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윤
▲허정윤 박사(가운데). ⓒ크리스천투데이 DB

1945년, 우리나라는 해방됐지만 불행하게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 말았다. 당시 좌우의 사상대립은 외부의 핍박 만큼이나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불러온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과학적 무신론'으로 보고, 이것과 기독교 사상의 차이를 깊이 연구해 온 허정윤 박사(케리그마신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지난 11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월례세미나에서, 그 원인 중 하나를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초기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에게 미친 영향에서 찾았다.

허 박사는 "나라를 잃은 시국에서 기독교인들은 신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다"며 "패망한 조국에서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을 겪었다. 이 사건 수사에 의해 조직이 노출되자 신민회 간부들은 대부분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과 러시아 극동지역 등지로 망명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이들은 1917년 러시아에서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하자,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 즉 과학적 무신론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초기 한민족 독립운동을 하던 기독교인들 중에는 레닌이 볼셰비키를 이끌고 10월혁명에 성공하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 한민족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에서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선택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고 했다.

허 박사는 "그들은 결국 기독교를 버렸거나 사상적 방황을 겪어야 했다. 그런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가 한인사회당의 창당과 한민독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에 참여했던 신민회원들의 인생 역정(歷程)에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당시의 한민족에게는 민족독립이 최우선 과제였으며, 종교나 사상은 오직 독립운동의 추진 방법 가운데 하나로서 쓰거나 바꾸거나 또는 버릴 수 있는 선택사항일 뿐이었다"면서 "이러한 조류는 과학적 무신론 사상이 한민족에게 흘러 들어오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비록 해방은 맞았지만, 그로인해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으면서 온전한 독립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허 박사는 덧붙였다.

허 박사는 "돌이켜보면 신민회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염원은 온전히 한민족 통일국가로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염원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한민족 통일국가 수립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분열이라고 본다. 분열의 원인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이 해소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하고 온전한 통일국가를 이루어내야 할 책임은 초기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염원과 영원한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회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