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다. 칼빈과 인간의 영적인 무능력

칼빈은 루터의 기초적인 저술들을 근간으로 삼아서 보다 성경을 더 면밀하게 검토하여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특히, 차분하게 논쟁들 속에서 로마 가톨릭의 문제점을 간파한 칼빈에 의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 더욱 더 상세하게 밝혀졌다. 칼빈은 기독교 신학사에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비관적으로 "전적 타락" 혹은 "전적인 부패"(total depravity)의 개념을 강조한 신학자로 알려졌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해서 오염되어졌고, 전인격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고 말았음을 상세하게 풀이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전적 타락에 대한 개념과 용어는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졌고, 어두운 측면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풀이되고 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죄와 연계되어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인 행동들이 모두 다 죄악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총체적으로, 광범위하게, 종합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전죄와 죄책 아래 있다는 말이다.  

칼빈의 인간론, 특히 인간의 본성에 관련된 내용에는 두 가지 내용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칼빈의 일반은총론이다. 칼빈은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졌으나, 완전히 상실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재세례파의 급진주의적인 문화파괴에 대해서 칼빈의 강력한 반론에 담긴 논쟁에 잘 표현되어 있다. 칼빈은 이방인들이 과학과 예술, 의학과 철학, 법학과 정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진보를 보이는 것은 성령의 일반은총이라고 보았다. "비록 인간에게 주신 형상이 그 완전한 상태로부터 타락하고 왜곡되어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로 옷입고 장식되어 있다."이것은 하나님이 훼손된 인간의 본성 안에 아주 놀라운 선물들을 많이 남겨두셨기 때문이라고 칼빈은 강조하였다.

칼빈은 인간이 타락하여 의지의 자유를 빼앗긴 이후에도, 여전히 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활용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신다는 점에 주목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보편적으로 탁월한 은사들을 성령님께서 내려 주셨다.

"우리는 세속 저술가들에게서 이런 문제들을 접할 때마다, 그들 속에서 비치는 진리의 환한 빛을 보면서, 비록 타락하여 그 온전함에서 부패해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지성이 과연 하나님의 탁월한 은사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 인간 본성이 그 참된 선을 빼앗긴 이후에도 주께서는 정말로 많은 은사들을 그 본성 속에 남겨두셨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에게 주신 도덕적 능력은 죄의 영향으로 인해서 부패하고 말았다. 인간의 조건 속에는 부패한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타락 이후로 모든 값없는 은사들이 사람에게서 사라졌고, 남아있는 자연적 은사들도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정말로 옳은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들은 더러워질 수 없으나, "부패한 사람에게는 이 은사들이 더 이상 순결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들이 칭송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불안정하고 덧없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신적인 감각"(sensus divinitatis)이 주어져 있다는 강조점에 주목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이 있는데, 이는 결코 말살시킬 수 없도록 인간의 마음에 각인되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인간의 마음 속에 본능적으로 신에 대한 지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받아들인다."

우상숭배하는 자들이나 미신을 따르는 자들이나 각종 종교에 유혹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비록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일반적인 계시가 들어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다소 역설적인 조건이다. 비록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합당하지 못하며, 극히 제한적인 범위에 이르지만, 그래도 인간은 일반은총의 열매들을 맺어서 사회와 가정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적 부패에 대한 강조를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본성의 진면목을 다 드러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은 이웃에게 무조건 선하고 착한 일을 할 수 없다고 핑계할 수 없으며, 밤낮 살인과 강도와 강간을 일삼는 자들을 정당화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극단으로 치우쳐서 인간성의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깔뱅 생가에서 중요한 판화가 있다. 위제 알라드(Huijeh Allardt)의 1562년 작품인 ‘성경의 무게’다. 성경의 무게는 사탄과 교황과 모든 인간이 기록한 책과 모든 사제
▲위제 알라드(Huijeh Allardt)의 1562년 작품인 ‘성경의 무게’. 칼빈을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이 성경 뒤쪽에 서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담겨놓은 일반 계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입장을 언급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지만(시 104:2, 시 11:4, 롬 1:19-23), 문제는 인간의 분별력이 무능력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믿음의 빛을 가지고 피조물의 세계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극장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빙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출발점은 사도신경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자연과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게 알려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평가했다. 훗날 헤르만 바빙크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특별한 점은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기초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종교개혁은 자연적 계시와 초자연적 계시를 구분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원칙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초자연적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죄로 가득한 타락한 인간의 생각과 소원을 훨씬 뛰어넘는 계시를 지칭하기 위해 붙여졌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인간의 지성이 죄로 어두워져서 자연적 계시조차도 제대로 알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안경을 주셔서 우리가 자연적 계시를 읽도록 도우셔야 했다."  

둘째로, 칼빈의 원죄이해와 인간타락에 대한 이해이다. 칼빈은 타락을 매우 심각하게 취급했다. 아담의 후손들은 에베소서 2장 1절,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향해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어거스틴과 같이, 칼빈은 타락으로 인해서 이중적인 결과, 죄책과 부패가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타락의 첫 번째 결과는 아담의 죄책이 인류 모두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5장 12절-19절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인간은 모두 다 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둘째로, 아담의 부패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바, "원죄"의 영향이 "상속된 부패"를 야기하고 있으며, 인간의 선하고 순결했던 본성이 타락했다고 주장했다.  

칼빈이 가장 주목한 인간의 부패한 본성은 우상숭배로 전락한 모습이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을 품고서 참된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열매를 맺기도 전에 그 나무는 잘라져서 무용지물이 되었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롬 1:18-23). 인간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아담에 주셨던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은 "깨어진 그릇"(a shattered vase)처럼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결국 칼빈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주장한 바를 요약하면, 우리 인간이 스스로 죄인이 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모든 원하는 것들은 그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이미 죄악에 관계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의지는 죄의 굴레에 완전히 묶여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 없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움직임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시초인데, 성경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릴 수 밖에 없다는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의아스러운 일이다. 사람이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을 때에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며 외부로부터 어떤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죄를 지은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본성은 너무나 부패해 있어서 오직 그는 악을 향해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이 분명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신인협력설에 대해서는 피터 롬바르드가 왜곡했다는 점을 강력하게 논박했다.

"의지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선을 대적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회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일단 그렇게 준비를 갖춘 다음에는 의지가 활동하는 데에서 자기 몫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거스틴이 가르쳤듯이, 은혜가 모든 선행에 먼저 작용하는 것이며, 의지는 은혜의 인도자로서 앞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추종자로서 은혜의 뒤를 따라 가는 것이다. 이 거룩한 분은 전혀 악의가 없이 그렇게 가르쳤는데, 피터 롬바르드가 이른 터무니 없이 왜곡시켜서 그런 뜻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가 과연 남아있는가? 그래서 선행을 하고 공로를 세우고자 스스로 노력하면서 특히 수도원이나 은둔처에서 독신, 기도, 명상, 순례, 고행, 헌금 등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업적을 세울 수 있을까? 인간의 본성은 죄로 얼룩져서 하나님이 창조할 때 주셨던 거룩성을 상실하였기에, 스스로는 구원에 이르는 선한 공로를 세울 수 없다.

타락하기 이전에 인류는 선한 의지를 가졌으나, 타락 이후의 인간은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한다하더라도, 죄에 의해서 얼룩져있다. 심지어 이웃을 사랑하는 선한 동기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의 의지는 자만심과 교만함, 자기 의로움과 타인에게서 오는 평판 등으로 얼룩져있다.  

사람의 죄성은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창조적 능력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원래는 사람과 만물을 선하게 지으셨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오염되고 부패케 되었다. 사탄은 창조의 능력을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 들어와서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고 오염과 부패를 유발한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의 선하신 피조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