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강좌 윤영휘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이대웅 기자
18세기 혁명의 시대가 지나면서 계몽주의가 힘을 잃고, 새로운 혁명인 '산업혁명'이 시작됐을 때, 신학과 교회는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18일 오후 7시 30분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열린 '2017 홍성강좌' 7강에서는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교회의 변화'라는 주제로 이에 대해 논의했다.

윤영휘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는 "무차별 살상과 종교 에 대한 공격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광기가 지나가면서, 사람들은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의 폐해를 절실히 느꼈고, 이성에 대한 회의가 팽배해졌다"며 "그래서 인간의 감정을 중시하는 낭만주의가 유행했고, 계시를 옹호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고 밝혔다.

계몽주의에 대한 '반격'은 신학적·철학적 측면에서 시작됐다. 순수이성으로 신을 알 수 있다는 사상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는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을 부르짖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이성 대신 감정(Feeling)을 통해 신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한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역사 전체를 중요시한 헤겔(Gero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이성을 뛰어넘은 '신앙'으로 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한 키에르케고어(Soren Aabve Kierkegaard, 1813-1855) 등이 대표적이다.

윤 박사는 이러한 합리주의·낭만주의·관념론·실존주의적 시도에 대해 "계시를 이성으로 파악해 비합리적으로 보던 이전 시대 합리주의의 도전을 지성(학문)의 언어로 반박하고 계시를 옹호·지지하면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지성계의 다양성과 활력을 보여줬고, 이들의 견해는 당대보다 20세기 실천신학(칸트), 역사신학(헤겔), 실존신학(키에르케고어)의 발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면서도 "이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이성적 신 존재 입증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그리스도교를 '반이성적'으로 보이게만들면서, 의도치 않게 '자유주의 신학'으로의 길을 열게 됐다"고 설명했다.

19세기의 두 번째 커다란 변화는 '산업사회의 등장'이다. 기술의 진보와 자본의 축적으로 인구보다 생산량이 빨리 증가하기 시작했고, 전반적 생활수준이 계속 향상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도시가 탄생하고 노동자 계급이 등장하면서, 당대 교회는 새로운 지역적·사회적 공간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했다.

영국 산업혁명의 의의에 대해 그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나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주장하므로 인간의 빈곤은 필연적이라는 맬서스의 '인구론'에서 탈출한 것"이라며 "석탄을 이용한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량이 늘면서 경제가 성장하고 근대사회를 가속화시켰다"고 언급했다.

윤영휘 박사는 "인구가 늘고 도시에 노동자 계층이 생기면서, 더 이상 국가의 재정 지원과 중앙집권적 조직의 힘만으로 교회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개인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해졌다"며 "국교회 제도를 채택한 영국의 경우에도 1851년 종교조사 결과 국교도는 51%까지 감소했고, 비국교도가 44%에 달하는 등 국가 지원을 받지 않는 비국교도가 이전 세기에 비해 크게 성장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경우 비국교도 교회의 특징은 구성원들의 자율성, 그리고 18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유산인 성서주의·십자가 중심주의·회심주의·실천주의 등 4가지를 적극 수용한 것이었다. 이에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구제 활동에 나섰고, 노예무역을 폐지한 윌버포스처럼 사회 개혁에 적극 나서게 됐다. 이러한 분위기는 국교도로까지 퍼지게 된다.

농촌에서 갈 곳을 잃은 가난한 사람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하면서 전통적 종교 공동체에서 단절됐고, 예배드리기 힘든 환경과 함께 교회 내 중산층들과의 위화감까지 생기면서 이들은 예배 참석률이 낮았다. 비국교도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 곳곳에 예배당(chapel)을 설치했지만, 국교회는 기민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병자 방문이나 자선 바자회, 심방 등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사역들이 생겨나면서 여성의 역할과 참여도 확대됐다. 1880년부터는 해외 선교에 있어서도 여성들의 역할이 늘어난다.

공교육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는 교육의 역할도 감당했다. 영국 주일학교 학생 수는 1801-1850년 크게 증가했고, 1881-1914년에는 전체 아동의 50% 이상이 출석했다. 1870년 교육법이 통과되면서 주일학교의 중요성은 감소됐지만, 보육과 교양교육, 레크리에이션 장소로 여전히 중시됐다.

이처럼 교회, 종교는 다시 계몽주의 이전, 특히 중세처럼 삶의 모든 영역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나, 한계점도 나타냈다. 그는 "당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고, 술을 마시면서도 찬송가를 부를 정도의 사회 분위기였지만, 이는 그만큼 종교적 행위의 본래 의미는 쇠퇴한 채 종교가 점점 껍데기만 남게 됐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며 "제1차 세계대전 후 교회와 주일학교 출석률이 급감한 것은 이 때부터 이어진 분위기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영휘 박사는 "산업사회에서는 이처럼 교회의 성격이 '자원 종교'로 변화됐고, 겉으로 보기에 이 19세기는 '복음주의적 도덕률'이 암묵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정도로 복음주의의 전성기였다"며 "이러한 신학과 교회의 변모를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는 이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선교에 나서면서 타 문명권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윤 박사는 "그러나 빈민 다수는 여전히 종교로부터 단절돼 있었고, 도시에서의 발빠른 대응과 달리 오히려 농촌 종교 공동체의 영향력은 쇠퇴했으며, 교회 내 여성의 비중이 늘었음에도 노동계급 여성들은 여전히 소외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가 2천 년간 역사적으로 계속 타락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세속화로 가다가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다시 세속화가 진행되다 이를 회개하고 다시 부흥운동을 하는 것이 반복돼 왔다. 교회에는 이처럼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며 "우리는 '교회는 왜 이렇게 타락했는가?'라고 한탄하면서 질문하기보다, '그렇게 교회가 타락했는데도, 어떻게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