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는 이신칭의론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며, 의에 이르는 데는 자신의 능력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믿음만 의지합니다. 위의 내용들은 '인간의 무능'과 '의의 확신'과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 준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의의 확신'은 '의의 전가(imputatio)' 교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죄인 됨'과 '의인 됨'의 출처가 우리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전가됐다는 사실을 알 때 의의 확신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죄인 됨도 나와 상관없이 조상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아 됐고, 나의 칭의도 나와 상관없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된 것입니다. 루터의 '의의 확신'의 근거 역시, "죄의 시작도 '나 밖에서(extra nos)', 의의 시작도 '나 밖에서'(extra nos) 된 것"임을 아는 데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내게 온 의가 주입(infusio)된 것이 아닌, 전가된 것임을 알 때 의의 확신은 더욱 견고해집니다. 오늘 의가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의 확신이 결여된 이들을 보면, 그들의 믿음의 기반이 의의 전가(imputatio) 교리보다는 의의 주입(infusio) 교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가 내 안에 주입되지만, 그 의가 내 죄성으로부터 오염과 손상을 입거나, 혹은 그 주입된 의를 잘 관리하지 못한 나의 불성실로 인해 의가 이루어지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확신을 뒤흔듭니다.

로마천주교가 의의 확신을 부정할 뿐더러, 심지어 확신을 마귀적이라고까지 하는 것도 바로 이 의의 주입 교리 때문입니다. 마리아 무죄론도 의의 주입 교리와 연관돼 있습니다. 죄인 마리아의 몸에 무죄하신 그리스도가 잉태되면 필시 그리스도가 죄로 오염 될 것이기에, 마리아는 무죄한 성모가 돼야 했습니다.

반대로 의를 옷 입는 것으로 이해하는 전가 교리 신봉자들은, 죄인 안에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돼도 그의 죄성에 의해 의가 손상 없이 보존된다고 믿기에, 자신의 의가 완전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리스도가 죄인 마리아의 몸에 잉태됐으면서도, 죄에 오염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이끌어 내는 단초가 됐고, 마리아 무죄론을 반박하는 훌륭한 공격무기가 됐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