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휘
▲14일 윤 박사가 강의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종교개혁 500주년 역사특강 '홍성강좌 2017' 봄학기 강좌 '서양 근대교회사: 혁명의 시대와 그리스도교(18-19세기)' 두 번째 강연이 14일 오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진행됐다.

윤영휘 박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이날 '도전: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라는 주제로 지난 주에 이어 강연했다. 그는 강연을 통해 '①무신론자들과 회의자들은 늘상 있었는데, 왜 18세기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대한 회의가 특히 위협적이었는가? ②그 회의에 긍정적 요소는 없었는가? ③현대 교회가 가진 이슈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는 3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갔다.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대한 회의'는 종교개혁 이후 16-17세기 내내 일어났던 '종교전쟁'에서 기인한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 각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종교전쟁과 대대적인 전염병 등은 종교 자체에 대한 관심을 저하시켰고, 이렇듯 기성 종교가 채워주지 못한 정서적 빈 공간을 건드린 것이 과학혁명을 기초로 한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Enlightenment)에 대해선 "17-18세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휩쓴 정치·사회·철학·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갖고 있다"며 "계몽'주의'라는 용어가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Enlightenment'는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이 아니라 여러 공동의 가치를 공유한 다양성 있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했다.

윤 박사는 "계몽주의를 너무 기독교의 '안티 테제' 즉 둘 사이를 적대적 관계로만 보기 쉬운데, 양자 간 관계는 의외로 생각보다 복잡했다"며 "기독교가 화석화된 정통주의로 변하자 계몽주의가 나타났다고 곧잘 도식화하지만, 계몽주의의 주 원인은 정통주의가 아니라 자연과학과 철학의 발달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계몽주의가 반대했던 것은 종교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그로 인해 나타난 교조주의였고, 당시 계몽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신(神) 관념을 유지하고 구원 신앙을 보존했다"며 "계몽주의가 비합리적인 권위는 모두 무시하면서 성경을 최고 권위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트에 직접적인 위험을 가져다 주는 등 잠재적 위험성이 있었다. 물론 계몽주의는 전통적 가톨릭교회 질서에서 오는 권위도 무시했다"고 했다.

이 시기의 과학혁명은 첫 번째 '계몽주의의 사상적 배경'이었다. 그는 "당시에는 신학과 과학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고, 신을 찾고 신이 만든 자연의 원리를 찾는 과정에서 과학이 발전했다"며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성직자 코페르니쿠스가 중요한 것은, 그의 결론이 철학적 사고에서 나온 게 아니라 수학적 계산에 의해서 나왔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발견으로 자연현상은 '증명의 대상'이 됐고, '그리스도교 세계관이 틀린 것 아닌가' 하는 회의도 여기서 시작됐다. 갈릴레이는 여기서 더 나아가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탐구하고, 망원경으로 직접 관찰했다.

윤영휘 박사는 "뉴턴이 중요한 것도 중력의 법칙과 미분의 원리를 발견한 것 자체보다는 '과학적 연구방법'을 처음으로 확립했기 때문"이라며 "제반 사실들을 통해 기본 원리를 추측하고, 예상되는 결과가 '실제로' 일어나는지 유사한 증거들을 경험적으로 제시하여,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뉴턴은 신학자를 자처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성중심주의'의 길을 열게 됐다"고 밝혔다. 3단 논법으로 잘 알려진 이전 데카르트의 '연역법'은 '대전제'를 찾기 어렵고 이를 직관에 의존해야 하는 단점이 있었다.

사상적 배경으로는 먼저 '합리주의'가 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강조한 데카르트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상징되는 '의심하고 있는 주체'와, 불완전한 우리에게 '완전한 존재'라는 개념을 넣어준 '신의 존재' 두 가지에 대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했다"며 "그러나 데카르트의 '신의 존재' 증명은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있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을 이유로 신의 존재를 도출해 냈는데, 기독교는 반대로 신이 이성을 갖고 계시한 후에야 인간이 알게 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라며 "데카르트의 모든 것에 대한 의심, '보편적 의심'은 인간이 의심하지 않던 것들, 의식의 전제로 삼던 것들까지 의심하게 만들면서 '이성중심주의'를 촉진시켰다"고도 했다.

둘째로 로크의 '경험론'이 있다. 그는 "데카르트는 선악 구분과 신을 향한 마음 등 인간이 원래 갖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고 인정했지만, 로크는 마치 컴퓨터의 '기본 사양'과 같은 이 '본유 관념(innate ideas)' 자체를 부정했다"며 "로크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이에 '계시'의 경우 우리에게 상당한 지식을 주는 것으로써 중요하지만, 확실하진 않은 '개연성 차원'의 지식으로 봤다. 그래서 종교적 관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윤 박사는 "인간은 하나님과 너무 많은 질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우리의 수준에 따라 설명해 주시지만, 이는 우리가 알고 믿기에 충분하다"며 "그러나 이 시대부터 인간은 이성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나온 것이 계시를 이성에 비춰 합리적인지 판단하는, 종교와 이성의 타협적 형태로서 18세기의 주된 사조인 '이신론(Deism)'이었다. 세계를 창조한 하나의 신을 인정하지만, 그 신의 인간사에 대한 개입은 부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신론자들은 그래서 성경 중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눴다"며 "신 자신조차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으로, 이신론은 이 시기 주된 사조였지만 너무 난해해 민중의 마음을 건드리지 못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했고, 18세기 말로 가면서 무신론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했다.

계몽사상이 기독교에 끼친 영향으로는 합리주의자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신학과 철학이 분리되고, 설교에서 이성적·합리적 예들이 많아졌으며, 초자연적 성경 이야기나 신 증명 같은 교리적 논쟁을 포기하는 대신 합리주의자들도 인정하는 도덕적 이야기들로 성경을 변화시켰다는 것 등이 있다.

나라별로 칼빈주의의 제네바에선 신앙이 메마르고 도그마에 갇힌 교조주의를 반대하다 어려운 교리들이 설교에서 빠지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대한 도덕적 스승'처럼 가르치게 된다. 이에 대해 그는 "교리는 어렵지만 중요하다. 교리는 '지도'와 같다"며 "먼 여행을 위해선 지도가 유용하듯, 칭의에서 영화에 이르는 평생에 걸친 신앙의 먼 여정에서도 교리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독일에선 하나님의 영역인 계시(성경)를 시공간 속에 제한시키기 시작하는 역사신학이 태동해 발전한다. 영국에선 종교적 광기와 분리주의 재생을 막기 위해, '도덕적 그리스도교'를 통한 계시와 이성의 화해를 추구한다.

'그리스도교 계몽주의(Christian Enlightenment)'도 있었다. 이들은 과학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고, 맹목적 신앙을 경계하면서 종교 안에서의 합리성을 옹호했다. 그는 "이들이 이신론자들과 달랐던 점은, 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이성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성과 동맹을 맺고 이성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라며 "이들은 스스로 계몽주의와 달리 맹신(신앙 만능)과 무신(이성 만능) 사이, '현명하고 계몽된 경건'이라는 중도의 길을 개척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으로 가면서 '그리스도교 계몽주의'는 퇴조한다. '그리스도교가 이성과도 잘 맞아서 사실이 되는 것이라면, 이성 혼자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퍼진 것이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와 기독교' 둘 중 하나의 길뿐임을 깨닫고, 18세기 말로 갈수록 감정에 호소하게 된다.

윤 박사는 "이들이 이성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감성을 건드리지 않으면 사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정의가 모두 필요했던 것이다. 또 스스로가 '이성'만으로 살아가지 않음을 깨닫고 낭만주의로 나아가게 됐다"며 "그리스도교 계몽주의는 기독교를 통해서도 사회 개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낳아 윌버포스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탄생시키면서 복음주의 4대 요소 중 하나인 '실천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반드시 보수적이고 퇴행적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윤영휘 박사는 앞서 했던 질문들에 답하면서 강의를 마무리했다. 먼저 '왜 18세기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에 대한 회의가 특히 위협적이었는가?'에 대해선 "지동설이 맞다 해서 기독교가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성주의자·계몽주의자·합리주의자들의 도전은 그리스도교 상을 '비합리적·비이성적'으로 왜곡시켰다"며 "실제로 흔들린 것은 비과학적·비합리적 주장을 시대착오적으로 기독교 세계관과 연결시킨 '중세적 그리스도교'였지만, 당시의 기독교는 곧 '중세적 그리스도교'였기 때문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둘째로 '위협적이기만 했는가, 그 회의에 긍정적 요소는 없었는가?'에 관해선 "성경은 애초에 이성과 계시의 분리를 말하지 않았고, 오히려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는 신앙과 철학을 분리시키려는 이원론적 시도들과 싸워왔다"며 "이 유산을 잃은 채 오랜 기간 양자를 상충되는 것으로 봤으나, 합리주의자들의 공격을 받다 보니 그 유산을 다시 회복하고 양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가 시작됐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현대 교회가 가진 이슈와의 연결'과 관련해선 '세속화'와 연관지었다. 그는 "세속화는 19세기부터 시작됐지만, 18세기의 과학혁명과 계몽주의는 세속화 현상의 기원이 됐다"며 "18세기 사람들은 아직도 대부분 교회 내에 있었기에 감지하지 못했지만, 그때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도전들은 세속화의 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세속화의 표지로 가장 눈에 띄지만 가장 늦게 나타나는 '신도 수 감소'와 적당히 눈에 띄고 적당히 늦게 나타나는 '사회적 영향력 감소',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지적 영향력 감소' 세 가지를 꼽았다. 그는 "지적 영향력 감소는 가장 핵심적인 도전이나 오랜 시간 서서히 일어나 감지하기가 어렵다"며 "이 시대에 성경과 과학 지식이 충돌하고, 기독교 신앙이 삶의 전 분야에 적용되는 진리라는 전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성윤리나 직업윤리, 생명윤리 등의 기독교 세계관과 종교 행위가 분리돼, 제도만 남고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는 '사회적 영향력 감소'는 '지적 영향력 감소'의 결과이자 그 이후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이 진행되고 나서야 일어나는 것이 '신도 수 감소'이다. 그는 "수가 줄기 시작하면 이미 늦은 것"이라며 "영국의 예를 보면, 1914년까지 교회학교 출석률이 50%에 육박했으나, 1차 세계대전 이후 갑자기 확 떨어지게 된다"고 했다.

윤영휘 박사는 "우리가 겪고 있는 비슷한 현상들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며 "당시 교회들은 이러한 도전들에 맞서 어떻게 응전하고 활동했는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다"고 예고했다. 오는 21일에는 '부흥: 대각성 운동과 대서양 복음주의 네트워크의 형성' 강의가 이어진다.

강연은 오는 5월 30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30분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되며, 수강료는 12만 원이다. 추후 수강생들에게는 강의 내용을 책으로 출간해 한 부씩 증정한다.

윤영휘 박사는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Ph.D.)를 취득하고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전임강사, 서울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광주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HK연구교수를 거쳤다. '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에서 신진 교회사 학자에게 수여하는 우수 논문상인 Sydeny Mead Prize를 수상했다.

문의: 02-333-5161(내선 600), eun@hsbook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