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강좌 윤영휘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19세기 개신교는 전 세계로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대 사회상과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 그리고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선교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엇이 있을까?

5월 30일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열린 2017 홍성강좌 11번째 시간에는 윤영휘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가 '그리스도교의 팽창: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을 주제로 이를 설명했다.

윤 박사는 "19세기를 '선교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정통주의와 이성중심, 세속화 현상 등 18-19세기 펼쳐진 새로운 세계관들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성격도 있었다"며 "이전의 선교와 18세기 말 이후 선교가 다른 점은 개신교도 본격적으로 '타문명권 선교'에 나섰다는 점이고, 그 시작에는 대각성 운동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이전 16세기부터 로마가톨릭에서 전 세계 선교를 시작한 것도 비슷한 이유였다. 그는 "가톨릭은 루터를 필두로 진행된 종교개혁에 대해,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응전한 것이 당대 가톨릭의 선교였다"며 "아우구스투스 수도회를 비롯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미니크 수도회, 그리고 잘 알려진 예수회가 적극 나섰다"고 했다.

개신교로서는 로마제국 시대 이후 처음 타문명권으로 나간 선교였기에, '현지 문화 수용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그 이전 가톨릭 선교에서 이미 불거졌던 문제이다. 선교사들이 현지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선교하자, 예수회 본부 등에서 "하나를 양보하면 끝이 없다"며 종교다원주의 등을 우려한 것.

그러나 현장 선교사들의 입장은 매우 달랐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와 일본, 중국에서 선교한 하비에르(1506-1552). 청빈을 강조하는 예수회 출신으로 일본 선교 당시 처음에는 백성들과 같은 옷차림을 했지만, 정작 백성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옷차림을 '영주'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윤 박사는 "이런 논쟁과 선교사들의 보고 등은 선교사를 파송하던 유럽인들에게 '비유럽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할 때는 문화적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사실 어느 정도의 문화상대주의 없는 선교는 모두 실패했다"며 "개신교는 후발 주자로서 가톨릭의 사례를 잘 모방했고, 나아가 20세기가 돼서야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서구 문화를 받아들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보편화됐다"고 전했다.

윤영휘 박사는 "사실 윌리엄 캐리 이전 개신교는 선교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프랑스 등 농업 위주 국가이던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 상업 위주 국가였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현지인과의 마찰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며 "실제로 영국 동인도 회사는 원주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선교를 금지시키기도 했다"고 밝혔다.

윤 박사는 "그리고 그 동안 선교 사역은 국가적 지원 아래 이뤄졌는데, 이에 따른 19세기 선교의 새로운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국가적 지원'이 없어지고 정부와 공식 관련성이 사라진 점"이라며 "일반 대중에게 호소해 세계 선교가 진행되면서, 교회사 최초로 일반 성도들이 타문명권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는 '선교 제국주의'라는 말 때문에 선교를 '서양에서 비서양으로'라고 너무 쉽게 정의내리지만, 이는 지나친 서구 중심적 사고"라며 "동양이 서양 기독교를 불러들인 경우도 있었고, 이집트의 콥트교, 중국의 경교 등 선교 이전 이미 동양에 정착한 기독교 종파도 꽤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윌리엄 캐리가 인도 선교에 나서기 전, 인도에는 이미 200만 이상의 초기 동방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후예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남인도(말랑카라) 지역에 복음을 전파했다는 전승은 유명하다. 인도에는 시리아 정교회의 영향을 받은 신도들이 지금도 440만 명 가량 존재한다.

중국도 당나라 때 경교(네스토리우스파) 전파 기록이 있고, 13세기 교황 니콜라오 4세의 친서가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1333년)가 바티칸에서 발견돼 지난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 수장 중 한 명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신부를 데리고 쳐들어와 포교를 했다. 17세기에는 조선 사실들이 청나라를 방문해 '서학(천주교)'을 받아들였다.

윤 박사는 "동아시아 지역 선교는 '근대, 서양에서 동양으로,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처럼 보이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이들도 하나의 주체였으며 하나님 나라에 있어 한 축을 담당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우리나라는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이미 성경이 번역되고 교회가 세워진, 전 세계 선교사(史)에 유례 없는 국가였다. 그는 "한국에서 기독교가 전례 없이 빠르게 성장한 이유로는 먼저 성경이 일찍이 번역되는 등 자생력을 갖췄고, 선교사들도 초기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어 네비우스 정책 등으로 빠른 시일 안에 독립과 자립을 이루는 토착교회를 세우고자 했으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진보적 한국인들에게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 어필한 점 등을 들 수 있다"고 했다.

윤영휘 박사는 "윌리엄 캐리의 선교 이후 선교의 패러다임이 전환됐다"며 "근방선교에서 원방선교로, 범유럽에서 타문명권으로, 공동체 사역과 자비량 선교, 사회적 복음 등 현지화된 선교방법 개발 등 선교가 복잡미묘해지고 상황에 따라 유연해졌다"고 정리했다.

앞선 23일에는 10강 '국가의 형성과 그리스도교: 이탈리아, 독일'이라는 제목으로 당대 유럽에서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지 못한 이탈리아와 독일이 기독교, 그리고 민족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으며 통일 국가를 이뤄냈는지를 탐색했다. 기독교는 세속화 시대에도 국가 통합에 있어 '상수'로 역할을 했지만, 이는 민심 통합의 중요한 재료나 '수사(修辭)'적 역할이었을 뿐 제도로서는 그리 큰 역할이 없었으므로, 기독교의 역할을 경시할 수도 없지만 너무 중시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요지다.

18-19세기를 다룬 2017 봄 홍성강좌 '서양 근대교회사: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는 휴일인 6일을 건너뛰고 오는 13일 마지막 강좌 '20세기를 향하여: 선교와 제국'이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