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한국교회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허탄한 생각에 사로잡혔는가 엿보게 된다.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결과인가 싶기도 하고, 소위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이 대부분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자들이기에, 한국교회 전체로 통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허탄한 자들의 이면에 신실한 사역자들이 얼마나 분투하고 있는지 들으면 참으로 ‘숨겨둔 주의 종들이 있구나’ 생각하며 용기와 위로를 얻는다.

요즘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그랜져”가 기본이라고 한다.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이 정도는 타야 그래도 목사의 체면이 서고 모임에 가서도 주차장에 차를 갔다 댈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곳에 차를 두고 걸어서 모임에 온다는 것. 이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에쿠스”로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한다.

목사들의 주요 대화의 주제가 ‘교인이 몇명 모이느냐?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느냐?’와 같은 시시콜콜 내용으로 일관된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가 은퇴하고 나면 ‘집을 사달라’, ‘에쿠스를 사달라’ 하면서 교회와 갈등을 빚고, 목사의 체면이 무너지며 그간의 수고와 섬김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소리도 듣는다. 결국 거룩한 척 하면서 모두 돈을 위한 것이었고, 자신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한다. 우상은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다. 우상이 그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라’ 외쳤던 그 외침은 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직 탐심의 노예로 허탄한 일에 메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교회 목사들은 일반적으로 재정적인 여유만 있으면 건물을 짓는데 온 힘을 기울인다. 수백 억씩 들여서 무리한 공사를 진행하고, 은행 이자만 수천 만원씩 갚는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일인가? 성도들은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때로는 땀과 수고로 얻은 것을 가지고 헌금을 한다. 그런데 정작 목사나 당회는 아주 쉽게 이를 결정하고 헌금을 사용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이는 건물의 크기로 목사의 크기를 재려고 하는 허탄한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본다. 세속적인 기준에 맞추어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신앙, 신앙’ 하지만 실제로는 물질주의의 노예로 전락하여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경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한 유명한 교회는 시유지까지 점령하면서 메머드 교회를 지어서 세를 과시한다. 보수주의자들은 한국에 그러한 교회가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명품(?)교회 하나쯤은 세워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명품이 아니고 참으로 세속주의의 허망한 생각에 빠져있음을 즉시 느낀다. 

부산에 방주모양을 한 교회가 있다. 특이하게 지어진 교회이다. 멀쩡한(?) 교회를 헐고 새롭게 지었다는데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은행에 갖다 바치는 월 이자가 몇 천 만원씩이라고 하는데 큰 문제가 있어 보였다. 교회 헌금을 은행에 갖다 바치는 것이다. 얼마나 허탄한 일인가? 지금이 그러한 때인가? 엘리사의 질문을 하고 싶다.

본질은 어디에 갔는가?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고 헌신하겠다던 마음은 어디 가고 세속주의의 물결 속에 깊숙이 들어와서 헤메고 있는가? 한국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목사들의 이야기이다. 목사들이 세속화된 것을 교회가 그리됐다고 의인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이 타락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목사의 타락이 즉시 성도의 타락으로 이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라고 성경은 말한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사회 경험이 없을 것이다. 사회 경험을 했다고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직장 생활이나, 회사에서 경영을 하다가 실패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가지고 사회 경험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땀 흘리는 노동현장에서 눈물의 빵을 먹어본 것이 아니라면 사회의 속성을 깊이 이해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가진 자의 위치에서 행세하고 권위주의에 메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 되었다. 이는 교회재정을 주인 없는 공돈처럼 사용하는 경제관, 서민들의 경제 생활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교회의 절반은 구세대가 아직도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대가 이렇게 행하고 있으니 그 다음 세대 역시 배울 수 밖에 없다.

목사의 경제관은 어디까지나 중간 정도의 위치에 서야 한다고 본다. 기름 번지르하게 바르고 향수뿌리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필요하지만, 품위는 외모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보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목사들이 좀더 근검 절약하는 모습도 좋을 것이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거룩한 일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 기뻐하실 일에 재정을 투자하고 소비하여야 한다. 대부분 자기들의 천국을 만들기 위하여 소비하는 현재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무어라 하실까? 개념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오늘의 시대에 다시 한 번 새길 말이다.

현장의 소리, 세르게이(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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