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홍성강좌 9번째 시간에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사회상이 변화한 19세기,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주제로 윤영휘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가 강의했다.

9강 '종교생활의 변화: 여성, 청소년, 노동자'에서 윤 박사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는 그간 소외계층이던 여성과 청소년, 그리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에게 각각 역할, 교육, 사회개혁이라는 '처방'을 주는 데 일조했다"고 밝혔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교리와 전통, 체계를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이 있고, 그것이 있었기에 2천 년 동안 교회가 유지됐다고 할 수 있다"며 "다 잘 한 것은 아니고 때로는 기득권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그것 못지 않은 장점은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7 홍성강좌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여성=사실 사회와는 달리 교회에서 여성은 초대교회 때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세기가 여성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역할이 증대됐기 때문'이다. 당시의 두 가지 여성 관련 이슈는 '설교권'과 '목사 안수' 문제였다.

윤영휘 박사는 "하지만 여성의 사역이라는 건 '정당화'해야 할 문제였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어색하다, 익숙하지 않다'는 심적 거부감도 상당했다"며 "그럼에도 여성 리더십 확산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였다"고 했다.

그 이유는 다음 네 가지가 있다. 첫째, 18-19세기에 이어진 부흥운동이었다. 짧은 기간에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필요성이 늘었고, 여성 설교자도 필요해졌다. 둘째, 당시 복음주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인 '평신도 사역'에서 여성은  중요했다. 셋째, 산업화·도시화로 선교 대상 계층이 분화되면서, 교육받은 백인 남성 성직자만으로는 모두를 아우를 수 없었다. 넷째, 전 세계로 선교지가 확대되면서 유교 문화권 등에서는 여성 대상 선교는 여성만 가능했다.

가장 적극적이던 종파는 퀘이커로 18세기 영국에는 이미 1500여 명의 여성 설교자가 있었고, 1860년대 감리회에도 90명의 '여성 전임 설교자'가 존재했다. 미국에선 1864년 유니테리언 교회에서 최초로 여성목사 안수가 진행되기도 했다. 구세군은 '여성 참여의 한 획을 그었던' 종파였다. 이들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설교권을 부여했고, 여성의 성찬집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자 남성 성직자들까지 성례를 포기할 정도였다. 여성 사역자들은 주로 기혼의 중산층이었다.

윤 박사는 "여성목사 안수는 최근에야 이뤄졌지만, 그 논의의 시작이 19세기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19세기 여성들은 이렇게 '의미 있는 도전'에 나섰고, 이는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 등과 교집합을 이루면서 여성을 '시혜 대상'에서 '노력하는 주체'로 바꾸는 데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아동·청소년='어린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산물이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노동자 계층은 자녀들을 돌볼 수 없었고, 자녀들은 부모의 일터에서 하루종일 지내거나 어린 시절부터 근로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교회는 중앙집권·비자발적 모임에서 개별적·자발적 참여형으로 변모하고 있었으므로, '아동·청소년'들을 위해 사역하면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내려 했다.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주일학교(Sunday School)이다. 악덕과 악행이 가득해 상류층의 두려움이 가득했던 시대, 평신도 박애주의자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 1736-1811)는 주중 일하는 아이들을 위해 주일 하루종일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예배 후 10분 모이는 게 아니라, 10-12시 예배와 교육 후 점심식사를 집에서 하고 온 뒤 1시부터 읽기와 쓰기 교육, 교리교육을 5시까지 진행했다.

1780년 글로스터에서 처음 시작돼 1784년 런던으로 이어진 주일학교는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780년대 말에는 24만 명, 1831년에는 무려 125만 명이 주일학교에 등록돼 있었으며, 이는 총 인구의 25%였다. 1870년 공교육이 시작되면서 점차 쇠퇴했지만,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까지도 전체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출석했다. 주축 교사들은 평신도였다.

윤영휘 박사는 "18-19세기의 부흥은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몇몇 걸출한 '히어로'들뿐 아니라, 이렇게 풀뿌리 차원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기에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라며 "당시 문맹이던 아이들은 주일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우면서 수준이 향상됐다"고 전했다.

또 "주일학교는 19-20세기 개신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대표하는 기관이었다"며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노동자들을 적대시하고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던 19세기 사회 속에서, 교회가 누구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노동자='빈곤'은 19세기에 새롭게 대두된 사회악이었다. 윤 박사는 "이전부터 사람들은 가난했지만, 19세기 빈곤이 새로운 점은 개인의 근면 여부와 관계없이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발생한 가난이었기에 사회 구조의 개혁이 필요한 지점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국교회 제도였던 영국은 각 교구별 교회가 지역 빈민들에게 기초 생활수단을 제공하는 구(舊) 구빈법을 17세기부터 시행 중이었다. 그러나 상류층은 게으른 이들에게 세금을 투입하는 데 불만이었고, 고용주들은 구빈법을 핑계로 임금을 낮췄다. 여기에 아담 스미스의 고전경제학과 멜서스의 인구론도 빈곤에 대한 결정론적 시각을 키우면서 정부 개입을 망설이게 했다.

이에 1834년 도움이 필요한 빈민들이 최소한의 의식주만 제공되는 워크하우스에 들어가도록 하는 신(新) 구빈법이 제정됐지만, 설치된 워크하우스가 지나치게 열악해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 워크하우스와 공장의 기계를 공격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국가 주도의 빈곤정책을 수용하면서, 보조자 역할로 입지를 재설정하고 국가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돌보기 시작했다. 여러 곳에서 자선협회를 세워 임산부와 미혼모에게 영양식과 출산용품을 제공하고, 감리교도였던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 같은 경우 방적공장을 인수해 복지후생과 합리적 교육, 무료 유치원 설립 같은 획기적 실험을 하기도 했다.

윤영휘 박사는 "당시에는 벌써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등 급진적으로 달려갔지만, 기독교 역시 사회적 복음과 내부 선교, 로버트 오언의 '뉴 하모니' 같은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통한 대안을 제시했다"며 "물론 복음주의의 이 같은 노력이 세속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돌려놓을 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노예무역과 싸웠던 것처럼 빈곤을 사회악으로 규정하면서 적극 응전했고 노동자들도 적극 호응했다"고 분석했다.

강의를 종합하면서 윤 박사는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핵심 교리를 포기하거나 그 체계를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가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써왔다"며 "19세기 그리스도교가 산업화와 도시화, 세속화로 인해 더 각별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해진 여성과 아동·청소년, 노동자 등의 신자층에게 적극 다가갔던 것처럼, 우리도 변화를 무작정 거부하기보다 핵심 교리가 아닐 경우 과감하게 변화를 수용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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