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콘퍼런스 김병삼
▲김병삼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날짜: 2015년 4월 5일

본문: 고린도전서 15:20~58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부활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58절]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형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게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저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열 여덟살 소녀, 부활이 되다! - 세월호 희생자 양온유 자매 부모 양봉진, 백영란 집사
인터뷰의 첫 질문은 "어떻게 그렇게 딸을 잘 키우셨습니까?"였다. 극동방송 전파선교사 양봉진, 백영란 집사(안산 명성교회) 부부는 딸을 잘 키운 탓에 세월호 사고 때 딸을 천국으로 보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2반 반장이었던 고 양온유 자매는 세월호 갑판까지 나왔다가 친구들의 비명소리를 듣고 친구들을 구하러 객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온유의 부모님은 구조된 친구들로부터 온유가 객실로 다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태명이 부활이었던 아이, 열여덟 부활절에 부활이 되다

"온유 태명이 '부활'이었어요. 4월 16일에 세월호 사고가 있었고 3일 뒤 온유가 서른 한 번째 희생자로 발견되었는데 그 날이 4월 19일 부활절이었어요. 온유 태몽도 바다였고요. 돌아보건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다고 생각해요." 온유 아버지 양봉진 집사가 말을 이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진도에 내려가면서 저희 아이 이름이 생존자 명단에 없을 거라는 걸 직감했어요. 친구들을 두고 혼자 나올 아이가 아니었어요. 온유는 항상 그랬으니까요."
온유는 밝고 총명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교내에서 아이큐가 제일 높았다. 4학년 때 컴퓨터와 관련된 자격증을 독학으로 땄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잠깐 다녔던 피아노 학원은 집안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었지만 독학하다시피 하여 음악 심리상담사를 꿈꿀 정도의 피아노 실력을 갖췄다. 하나님께서는 온유에게 충만한 지혜를 부어주셨다.
교만할 법도 한데 아이는 겸손과 사랑이 넘쳤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년 대표를 했고 2학년 때는 반장이 된 후 학년 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친한 친구가 나간다는 소식에 출마를 양보했다. 토요일에는 고등부 예배, 찬양팀 연습 등으로 교회에서 예배를 준비했고 주일에는 모두가 기피하는 주일 1부 예배의 반주를 맡았다. 4남매의 맏이로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짜증 한 번 내지 않았다. 온유의 친구들은 온유를 비타민과 같다고 말했다.

온유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

온유가 희생자로 발견되고 양 집사 부부는 장례 절차를 준비했다. "단원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장례식장도 깨끗하고 3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어요. 우리가 빨리 장례를 치르고 비워줘야 다른 아이들의 장례도 치를 수 있으니까 이틀 동안만 장례를 치렀고요. 따로 부고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동안 천오백 명이 빈소를 찾아주셨습니다." 천오백 명 중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도 있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온유의 장례가 있고 난 후 양봉진 집사가 관리집사로 섬기는 안산 명성교회를 찾아 담임 목사님과 면담 후 기도를 받았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양 집사 부부의 평안하고 담대한 모습에 놀라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교회를 찾았다. 온유는 천국으로 떠나는 길에도 그렇게 복음을 전했다.

팽목항에서의 5일

사고 소식을 듣고 엄마는 팽목항에 내려갔다. 구조 작업은 더뎠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기도밖에 없었다. "뜨겁게 기도할 처소를 찾아 진도체육관을 몇 바퀴 돌았는데 기도할 만한 처소가 없었어요. 저뿐 아니라 현장에서 아이를 기다리던 믿지 않는 부모들에게도 뜨겁게 기도해 줄 기도의 삼겹줄이 간절했었거든요. 이런 위기의 순간에 한국 기독교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슬픔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위로를 전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습니다."
온유의 부모는 앞으로 이런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슬픔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중보하겠노라 말했다. 인터뷰 내내 부모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담대하고 따뜻했다. 그들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었다.
(극동방송, 2014.07/10 '전파선교사 인터뷰' 전문)

아직은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분이 성경을 읽다가 그런 의문이 생겼답니다. 죽어서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냥 "일어나라!" "나오너라!"라고 명령만 하시면 되는데 왜 굳이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셨을까?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곳이 무덤이었고, 다른 시체들도 많았을 텐데 만일 이름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다른 시체들도 다 살아날까 봐 그랬다는 결론을 내렸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은 신비입니다.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 신비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육체의 신비가 아니라 영적인 신비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으나 그는 또 죽었습니다. 진정한 신비는 육체의 질병에서 나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비 가운데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부활의 사실에 대하여 선포했다면, 오늘의 본문에서는 비유를 통해 부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전반부에서 믿음의 영역에서 부활을 선포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이성적인 영역에서 부활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믿음에서 시작되며, 믿음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밝은 지혜를 가져다줍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많은 것이 이해될 뿐 아니라 신비한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 35절을 보세요. 사람들이 가지는 의문이 거기에 있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되묻습니다. 36~38절의 말씀입니다.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어리석은 자여! 부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절묘한 비유이지요. 뿌리는 씨가 땅에서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는 진리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씨를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씨앗이요, 알맹이입니다. 하지만 장래의 형체를 믿기 때문에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이라는 것은 신비할 뿐 아니라 '소망'과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신비의 영역'을 다루고 '소망의 영역'을 다루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씨를 뿌리고, 죽고, 새로운 형체를 가지는 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상식과 판단과 기준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잠깐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먼저 생명의 신비를 생각해 보세요. 생명 자체를 여러분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진화론자들이 어떤 이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생명의 근원' 문제는 풀 수 없습니다.
요즘 생명공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조직을 배양하고 복사한다 해도 역시 생명체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생명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이제 과학이 발달해서 화성에 무엇이 있는지, 다른 천체에 관심을 가지지만, 우리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며, 그곳에 그 어떤 누구도 인간의 생명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은 한없이 발달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 미래에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일도 근본적인 생명체를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신비의 영역입니다.
누군가 창조하고 조정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생명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영역은 믿음의 눈을 들어 보지 않으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윤회 사상이 그럴듯합니까? 윤회 사상에 의하면 우리가 선하게 살아야 하는 동기를 유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생명의 근원을 설명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설명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생명의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성장의 신비' '죽음의 신비' '소생의 신비'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식물의 영역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 우리는 당시 알맹이를 뿌립니다. 그것의 형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씨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성장하는 것을 봅니다.
농사를 지어 보신 분들은 아시지요? 저는 단지 책으로 읽었을 뿐입니다. 옛날에는 마늘을 수확하려면 마늘 한 쪽을 심고 거기에서 여섯 쪽의 마늘을 얻었습니다. 또한, 시골에 가면 늘 '종자'가 있지요.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옥수수도 쌀도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 종자가 썩어져야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3천 년 전 미라의 손에서 발견된 밀을 적당한 온도에서 배양해서 심었더니 다시 싹이 나왔다는 기사를 말입니다.
얼마나 신비로운 일입니까? 3천 년 동안 생명이 없던 물체에서 생명이 살아나고 성장하는 신비 말입니다.
그런데 더욱 신비로운 것은 요즘 '조직 배양'이라는 기술이 발달한 것이지요. 옛날에는 감자를 심으려면 씨눈을 심어야 했고, 마늘을 심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냥 잘게 잘라서 심어도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의 영역에서도 참 신비로운 성장의 사실들을 발견합니다.
제가 수년 전에 사할린에 영성 인도를 하러 가서 연어를 잡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연어가 많은지 포클레인으로 잡아 올리는 장면도 보았고요. 우리 선교팀들은 바다에서 내륙으로 올라오는 팔 길이만한 연어를 그냥 때려서 잡았습니다.
연어는 고기로도 먹지만 알을 많이 먹지요. 연어 알은 눈알보다 작은 크기지만 꽤 큽니다. 그런데 캐비아라는 상어 알을 보셨지요. 연어 알보다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를 작습니다. 그런데 그 알이 연어보다 수십 배 수백 배 큰 상어로 자란다는 신비를 생각해 보셨나요?

이 세상의 생명에는 성장의 신비가 있고, 죽는 신비가 있고 생명이 이어지는 신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부활도 이러한 신비다!"
본문 39~44절의 말씀을 보세요.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식물의 세계에서도 부활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도 썩어질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엄청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는다'는 것을 '심는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씨를 심고는 발로 밟고 썩어져야 싹이 나는 것처럼, 부활이란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부활은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육의 몸이 있듯이 영의 몸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활의 신비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부활의 신비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신비는 소망이다!
자, 이제 우리는 '생명의 신비'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우리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런던 대 공습 기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폭탄 맞은 건물에서 달려 나왔습니다. 마당 앞에는 며칠 전 투하된 포탄 때문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 있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은신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지는 그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손을 들고 딸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주위의 폭발에 겁을 먹은 데다 어두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소녀는 "아빠, 아빠가 안 보여!" 하고 부르짖습니다.
하늘은 백색 예광탄 불빛으로 환했고 불타는 건물 때문에 사방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고개를 든 아버지는 구덩이 바로 앞에 선 딸의 윤곽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지만 아빠는 네가 보여. 그러니까 뛰어!"
꼬마 소녀는 펄쩍 뛰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을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가 우리를 이끄시는 곳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좋은 곳임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원하신 팔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2008년 10월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설교대회를 할 때, 한 학생이 [Houton]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너무 인상적이라 저도 그 영화를 다시 보았고,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어느 정글이 있었습니다.
'룰루랄라'라고 불리는 그 정글에는 많은 동물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귀가 예민한 코끼리 호튼이 지나가는 작은 티끌 속에서 나주 작은 비명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티끌 속에 아주 작은 존재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생각에 그 티끌을 잡습니다. 그 순간 그 정글을 주름잡고 있는 캥거루를 만나 이 작은 존재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튼이 허튼소리를 해서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요.
캥거루가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작은 존재는 없어!"
호튼이 말합니다.
"아니 우리가 큰지도 몰라, 어쩌면 지금 누군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지 몰라!"
"아니 우리 룰루랄라 정글에는 절대 그런 일은 없어!"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고,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호튼의 말은 무시를 당합니다.

이제 호튼은 이 티끌 속에 있는 작은 세계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위험을 알지 못합니다. 이제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시장과 호튼만이 어떻게 하면 이 작은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그리고 호튼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 작은 세상을 구하려 노력합니다.
"모든 생명은 귀중해!"라고 외치면서.
이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아니 그 티끌을 없애려고 하는 캥거루의 방해 속에서 호튼은 목숨을 걸고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세상의 시장이 그렇게 이야기해도 믿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는 최선을 다해 도와 달라고 외치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 큰 존재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We are here, we are here, we are here."
결국, 그 외침은 외부 세계에 전달되고, 영화는 happy ending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아름답게 끝을 맺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지나야 했습니다. 무서운 포식자 블래드(독수리)가 호튼을 죽이고, 그 티끌을 없애려고 하지요. 룰루랄라 정글에 많은 동물이 다 호튼의 적이 되어 압박합니다. 캥거루는 호튼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티끌 속에 작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말만 하면 돼! 그러면 너를 살려 줄 거야."
하지만 호튼은 자신이 아는 진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부인하는 순간 이 티끌 속에 수많은 생명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호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 생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그런 사도 바울의 마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자신들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믿을 수 없어서 부활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신들이 믿지 못해도 부활은 존재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 부활의 사건이 사실로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단의 세력이 우리를 해하려고 해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호튼이 목숨을 걸고 그 세상을 구원하려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이 '부활의 신비'는 '소망'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말씀과 5장 1절의 말씀을 보세요.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사도 바울이 왜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활의 신앙'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부활의 신앙이 없기에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신앙을 포기하려는 사람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육신의 쾌락을 버리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에 빠져 죄를 짓는 사람들을 향하여 참 소망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활의 신앙이 있어서 절대로 하나님께서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어둠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세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생명의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세력입니다. 죽음의 세력은 아름다운 생명을 아름답게 누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공격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죽음의 세력이 "나는 죽음이요!"라고 딱지를 붙이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장하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짝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짝퉁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물건이 귀한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럭키 치약이나 다이알 비누 짝퉁을 보셨습니까?
혹시 삼양라면 짝퉁을 보셨나요?
중국에 가면 구할 수 있는 짝퉁들은 죄다 명품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놀라운 일은 짝퉁에도 가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시장에서 파는 짝퉁은 수십만 원대를 호가합니다. 왜냐하면, 진품과 너무나 흡사해서 구분이 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왜 루이뷔통과 몽블랑이 가장 많은 짝퉁이 있는지 아십니까? 이 상품은 절대 세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폐기처분을 할지언정 싸게 팔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타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마케팅의 귀재라 불리는 KTF의 조서환 씨가 쓴 [모티베이터]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건의 가치를 지키려면 절대로 값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값을 내리는 순간 그 물건을 먼저 산 사람들이 실망을 하게 되고, 그다음부터는 그 물건의 가치가 상실된다는 것이지요. 가장 귀한 것일수록 그것을 모방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라는 사실입니다.
"박카스가 히트를 치자 똑같은 병 모양, 똑같은 글씨의 유사한 제품들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다. 비타 500이 히트를 치자 비타 100, 비타 1500 등 역시 유사제품들이 수없이 출시됐다. 또 물먹는 하마가 인기를 얻자 물먹는 젖소, 물먹는 암소, 물먹는 코뿔소 등 제습제 시장이 완전 동물농장이 됐다. 이런 주변 제품은 얼마나 팔릴까, 팔리기는커녕 결국 박카스, 비타 300, 물먹는 하마를 소비자 마음속에 공고히 박히게 하는 역할만 한다. 다시 말하면 일등 브랜드를 더욱 일등으로 만들고 죽음을 맞는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부활의 신앙을 모방하고 비방하려고 해도 분명한 것은 부활의 소망이 더욱 확고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죽음 앞에서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소망은 죽음 앞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도 가짜가 있습니다. 욕망과 쾌락을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람을 깨고 상처를 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도 가짜가 있습니다. 믿음을 가장하고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변질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과응보'가 일종의 거래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늘 경험의 논리로 믿음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헌신했으면 꼭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믿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소망이 투기판이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이 참 소망이라고, 우리의 예측대로 되는 것이 소망이라고 사단은 속삭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측이 빛 나가면 소망이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 소망이란, 참 생명이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아름다운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끝이라고 죽음이라고 하는 곳에서 주님이 부활하셔서 생명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2008년 사모 BTD에 유명한 복음성가 가수인 송정미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정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눈물로 기도하며 찬양하고 말씀을 전하며 자신의 간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부족한 나를 하나님이 쓰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잠잠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입니다."
유명한 찬양인 "나의 영혼아 잠잠히."를 20년 동안 부르면서도 늘 새로운 것은 늘 하나님 앞에 잠잠히 서기를 선포할 때에 힘주시는 은혜가 늘 다르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생명, 나의 구원이시니."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 앞에서 잠잠히 서십시오.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소망이 그분에게서 나옴을 선포하십시오.
여러분이 소망을 잃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그분이 바로 나의 구원자가 되심을 선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