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지금 산상보훈 중에 팔복을 죽 생각하고 있는데, 오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마음이란?

본문 8절을 다 같이 읽지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반복했기 때문에 이것을 좀 읽을 수 있을 텐데요, 누가 한번 읽어 보실까요? 감탄문으로 읽을 수 있을까요? (...) 네, '복이 있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여, 왜냐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복이 있도다!' 하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왜 복이 있는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복된 자'는 어떤 사람인가? 먼저 '마음이 청결하다' 것은 말이 무슨 말인가? 무슨 도를 닦듯이 갈고 닦는 사람이 마음이 청결한 자인가? '마음'이 무엇이고 '청결'이 무엇을 뜻하는가? 먼저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이 무엇일까요? 머리일까? 가슴일까? 잠언 4:23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합니다. '마음을 지키라' 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이 있으나 '먼저 마음을 지키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죠? '근원'은 '시작하는 곳'이잖아요?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우리 생명이 시작되는 곳인데, 그러면 가슴일까요? 머리일까요? 어느 한곳을 딱 지칭할 수는 없죠? 성경에 보면 마음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요지는 '전 인격'을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지, 정, 의를 다 포함한 전인격이 마음입니다. 우리 국어사전에도 보면, '지(智)·정(情)·의(意)의 움직임' 또는 '그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정신 상태 전부' 이것을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전적으로 보아도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죠? 마음은 사람의 '전인격'입니다. 사람을 표시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네 마음은 어떠냐?' 하면 그 사람의 생각이 될 수 있고 심정도 될 수도 있고 의지도 될 수 있죠? 그 사람을 표시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청결이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마음이 청결한 복된 자,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합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청결"이란 '맑고 깨끗한 것'을 뜻하는데, 청소가 되어서 깨끗한 상태를 청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면 늘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슨 수양을 하든지 도를 닦든지 하여 마음이 깨끗한 자를 청결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인들, 혹은 절에 승려들이 마음을 수련하고 갈고 닦으니까 청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그런 정도로 말씀하실 까닭이 없죠?

예수님께서 이 팔복을 말씀하신 대상은 다 누구라고 했죠? '성도'라고 했지요?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성도를 보고 '복된 자여' 하신 말씀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개인주의가 아니죠? 개인이 무슨 도를 닦아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개인이 아무리 훌륭하게 도를 닦아서 마음이 청결할지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죠?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가 하나님을 볼 수 있지요? 이 성도가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분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는 말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결"은 이미 구약에서 많이 쓰던 것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쓰신 것입니다. 구약 성도들이 성소에 들어갈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므로 항상 결례를 행하였죠? 청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우리가 레위기 11장부터 죽 배울 때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을 생각했지 않습니까? '정결', '청결'은 다 똑같은 말인데, 구약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 앞에 설 때 정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결의식'을 행했습니다. 가령 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은 부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죠? 그런데 병이 다 나았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그 병을 다 고쳐주셨을 경우에 그가 '정결해졌다'고 선포하고 희생 제사를 드려서 정결 예식을 행합니다. 그같이 시체를 가까이 한 경우에도 부정 탔다고 손을 씻고 옷도 빨고 또 그릇에 접촉을 했으면 그릇까지 씻고 하는 결례를 행합니다. 또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정결하도록 음식규례도 주셨습니다. 이것은 다 개개인들이 청결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연합한 이스라엘 교회를 염두하고 가르치신 거죠? 자기 개인이 깨끗하여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간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죠? 거룩한 교회에 연합했기에, 신령한 사회 공동체여야 하기에 한사람도 부정하지 않도록 정결규례를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도 구약 성도에게 '정결'을 가르치신 그 터 위에서 예수님께서 "청결"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청결"은 타종교에서나 불신자에게서 나타나는 청결이 아니지요? 팔복은 전부 이미 복 받은, 교회로 구원받은 성도에게만 나타나는 현실, 혹은 반응이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마음의 청결'도 성도에게만 나타나는 청결입니다. 성도에게 '이렇다, 마음이 청결하다!' 하신 것입니다. 개인이 이렇다기보다는 교회에 연합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니 지체인, 분자인 너도 그렇다, 청결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청결할 수 있나?

그러니까 성도인 우리에게 '너는 마음이 청결한 복된 자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하신 선언입니다. 선언하신 것이니까 '그래 됐어! 나는 청결해!' 하고 끝인가요? 이게 한국교회의 딜레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어. 끝. 그런데 구원 얻었다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죠?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사회의 어떤 조직체보다 더 문제를 야기합니다. 이것은 천한 구원론을 가르치기 때문인데요, '나는 청결해!'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죠? 지금도 우리 안에는 죄가 있습니다. 이 세상과 마귀와 동맹을 맺고자하는 육신이 있습니다. 천당으로 올라가 버린 것이 아니죠? 완전한 성화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도 과연 내 마음이 청결한가? 하나님을 보고 있는가?' 이점을 생각해야지요?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연합한 자는 이미 마음이 청결한 자라는 선언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내 안에는 죄악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전인격이 청결하다고 안도할 수 없죠? 안도하는 순간 나는 청결치 못합니다.

따라서 청결하려면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해야 하죠? 불신자라면 혹은 타종교를 가진 자라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연합해야 청결할 수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갈고 닦아도 마음이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또 둘째, 그리스도를 믿고 청결한 자라는 선언을 '이미' 받았으나, '아직'도 내 안에 죄가 남아 있기에 청결해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놓고 '복된 자다, 청결한 자다!' 하고 선언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신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에게 지금 주님이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보니 됐다고 끝내지 않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청결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내가 전인격이 깨끗해질 수 있을까요? 예레미아 17:9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한 이 말씀의 첫 대상은 누군가요? 구약 성도들이었죠? 이방, 이웃나라를 향해서 말한 것이 아니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 하나를 고르라 하면 사람의 마음이랍니다. 어떻게 청결할 수 있을까요?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청결함을 선언 받은 것은 사실인데, 정말 한 점 부끄럼이 없이 깨끗한 상태는 아니죠? 법적으로 선언을 받으면 다 되는 것은 아니죠? 나는 법적으로는 깨끗해졌다고 선언을 받았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전인격이 깨끗해질 수 있을까요?

이런 점들을 깊이 고민한 중세 때에 보면 수도원 운동을 하면서 교회가 점점 타락해가는 것을 보고 본질을 찾겠다고 청빈이나 정결생활을 주창하면서 수도원에서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이 세상과 가까이 있으면 자꾸 접촉이 되고 세상의 유혹을 받고 하니까 청결해지기 위해서 따로 나가서 공동생활을 하면 어떨까요? 실제로 그렇게 공동생활을, 세상과 분리된 생활을 한 집단이 있는데요, 그러면 청결해질까요? 예수님 당시 쿰란 공동체라고, 에세네파들은 청결한 생활을 토대로 하여 구원을 자처했는데요, 그렇게 노력을 하면 전인격이 깨끗해질까요? 하나님을 볼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에나 그랬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표준을 청빈생활에다 두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인가?

한곳을 찾아보지요. 야고보서 4장입니다. 야고보서 4장 찾으셨으면 6절부터 보겠습니다. 여기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청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좀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요, 6절부터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지요? 겸손하면 청결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겸손이 무엇인가?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여기 하나님과 마귀를 대비하여 가르치는데,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하나님과 마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 두 마음이겠지요? 그 밑에 두 마음을 이야기 했는데, 마귀는 무슨 흉측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중심'이 마귀편이지요? 사람이 자기중심적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결별하여 마귀 편이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런 두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권면하기를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케 하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누굴까요? 불신자일까요, 신자일까요?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불신자일까요, 신자일까요? 여기 야고보서는 누구에게 설교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믿는 성도에게 설교하죠? 그러니까 "두 마음을 품은 자"는 '성도'입니다. 불신자는 한 마음뿐이죠? 마귀에게 속해서 철두철미하게 마귀 휘하에서 움직이고 살아갑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아가는데, 그러니까 마귀의 종노릇만 하는 한 마음입니다. 성도인 우리에게 "두 마음을 품은 자"라고 하고 6절에 "교만한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합니다. 10절에는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합니다. 팔복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지요? '애통하라, 슬퍼하라, 낮아져라, 그게 복 받은 자다!' 합니다.

여기 '두 마음'이란?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왔다 갔다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가지 못하고, 하나님만 집중해야 할 마음이 자기에게 기울어져 있을 때 두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걸 교만이라고 합니다. 교만은 자기를 자꾸 높이는 거잖아요? 마귀가 아주 좋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대신 자기 마음을 높이는 것이 교만입니다. 조금 가늠이 될 텐데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곧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단 마음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한 마음을 품는 것' 곧 '하나님께만 집중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 스스로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그 초월하신 하나님만 집중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치른 대신 우리를 살려서,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셔서 우리를 거기에 결합하여 주셨습니다. 부활의 생명가운데 뿌리를 두고 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내 안에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붙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청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하는 강한 의지가 청결로 가는 사람입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것을 강력히 제지하고 눌러 버리고 그리스도를 쫓아 살려는 마음이 청결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를 가르친 다음 '두 마음을 품지 말라!' 하고 가르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마태복음 6장으로 넘어가서 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를 가르친 다음에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여기 "재물" '돈'을 말하는데, "재물"과 "하나님"을 대등한 위치에 놓고 '어느 것을 섬길래!' 하시는 것 같죠? '재물'을 마치 하나님처럼 '주인'으로 놓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누가 '재물', '돈'을 '내 주인이다!' 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실질적으로 '돈'을 '내 주인'이라고 한다는 것을 놓고 '하나님을 섬길래, 돈을 섬길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으로 가르치지요? 왜 재물을 의인화 하여 가르칩니까? 그만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인데 사람처럼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세상이잖아요? 돈으로 안 되는 게 있습니까? 안되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은 우선 당장 몇 가지 되는 것을 보고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게 사회적인 여론입니다. 돈 자체가 무슨 힘이 있어서가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취하고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화폐 개혁만 해도 돈은 그저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물질에 불과한데 사람이 숭배하니까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왜 이런 큰 힘을 발휘할까요? 사람이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무 밑에 가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는 것과 똑같이 돈을 따르고 추구하고 믿기 때문에 힘이 있습니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데', 하는 마음이 우상숭배입니다. '나는 돈이 나의 신이다!'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의지하고 돈을 추구하고 돈에 힘을 집어넣고 그래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니까 돈이 神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예수님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돈을 하나님과 나란히 놓고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돈과 하나님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두 마음'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죽음이지요? 우상숭배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두 마음은 결국은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두 마음이 없어야, 단 마음이어야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청결한 사람은 한 마음입니다. 오직 주님만 딱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단순히 무슨 착하고 순진하고 욕심이 없는 사람이 청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연합시켜 놨는데도 이 세상을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이 두 마음인데, 이것을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단 마음으로 그리스도만 바라는 마음이 청결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고 물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이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 우위에 두고 섬기는 마음이 곧 청결한 사람입니다. 참 성도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랑하려고 시작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믿고 믿고 이제 모든 것은 예수님께 있다 하고 시작하는 거잖아요. 이런 자들이 마음이 청결한거죠? 성도이죠. 그러나 현재 우리의 현실을 보면 과연 하나님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가? 우리의 본성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본성상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여전히 마음이 청결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야고보서 1:5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주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라!' 하고 약속하셨으니까, 우리는 약속을 다 믿잖아요. 주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죠? 우리의 본성이 움직여서, 우리의 본성이 발휘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마다 기도해야지요? 구하라하신 약속을 믿고 기도해야죠? 내 힘으로 하나님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 못하기 때문에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고, 자기중심을 더 사랑하고 말죠? '기도하라 그리하며 주님께서 주신다'고 하고 바로 뒤 6절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두 마음을 이야기하죠?

성도가 마음이 청결하려면? 첫째,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의심하는 자라고 하죠.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주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도가 마음이 청결하려면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구하는 그 자체가 이미 청결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그렇죠? 주님께 나아가서 '주실 것이다' 하고 구하면 청결을 보장 받는 거죠? 주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보는 자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이 청결하려면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내어 주십니다. 청결하게 해 주십니다. 무슨 요술을 부려서 청소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간구하면서 나아가면 주님이 응답의 말씀을 해 주셔서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확신케 하십니다. '아, 이렇게 우리 죄를 씻어주셨구나, 내가 이렇게 순종하고 가야 하겠구나' 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점차적으로 주님을 미워하는 본성이 떠나가면 점차 더 청결한 마음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들어와서 자리하고 있으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죠? 그래야 악한 본성이 떠나게 만듭니다. 하나님만 딱 의지하지 만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된 자라"고 한 말씀처럼 성도는 끊임없이 청결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청결했으니까, 즉 어제 내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내 안에 비진리가 물러났다, 주님을 미워하는 악한 본성이 물러났다, 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죠? 현재도 악한 본성이 자리하지 못하게 진리가 내 안에 꽉 차 가야 합니다. 주님 진리가 내 안에 들어옴으로 비진리가 내 안에서 물러납니다. 그런 사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마음을 청결케 하시는 분은 성령

그런데 이렇게 만드는 주체는 누구죠? 누가 마음을 청결케 하나요? 찾아보지요. 구약에 언약을 하셨는데, 에스겔 36장입니다. 얼른 찾아보죠.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요, 에스겔 36장입니다. 누가 청결한 마음을 갖게 하는가? 우리가 각고의 노력을 하면 되는가? 그 해답을 여기서 가르쳐줍니다. 에스겔서 36:25부터 보겠습니다.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여기 '정결'이 예수님 말씀과 같은 단어이지요?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내 神"이란 '성부 하나님의 神'인데, 거룩한 신, 聖神이지요? 성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聖神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주님의 율법을 지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고토, 즉 본국 유다로 돌아가게 하신다는 것과 또 돌아올 때 새로운 신, 성신을 주셔서 마음을 정결케 하고 율법을 지키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이 신약에 와서 완전히 성취되었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에 말씀으로 불러 모은 그 공동체 위에, 교회에 성신을 내려다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주장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하십니다. 여기 말씀을 잘 읽어보면 '새 마음을 주어 마음을 부드럽게 하겠다!'고 하고 특히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율법을 행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을 우리 속에 둔다. 이게 내주의 사역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사역하신다는 것이 '내주의 사역'입니다. 물론 우리 마음가운데 딱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구약과 비교해서 딱 붙어서 떠나지 않고 내주하신 사역을 말하는데, 그렇게 사역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결국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 혹은 주님을 미워하는 악한 성향이 떠나야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좋게 여기는 심정이나 마귀의 말을 더 듣기를 좋아하는 심정이나 하나님을 미워하는 악한 본성이 물러나면 주님의 말씀을 다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신, 성신께서 우리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경영하시면 우리 안에 죄가 물러나고 주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게 되지요? 한 마디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장하시는 그 주장에 우리 자신을 드리면 우리 마음이 청결케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하여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는 이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지요? 우리 가운데서 경영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악한 본성이 우리 안에 남아있기 때문에 이것이 발휘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항상 지금도 마음이 청결하려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자리를 딱 차지하고 경영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마음을 청결케 하시는 주체자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도

우리 마음을 청결케 하시는 주체자는 성령 하나님이시라면, 첫째, 성령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마음이 청결하다 할 수 있죠? 성령 하나님을 쫓아가는 사람이 율법의 말씀을 지킵니다. 성령을 좇지 아니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청결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아니하는 자는 자기가 주가 되어서 마귀의 말을 더 따르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 집중되지 못하고, '자기'에게 집중되면 두 마음을 갖는 자이고, 주님과 나란히 다른 것도 섬기는 자이니까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렇게 계속 나가면 사망에 이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첫째,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가 마음이 청결하고, 또 둘째,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데리고 가서 그분의 말씀을 깨우치시죠? 우리가 인식이 바뀌어야 우리 마음이 그쪽으로 향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중요하게 사역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셔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진리를 깨우치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두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항상 우리를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우리의 인식부터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쪽으로 기울게 만드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 마음이 청결하려면 성령을 좇아야 하고, 그분이 진리의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배우게 하시니까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배우고 있는 한 그 자체가 청결이죠? 그래서 주님을 줄기차게 따르면 우리는 항상 마음이 청결케 됩니다.

이 원리를 알지 못하면 '나는 예수 믿으니까 열심히 마음을 닦아보자!' 하고 내 마음을 갈고 닦으면 청결케 되는 줄 압니다. 중세 수도원 운동을 한 사람들처럼 청빈생활에 힘을 쓴다든지, 혹은 기도를 많이 하여, 기도를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아무 의미도 없이 자꾸 많이 하여 무슨 도인이 되는 것같이 한다든지 하게 됩니다.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쳐요.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께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쪽저쪽 자꾸 공급하여 인식을 바꾸도록 하지 않고, 그 주님의 말씀을 적당하게 단편적으로 가르치고 말고, 자꾸 무슨 신비한 것을 좇도록 하면 곤란하죠? 그러면 다른 것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실을 값싸게 하면 신자는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무감각해집니다. 회개하면 된다는 미명하에 신자가 더 죄를 많이 짓고 더 감각이 없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딱 주장하셔서 우리 안에서 경영하여 죄가 떠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힘을 쓰지 못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 성령을 좇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게 하십니다. 그럼 행하는 것은 누굴까요? 행하는 것은 내가 하지요? 성령께서 100% 내 안에서 경영하시고, 내가 그것을 깨닫고 100% 내가 행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가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100% 내가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서 살려면 결국 성령께서 어디로 이끄시려는지, 특히 우리 안의 청결을 어떻게 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첫째, 그분께 우리 자신을 다 의탁해야 하고, 둘째, 그분은 항상 우리를 진리의 말씀인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게 하시니까 그리스도의 명령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은 만큼 그분을 순종하게 됩니다. 그렇게 순종하고 사는 삶의 자체가 바로 마음이 청결한 상태입니다. 그렇지요? 그리스도를 졸졸 따르는 사람이 '불순한 마음이다' 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졸졸 따르는데 어떻게 불순하다 할 수 있습니까. 그분을 따르는데 여지를 두니까 두 마음이고 청결치 못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

그다음 예수님께서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십니다. 마음이 절대적으로 청결한 자는 예수님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신데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 좇았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영광만 구했습니다. 단 마음이지요? 청결한 마음이지요? 두 마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좇았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음 22:42. 그러면서 십자가를 매고 죽는 길을 가셨습니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할까 말까? 두 마음에서 방황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버지를 보았지요? 주님의 뜻이라면 죽는 데도 가는 그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버지를 보죠?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했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14:8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깨닫지 못한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본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골 1: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깨달으면 아버지를 보는 자이지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아버지를 볼 수 있을까요? 우리도 역시 예수님을 잘 깨달으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잘 깨닫고 그 그리스도를 쫓아가면 아버지를 보는 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예수님을 잘 깨닫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주의들과 전혀 다르지요? 신비주의자들은 무슨 꿈을 통하여 무슨 환상을 통하여 주님을 본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르치지요? 예수님께서 진리를 가르쳐 주신 것을, 즉 성경을 설교하는 것을 잘 깨달아서 분별하고 살면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늘 아버지를 보고 남에게도 보여주는 자가 됩니다. '아, 저 사람을 보니 주님이 살아계신다!' 하잖아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고 살아가니 '아, 저 사람은 무엇인가 다르다!' 그 말속에는 주님을 보여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중요하고 우리의 삶의 그 원동력이 되는 강단의 설교가 중요하지요? 목사도 책임이 크고, 큼을 알아야하고 여러분도 책임이 큰 것을 알아야하죠?

또 고린도전서 3:18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성도는 율법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과는 달리 벗은 얼굴로 복음의 거울 속에 비춰지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도는 앞으로는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분에 대한 지식을 받고 내면이 변화됩니다. 청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재림이 실현될 때 우리의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의 형체를 얻게 됩니다(빌 3:21). 그때는 우리 서로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하여 봅니다.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그때는 주님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우리는 다 이 영광의 몸을 입고 영원히 영광의 주님을 섬길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완성입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저희를 영광으로 계시는 그리스도께 신령하게 연합하여 주셔서 이 땅에서부터 마음이 청결한 자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이렇게 저희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것은 저희 스스로는 될 수 없고 오직 주님의 신인 성신께서 저희 안에서 경영하심으로 죄가 떠나고 점점 더 거룩하게 청결하게 되옵나이다. 저희는 다만 그 거룩한 경영하심을 잘 깨닫고 깨닫는 대로 저희 전부를 주님께 의탁하고 단 마음으로, 두 마음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굳게 신뢰하고 따르고 할 뿐이옵나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임을 배우옵나이다. 주님께서 성령을 저희에게 주시고 또한 진리의 말씀 가운데로 이끄셔서 저희 안에 죄를 다 드러내어 돌이키도록 하시고 주님을 굳게 의지하게 하시옵나이다. 이런 삶의 행보에서 저희는 늘 청결한 마음 상태로 아버지를 뵙고, 영광스럽게 영원히 섬기는 그날을 소망하면서 즐겁게 주님을 따르게 되옵나이다. 미천한 저희들에게 이런 큰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을 찬송케 하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