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오늘 산상보훈 중에 팔복의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이미 한 서너 차례 생각하면서 여기 예수님께서 복을 선언한 이 말씀은 제자들, 즉 예수님 자신을 따르는 성도의 모습을 선언한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한 개인 개인, 개인주의 신앙을 부추기는 말씀이 아니고 주님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의 한 지체, 지체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 주님을 따르는 성도는, 거룩한 교회는, 교회 지체들은, 이런 현실이 있구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런 저런 현실이 있구나!' 하는 것을 인식하고 이 세계를 헤쳐 나가도록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다같이 6절을 읽지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 목마르다'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합니다. 먹을 것, 마실 것에 주리고 목마르다 하면 쉽게 이해할 텐데,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고 하니 얼른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무엇인가? 먼저 "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하면 우리가 얼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의'나 '옳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의 대상은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이죠?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왔다고 하죠? 그러니까 무리를 뒤로하고 제자들을 따로 불러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물론 열두제자는 아니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을 놓고 천국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을 향하여 가르치시면서 염두 하신 것은 앞으로 십자가에 피 흘림으로 거기에 접촉하고 연합한 교회의 성도를 놓고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가 혹은 교회의 지체들이 주님을 따르면서 심령이 가난하기도 하고 애통하기도 하고 온유할 수 있고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도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의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칭의'는 아닙니다.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 성도에게서 나오는 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란 무엇인가?

본문의 "의"가 '디카이오쉬네'란 헬라 말을 직역하면 '정의, 공의, 옳은 것, 덕, 관용, 자선',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한 마디로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의'가 아니고 모든 옳은 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의'입니다. 다만 성도가 행한 '옳은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것도 옳은 것이고 정의를 외치고 사는 것, 또 직업 활동을 하면서 정직하게 행하는 것 등이 다 본문에서 말하는 '의'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졸졸 따르는 성도가 믿음으로 행한 '옳은 것'이 다 '의'이겠죠? 또 성도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옳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옳은 것도 하나님께서 '의'로 안 보시는 경우가 많지요? 가령 교회를 출석했다가 돌아가면서 남의 집의 무슨 물건을 살짝 가지고 갔다고 합시다. 극단적인 예인데,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답니다. 과거엔 농경시대니까 새벽기도를 갔다가 이웃집의 호박을 살짝 따가서 가지고 갔답니다. 그러면 집에 있는 아내는 자기 남편이 참 좋은 일을 했다, 의롭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불의라고 하시죠?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옳은 것, 이것이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옳은 것'이라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 중에도 좋은 일, 의로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출근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목격하고 지나칠 수 없어서 사고처리를 끝까지 해줄 수 있습니다. 그 참 옳은 일이죠? 그러나 그 때문에 자기 업무는 할 수 없지요? 사고 처리를 도운 것은 옳은 일이나 마땅히 자기가 그날 해야 할 일은 잘 못한 거죠? 그것은 불의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자기 일을 놔두고 먼저 남을 도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세월호가 침몰한 것처럼 그때는 목숨을 구할 일이니까 그것부터 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의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우선순위의 극단적인 한 예 - 장례에서 취할 태도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목사가 자기 아버지를 잃었다고 합시다. 장례를 치러야 하지요? 그런데 주일이면 예배도 드려야 합니다. 무엇이 먼저일까요? 예배도 드려야하고 장례도 치러야 하고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옳은 것일까요? 우순선위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찾아보지요. 좀 앞으로가서 마태복음 8:21~22 다 같이 읽죠.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제자 중 하나가 물었지요? '주님 내가 먼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 말이 불신 세계에서는 이해가 되기 어렵겠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씀입니다. 신자라도 잘 못 깨달으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생명이 우리 손에서 떠났는데, 장례는 가족들에게 맡기고 너는 예배에 참여하라!' 하면 그렇게 말한 목사에게 뭐라고 말 할까요? '어찌 목사가 저렇게 가르치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까?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할 꺼죠?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를 잘 못 깨달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예배하는 일보다 더 옳은 일이 있을까, 하고 참여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제자의 우유부단한 면을 간파하시고 예수님을 좇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기 위하여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을 돌보는 일이 좋은 일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영원한 일입니다. 이것을 잘 깨달은 개혁교회는 장례 문제에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 손에서 떠나버린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영향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장례를 놓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할지라도 참 성도라면, 교회를 잘 인식하는 자라면 주일에는 예배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목사가 장례하는 일이 있어도 그걸 잠깐 멈추고 예배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죠? 생명의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의입니다. 그럼 목사만 그럴까요? 제사장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만인제사장의 마땅한 일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교회답게 되는 일에 첫째는 제사장 사명,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잖아요?

우리가 '옳다', '의다' 할 때 자칫하면 편견을 갖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할 의무가 있는데도 그것을 놔두고 누구의 딱한 사정을 도와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특히 나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일을 잘하지 못해도 나에게 잘해주니까 '그 사람은 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질은 나에게 불성실할지라도 혹은 이 사회에 불성실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자기 행할 의무를 충실히 행하면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설사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도 '그래야 한다!' 하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원칙이 있으면 주님께서 힘을 주시면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행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먼저 내가 가진 원칙이 뭐냐, 하는 인식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없어도 '이것이다!' 하는 원칙을 깨닫고 있으면 주님께서 힘을 주시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식이 바로 되어 있지 않으면 힘을 주신다 하더라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란 우선순위에서 생각해야 하는 의입니다. 옳은 일은 참 많이 있는데, 그러나 우선순위 문제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마땅히 행할 일을 주신 것입니다. 하루의 일과라면 그날에 주님께서 맡겨주시고 요구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우리 학생 같으면 시간을, 그날 공부할 분량을 충실히 하는 것이 의입니다. 그것을 다 접어두고 이웃집 아이를 봐준다고 시간을 다 허비하면 그것을 아주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주님이 보실 때는 '옳은 것이다' 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죠? '너는 이렇게 하라' 하는 하루 분량이 있습니다. 그날 할 일이 있습니다. 마땅히 할 일이 있고 또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마땅히 행할 일,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 일이 '의무'입니다. 자기 임무를 옳을 '의'(義)자를 써서 의무(義務)라고 하죠? 학생 같으면 그날의 공부 분량을 다 하는 그것이 '의무'이죠. 어른이라면 직업 활동을 잘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목사라면 말씀을 충실히 연구하고 전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이것이 6일 동안의 일이라면 주일이 되면 좀 상황이 달라지죠? 학생이든 어른이든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의무이지요? 우선순위에서 그렇습니다. 주일의 의무는 주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우선순위 문제를 생각하면 무엇보다 교회가 제사장적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내가 제사장 사명을 수행하는 교회에 무슨 보탬이 되어야 하겠다, 하고 행하는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많은 의로운 일이 있으나 첫째, 교회가 주님의 몸답게, 교회답게 서는 일에 내가 이런 저런 보탬이 되어야 하겠다, 하고 행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것만큼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특히 요즘같이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는 때일수록 주님께 다 연합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나타내고 증명하는 것보다 더 큰 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에 대한 주림과 갈증이란?

그다음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의에 배고프다, 의에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을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픈 사람처럼 의에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을 먹지 못하여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의에 갈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팔복을 죽 가르친 다음에 6:33에 가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란 우리 육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집장만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이 사람이죠? 어느 누구든지 내 먹을 것, 우리 가정이 먹을 것, 입을 것 집장만하는 이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먼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겠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집도 다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이니까 그대로하면 이루어 주실 거죠? 성도는 불신자와 달리 먼저 구할 것은 '의'라고 가르칩니다. 배가 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듯이, 갈증을 느끼는 사람이 물을 찾듯이 의인은, '성도는 의를 찾는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무엇인가? 상태를 말하는데, 앞에서 우선순위를 생각할 때 첫째, 교회가 주님의 교회답게 서는 데 내가 갈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되려면 예배를 잘 드려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진리가 왕성하고 불의가 물러나고 주님의 공의가 또 주님의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 일에 내가 허기가 져서 자꾸 찾고, 찾고 행하고 또 찾고 주리고 목마른 행위입니다.

○갈급함의 중요성

그러니까 의로운 일을 행하려면 갈급함이 먼저 있어야 하지요? 중세 때를 보면, 주님의 교회답게 개혁되기를 갈급한 사람들 때문에 개혁교회가 일어났습니다. 만약 의에 대하여 갈구하지 않고 그대로 현실에 만족하고 지나가면 암흑의 시대를 그냥 갈 수밖에 없습니다.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에 의해, 그들이 의에 대하여 주리고 목마름이 표면적으로 떠올라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절실히 의를 행하고자 하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참 성도들에 의해 개혁 교회가 서갑니다. 절실함은 허기가 지고 목말라야 생기죠?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동사의 시제가 중요한데, '주렸고 목말랐던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이룬 것에 흡족해 하고 만족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의에 굶주림과 목마름이 항상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도는 이미 이룬 칭의에 만족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롭다 하셨다' 하고 족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으니까 천당!' 하고 '끝'하고 만족하고 사는 것입니다. '구원 받으면 됐지 무엇이 필요하냐' 하는 이것이 한국의 그릇된 구원론이죠? '아직 나는 완전하지 못하다' 하고 주립니다. 갈증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참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이렇다는 겁니다. 주리다는 것입니다. 갈증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서두에서 읽은 빌립보서 본문인데요, 찾아보지요? 빌립보서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로 앞에 5절을 보면 바울 자신이 '베냐민 지파로, 히브리 사람 가운데 히브리 사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이란? '강을 건너온 사람'이란 히브리어 '아바르'( )란 말에서 온 말인데요, 바울이 그렇게 철저한 이스라엘 사람이고, 율법으로 철저히 교육을 받은 바리새파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학문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그런저런 자기에게 있는 유리한 장점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합니다.

10~14절까지 같이 읽죠.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특히 12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이미 도달한 현재의 상태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취득한 현재의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갈등을 느낍니다. 이미 주님 앞에 '의롭다' 칭함을 받은 도달의 상태, 주님 앞에 많은 일을 해 놓은 그 성취의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성찬에 현재도 앉을 수 있는 나는 주님의 백성이다!' 하는 현재의 도달한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영광의 나라에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참 성도의 현실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놓고 자긍심을 가지고 살고 기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현실은 죄와 싸워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일을 놓고 내가 배고파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구원하신 것은 주님의 교회답게 건설하라는 중요한 목적이 있지요? 구원해 주신 그 목적을 달성해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에 배고파하면서 의를 갈구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리다', '목마르다' 하는 단어는 적극적인 동작을 말합니다. 직역하면 '의를 굶주려 하고 목말라 하는 자'입니다. 곧 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갈급해 하며 사모하는 자를 뜻합니다.

시편의 성도는 "(1)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처럼 참 성도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연합해 주신 주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더욱 닮아 그리스도와 흡사 하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항상 배고픕니다. 족하고 살지 못합니다. 항상 문제의식을 가지고 '내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겠다' 하고 허기진 상태로 주님을 열망합니다. 이것은 개인주의로 되지 않기에 그리스도께 연합한 이 몸,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일에 갈망합니다. 주님께서 건설하시는 거룩한 나라가 바로 서기를 간절히 추구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의 생활 태도(상태)

우리가 주리고 목마른 적이 별로 없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온갖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의해 모든 풍요를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 딱 갇혀 있으면 먹을 것이 없어 정말로 굶주려 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수도꼭지를 딱 틀면 물이 죽 나오는 우리 시대에는 정말로 갈증을 느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사람들은 큰 의미로 들었을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80원쯤 했다는데요,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만큼 적었다는 거죠? 이런 실정에서 아무도 여유 있는 삶을 살지 못 합니다. 늘 먹는 것에 심려를 기울여야 하는 때입니다. 일자리도 매일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하루건너 하루 일했기 때문에 가정 경제의 형편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렇게 실제적인 배고픔과 실제적인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는 것처럼 의를 찾는 사람, 목말라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이 물을 찾는 것처럼 의를 찾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 하셨습니다. 이들은 아마 실감나게 들었을 것입니다. '아, 그렇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란 그만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를 위하여 절실 해야하겠다!' 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적극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요즘은 복음이 널려있어서 너무 잘사는 시대에 우리가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상황을 잘 못 빠져 나옵니다. 우리의 인식부터도, 너무 널려있기 때문에 또 굶주린다? 목마르다? 이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널려있으며, 기쁜 소식이 여기저기 요소요소에 있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쫓아가면서 의를 갈구한다는, 여기에 허기지고 갈증을 느낀다는 것이 실감 있게 자기에게 절실히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적극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저 저절로 되는 줄 아는 상태가 아닙니다. 내가 먹을 것을 못 찾으면 죽잖아요. 먹을 것이 없는데 먹을 것을 찾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 심정으로, 먹을 것을 찾는 심정으로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나는 죽는다!' 하는 심정으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배고픈 상태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바로 이루기 위하여 이 사회가 바로 서야하겠다' 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힘쓰는 것입니다. '사회의 부조리, 악들이 철폐되지 않으면 교회가 악영향을 받는다!' 하는 심정으로 절실히 이 사회 앞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의를 힘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는 그냥 구원하신 것이 아니죠? 구원의 목적을 이루고자 구원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나를 쓰셔서 주님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주권적으로 독생자를 십자가에 희생시키시고 거기에 참여시킨 자들을 쓰셔서 거룩한 나라를 경영해 가십니다. 주님 스스로 주권적으로 친히 거룩한 나라를 경영해 가실 수 있으나 우리를 거기에 참여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사랑이죠. 큰 영광에 우리를 가담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실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성도는 마땅히 자기가 거기서 할 의무를 찾아서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때문에 십자가도 짊어지셨습니다.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성도들은 마땅히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지체의 의무를 짊어집니다. 내가 얻은 자유를 마음대로 쓰지 않고 형제를 위하여 사랑의 의무를 짊어집니다.

○배부를 것이다?

그다음에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배부를 것'이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배부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서 만족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오히려 손해를 보고 핍박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만족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만족함을 얻고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앞에서 말씀한 것과 연결 지어 보면 의를 위하여 갈증을 느끼고 추구하는 그런 자들은 그 의에 충족함을 얻어서 배부를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교회를 위해 갈증을 느끼고 주님의 교회답게 되기를 배고파하면서 추구하는 그 사람에게는 교회 때문에 배부를 것이지요? 성경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주린 자들에 대한 약속을 말합니다. 시편 107:9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주린 자, 갈증을 느낀 자에게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님께서 채워주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계속 되어야하죠? 주님 앞에 주리고 목마른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자는 항상 채워주심을 받을 수 있죠?

요리문답 114문에 보면 '성도가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하고 묻고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이런 순종을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하고 답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일부 계명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고 덧붙여 고백합니다.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힘써 행하는 사람이 배가 부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더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이생에서 우리의 주림이 완전하게 만족되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 배부르게 하시지만 다시 주릴 것을 예상하죠?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는데, 이 약속은 우리가 계속하여 주님으로부터 받아 마실 때만 성취됩니다(요 4:13~14; 7:37). '아! 이제 됐다' 하고 그치는 순간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참 성도는 과거의 경험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이러이러한 충족함을 경험했다 하는 거기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달려갑니다.

우리는 중단 없이 달리다가 하늘나라에 이르게 되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그때는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7:16~17. "(16)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17)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고전 2:9)을 미리 맛보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영원히 죄 문제를 해결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더 이상 주리지 아니하고 더 이상 목마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푯대를 향하여 우리는 늘 배고파하면서 갈증을 느끼면서 전진합니다. 그런 성도에게 이 땅에서 이미 누리는 것도 상당할 것입니다. 여기까지 하시지요.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를 것이라고 하셔서 저희가 이 땅에서 항상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주님의 교회가 바로 서기를 추구할 수 있도록 하시옵나이다. 저희는 늘 부족하고 연약하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을 것을 주님이 다 아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고 배부를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저희는 늘 주리고 목마름이 있사오니 주님, 저희에게 넉넉하게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에 늘 주리고 불의에 넉넉히 대처하고 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장차는 주님께서 완전히 채워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면서 의에 주리고 갈급 하는 복된 전진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