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오늘은 팔복 중에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감탄문

7절의 말씀인데 다같이 읽지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도 잘 읽어야 하는데요, '우리가 누구를 긍휼히 여기면 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읽으면 잘못 읽는 거지요? 기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긍휼히 여기면 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바라는 기원이 아니고 감탄문이라고 했지요? '복되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지요? 감탄하는 것이니까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혹은 '긍휼히 여기는 복된 자여!' 이렇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언되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긍휼이란?

먼저 "긍휼히 여긴다"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있죠? "긍휼"은 사전에 보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준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 준다'는 말은 '자비'와 비슷한 말이지요? '자비'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인데, 그러므로 '긍휼'이나 '자비'는 같은 말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합니다. 그렇다면 '남을 불쌍히 여겨서 도와주는 사람은 다 복된 사람인가?'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중에도 남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남을 긍휼히 여기며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된 사람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공자나 석가도 할 수 있는 말이지요? 세상 사람을 향하여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라, 그러면 복된 사람이다', 하고 공자나 석가도 다 말하잖아요. 예수님께서 그 정도로 말씀하실 까닭이 없지요?

예수님께서 여기 팔복에서 말씀하신 '복된 사람'은 다 누구라고 했습니까? '성도'라고 했죠? 불신자를 놓고 '남을 불쌍히 보고 도와주면 복된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긍휼히 여기는 일'도 만날 텐데 그런 점을 염두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의문이 드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가 하는 긍휼과 불신자가 하는 긍휼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의문이 들지요? 무슨 차이가 있죠? 우리가 몇 년 말씀을 배우게 되면 이런데 대한 구분은 확연히 하고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차이가 있죠? 불신자들이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과 신자가 이웃에 자비를 베푸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여기 '긍휼'을 단지 사전적인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

예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긍휼"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는 긍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 스스로 할 수 없는 긍휼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빌려서 쓴 것뿐이지, 그래서 세상에서 쓰는 긍휼이란 말을 같이 썼을 뿐이지 사실은 전혀 다른 뜻의 긍휼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인 단어가 원어로 '헤세드'라는 단어인데요, 150회 이상 나옵니다. 90% 이상이 하나님과 관계하여, 또 하나님의 행동과 관련하여 '헤세드'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단어를 약 90%가 '긍휼'로 번역했고, 우리말로 변역할 때, 또 40회 정도가 '인애' 즉 '사랑과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거의 비슷한 말로 이렇게 저렇게 변역을 했는데, 우리나라 말은 고정화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는 같은 단어에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헤세드라는 말을 번역할 때도 어떤 경우는 '긍휼'로 어떤 경우는 '인애'로 번역했습니다. 이 '긍휼'이란 말은 주로 죄로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긍휼'로 표시했습니다.

한곳을 찾아보지요. 시편 62편입니다. 62:12을 같이 읽죠.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여기 "인자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헤세드'인데, '긍휼', '자비', '인자', '인자함'으로 번역됩니다. 여기 "인자함도 주께 속했다"고 하지요? '인자함', '긍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긍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긍휼, 자비, 혹은 인애가 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룻기서를 배우면서 자주 언급한 말이 '헤세드', '인애'라는 말이었지요?(룻 1:8; 2:20; 3:10) 그 말이 오늘 본문의 '긍휼'과 같은 말입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사람에게는 없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이 긍휼이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나타날까요? 한곳을 신약에서 찾아보지요. 신약 로마서 9장을 보십시다. 14절부터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이 저 멀리 로마 교회 앞에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은 불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가 없다'고 하면서 옛날에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말하는데, 15절입니다. 다같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하죠? 사도가 지금 옛날에 구약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은 주님이 택하시고 애굽은 버리신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 인용한 구절이 출애굽기 33:19인데요, 당시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범한 상황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당장에 멸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배신감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당장 멸하는 대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당장에 멸망 받아도 상관없을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인가? 무슨 근거로 저러시는가, 알고 싶어서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애굽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기시는지? 그 근거를 요구하자(출 33:16, 18)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풀 자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무슨 환경과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긍휼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가? 구원해 놓고도, 출애굽 시켜 놓고도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이런 괴씸한, 배신감을 주는 이런 이스라엘을 왜 구원하시는가? '긍휼', '자비', '사랑'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신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데서 그 긍휼이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죄악 가운데 떨어진 이스라엘을 구원함으로써 주님의 긍휼히 확 드러났습니다. 애굽을 심판하실 때는 공의가 드러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는 '긍휼', '자비'가 잘 드러났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애굽 백성들과 다를 바 없죠? 죄인들입니다. 지금 바울이 여기 로마서에서 말하는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는데, 그런 범죄한 인간의 결과는 사망이죠?(롬 6:23) 그런 죽을 죄인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이스라엘도 구원하셨고, 지금 여기 로마 교인들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애굽민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죄인인데 이스라엘에게 구원하셔서 긍휼을 나타내셨고, 그리고 여기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로마교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난 사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만 있는 긍휼이, 자비가 언제 나타났지요? 구원의 사역을 베푸실 때 나타났죠? 본래 사람들은 주님의 긍휼을 도무지 모르는데, 구원을 받으면서 주님의 긍휼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주님의 긍휼을 나타내신 예수님

그렇다면 주님의 긍휼히 가장 잘 나타날 때가 언제일까요? 언제 주님의 긍휼이 잘 나타났을까요? (십자가에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다 사하시고 온전히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게 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게 하시고 사람과 동일시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워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독생자라도 죽게 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노, 공의가 잘 드러났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를 극명하게 보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하면 주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나님까지 내버리셨는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자비가 밝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셨을까요? 우리를 왜 불쌍히 보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고 구원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죠? 사랑이 부어지니까 주님의 긍휼이 잘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긍휼을 입은 성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을 받고 보니까 주님의 긍휼을 입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 입기 전에는 주님의 긍휼을 도무지 모르던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보니까 주님의 긍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특히 그리스도와 결합한 이 교회는, 우리는 다 주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입은 이 긍휼은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비, 긍휼, 사랑 이런 것들을 말하지만 우리가 받은 사랑, 긍휼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3에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합니다. 내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구제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긍휼입니까? 내가 약자를 위하여 불속에라도 뛰어들면 얼마나 큰 긍휼입니까?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여 나온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남을 돕고 자기 몸을 불살라서 남을 위하여 내어주는 긍휼보다 더 큰 긍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헛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헛것이라고 하는 이 사랑도 지금 여기서 말하는 긍휼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 사랑을 말합니다. 세상에 '고객님 사랑합니다' 하는 이 헤프게 쓰는 사랑,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주님께서 가지고 있는 이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라면 헛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긍휼, 자비, 사랑, 말하지만 십자가에서 나타낸 주님의 긍휼에는 도무지 비할 수 없습니다. 그런 큰 긍휼을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신자들에게 부어주셨습니다. 도무지 용서받을 길이 없는, 지금 당장 지옥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우리에게 주님의 긍휼이 부어졌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워서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우리에게 크신 긍휼을 부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뭘까요? 무슨 근거로 이런 큰 긍휼을 부어주셨습니까? 그분은 본래 긍휼하시니까, 그분은 본래 사랑이시니까... 이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죠?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우리를 그분과 연합시켜 교회로 이 땅에 딱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보면 그리고 주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더 향상해 가면 주님의 긍휼이 잘 보입니다. 이 긍휼을 사람이 흉내나 낼 수 있습니까?

○긍휼? 어떻게 하라고 하신 걸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교회 앞에 성도들인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되다' 하십니다. 성도인 우리를 보고, '너희는 긍휼이 여기는 자다!' 하신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는 남을 위하여 본래 긍휼히 여길 수 없는 존재인데, 왜 우리를 보고 '긍휼히 여기는 자다' 하셨을까요? 어떻게 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처럼 하는 긍휼은 아닌 것이 드러났죠? 그럼 우리 성도가 하는 긍휼은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놓으셨으니까, 그리스도와 결합 시켰으니까 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긍휼을 나타내신 것처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있는 긍휼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나요? 우리 스스로는 못 합니다. 한곳을 찾아보지요. 마태복음 15장입니다. 조금 도움이 될까 싶어서 찾아보고자 하는데요. 마태복음 15:21부터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 '불쌍히 여기소서' 한 말이 '긍휼'과 같은 단어입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한 것입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여기 가나안 여인이 '주여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시면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지요? 여기 예수님의 긍휼은 전제되는 것이 무엇이죠? '믿음'이죠? 여인에게 긍휼이 부어진 것은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믿음 때문이 아니라 긍휼을 가지고 계신 주님 때문이죠. 여인은 다만 그것을 믿은 것뿐입니다. 여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것뿐이죠. 이런 여인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개'라고 했잖아요. 일부러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르셨는데, 그 여인은 '맞습니다, 나는 개 같은 존재입니다,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고 인정하고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성도가 누구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긍휼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긍휼히 여기라!' 한 말씀은 바로 주님께서 긍휼의 주체니까 첫째, 그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거죠?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분께로부터 내가 먼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을 전제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너에게 가지고 있는 것 가지고 해보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긍휼을 내가 공급하니까 이것을 네가 먼저 받고 그것을 가지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하는 긍휼은 먼저 그리스도께 생명의 자양을 공급받듯이 긍휼도 공급 받아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으면 긍휼도 따라 입죠?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과 긍휼을 입는다는 것과 비례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긍휼히 여겨라' 하신 말씀은 먼저 '너희가 나에게 긍휼을 받아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전제된 말씀을 생각지 못하고 '그래, 내가 예수 믿으니까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지!' 하고 행동하면 바로 누가 드러나지요? '나의 인간애'가 드러나고 맙니다. 세상 사람도 다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성도에게서 나와야 할 긍휼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나오는가? 첫째는 나부터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임을 먼저 인식하는 거죠? 믿으라는 거죠? 말씀을 통해서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죄인인데 누가 누굴 긍휼히 여기겠습니까? 나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서, 그 긍휼을 입어서 살아가는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옵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이웃을 긍휼히 여겨라, 하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전제된 것을 생각해야하죠? 첫째, 나부터 긍휼을 입어야 하겠구나.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여전히 필요한 사람이다', 하는 그 터 위에서 '저 사람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사람이다' 하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을 그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자신부터 긍휼히 여겨야 남도 긍휼을 받아야 할 자로 보입니다. 자기는 의인이고 남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데서는 자기 것이 나갈 뿐이죠? 그런 사람 많지 않습니까? '나, 예수 믿으니까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야지' 하고 자기 열심을 가지고 남을 돕고 사랑하고 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드러나지요? '그 사람 참 좋다, 그 사람 참 훌륭하다' 하잖아요? 사람만 드러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안 드러납니다. '나도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사람이다' 하고 그래서 주님의 긍휼을 입으면 그것으로 남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찬송이 나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이렇게 생각하니까 위로가 되지요? 한없이 부족한 우리는 '나는 왜 저 사람처럼 사랑이 없는가?' 하고 부끄러워 할 수 있는데, 위로가 되죠? '아, 내 것 가지고 하는 게 아니네' 하고 위로가 됩니다.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긍휼이 참된 긍휼이라고 하니까 나는 부족해도 상관이 없잖아요. 위로가 되지요? 주님의 것을 가지고 하면 됩니다.

또 "(7)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면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이 아닌 것이 드러났지요? '우리가 이웃을 긍휼히 여기면 나도 주님께서 긍휼이 여겨 주실 것이다, 그래 하자', 하면 거기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안 보입니다. 나도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쉽게 말하면,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님이 이웃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심부름을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직접 직통하듯이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고 성도를 심부름꾼으로 내세우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연합해서 다 지체로 수족노릇을 하도록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 것을 주는 것은 참 긍휼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을 앞세워서 내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입니다. 수족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예를 가로채지 말아야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를 잘 못 믿으면 실컷 믿고도 세상 사람이 하는 일을 일생 하다가 그치고 맙니다. 구제나 선행, 긍휼, 자비, 이런 것은 믿지 않는 사람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도 그처럼 하는 것은 참된 긍휼이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드러낼 뿐입니다. 아주 교묘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지만 자기 이름을 드러냅니다. 요즘 교인들이 얼마나 자기 명예를 잘 드러냅니까? 자기도 잘 모르게 그렇게 합니다. 한 예를 들까요? 헌금 어떻게 합니까? 이름을 다 써내서 합니다. 의도는 그렇지 않죠? 잘 모르니까 이름을 써서 헌금을 하는데 문제는 목사의 책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전해야, 잘 몰라서 하다가도 자꾸 고쳐서 회개하고 바로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우리 주변의 교회는 자기 이름을 다 써서 헌금합니다. 그걸 또 주보에 쭉 이름을 다 냅니다. 목사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안 가르쳤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리 읽고 봐도 자기 이름을 써서 헌금 하라는 데는 없는데, 왜 이렇게 사람을 높여놨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서도 힘을 못 쓰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와서는 아주 명예가 찬란합니다. 세상에서 하는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헌금을 팍팍 내면 존중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무엇이 다릅니까. 이게 주님의 몸인가요? 이게 주님의 교회인가요? 근데 이게 목사의 잘못이에요. 진리를 똑바로 가르쳐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져야 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헌금을 하는데 왜 사람의 이름이 드러나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안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하는 것이 드러나야지 왜 사람의 이름이 드러나는지 모르겠어요. 잘 납득이 안갑니다. 사람의 이름이 드러나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꾸 뒤로 물러갑니다. 감춰집니다.

여기 '긍휼히 여겨라!' 하신 말씀은 '주님의 긍휼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도 긍휼을 풍성히 입으리라' 하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서 드러내야 합니다. 또한 그러려면 내가 받아야 하죠? 나부터 '나는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수 없습니다' 하고 긍휼을 받아야 하죠. 잘 받는 사람이 이웃을 긍휼히 여길 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거기에서 항상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기도하시지요.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은 자비하셔서, 긍휼이 많으셔서 저희를 사랑하시고 죄에서 비참에서 건지시는 데서 긍휼이 항상 드러나옵나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저희와 동일시하여 저희 죄를 다 짊어지워서 십자가에 심판하심으로 저희에게 긍휼을 부어주신 사실을 알게 되옵나이다. 또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저희가 남보다 사랑할 줄 모르고, 긍휼히 여길 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주눅이 들고 부끄러웠는데, 주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내는 긍휼은 참된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셔서 큰 위로를 주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사람은 도무지 나타낼 수 없는 긍휼이기에 첫째는 주님의 긍휼을 저희가 먼저 입어가야 함을 알게 하시고, 그리하여 주님을 더 의지하고 주님의 것을 더 받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시옵나이다. 주님께서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그렇게 부어주신 주님의 긍휼을 저희가 필연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이웃을 긍휼히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저희가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옵나이다. 이런 긍휼은 타 종교에서나 사람에게서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것임을 오늘 배웠사오니 주님, 저희를 통하여 주님의 이름이 항상 드러나게 하시옵소서. 주님을 항상 찬송케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