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평찬
▲찬양사역자이자 기독방송인으로 활약 중인 이평찬 목사를 GOODTV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지희 기자

'7080 시절' 인기곡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그룹 '라스트 포인트')의 리드싱어에서 지금은 찬양사역자로, 또 기독방송인이자 목사로 국내외를 종횡무진 누비는 56세의 사나이는 지금 또 한 번의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다. 넘치는 재능과 끼로 순조롭게 가수, 기독방송인으로도 이름을 알린 줄 알았더니 타고난 재능에다 철저한 노력형 사역자로 날마다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매일 새벽 3시면 눈을 떠 새벽 5시 목회하는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하고, 최상의 찬양과 진행을 하기 위해 수십, 수백 번 연습하며 녹음한 것을 직접 점검하는 이평찬 목사(56)는 요즘 "방송사역에 부흥회, 헌신예배, 찬양집회 사역 등으로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라며 "피곤해도 방송이 좋으니까 즐기며 산다"고 말했다. 차분하고 조곤조곤한 말투 속엔 진중함이 묻어났고,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그의 얼굴에선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혈기가 왕성했던 20대, 세상 욕심을 좇아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때 했던 실수를 털어놓을 때도 꾸밈없는 솔직함과 진솔함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빡빡한 스케줄로 바쁜 그를 잠시 멈춰 세우고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평찬
▲세상 무대에서 가수로 잘나가던 이평찬 목사(사진)는 어머니와 아내의 기도, 그리고 군인 시절 하나님께 드린 서원으로 인해 목사가 되었다. ⓒ이평찬 목사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게 된 남다른 사연

1960년 농촌 마을인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원리에서 '면장집' 6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이평찬 목사가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남다른 가족 사연이 있다. 고을 원님을 지낸 증조할아버지에 이어 면장을 지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는 이미 5명의 아들이 있었고, 늦둥이로 생긴 막내아들을 부모는 뱃속에서 떼어내려고 약을 먹었다고 한다. "인간의 계획은 (아이를) 없애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계획 아래서 저는 핏덩어리로 세상에 났습니다." 뱃속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여린 생명이 살아서 태어나자, 이제 어머니는 행여나 아이가 진짜로 죽어버릴까 걱정되어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품에 안겨 교회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는 몸이 약해서 부모님의 걱정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어릴 때부터 재능과 끼가 넘쳐 주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났다. 당시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교회에서 그는 찬양, 성극, 동화구연도 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기타도 치면서 타고난 음악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지금도 몸집이 작지만,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노래도 잘하고 웅변도 잘하고 목소리로 하는 일은 어릴 적부터 다 잘했습니다."

이평찬 목사와 형제들의 타고난 목소리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이 된 6남 1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이 울려 퍼진다고 말했다. 그의 형들은 공부를 잘해서 명문고로 진학했고, 이 목사도 시험을 쳐서 수원수성고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동문 중에는 동기동창 염태영 수원시장 외에도 국회의원 등 사회 각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고등학생 이평찬에게는 공부보다는 기타와 음악이 더 좋았다. 타 학교의 문학의 밤 등에 자주 초청되는 인근 지역에서 유명한 학생이었고, 그의 자취방은 친구들이 쉴새 없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도 웅변대회마다 출전해 ‘최규하 국무총리 배 전국남녀웅변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는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아나갔다.

순전히 좋아서, 즐기면서 하던 '외부활동'이 많아질수록 성적은 반비례했다지만,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등학생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던 시절이었다. 이후 홍익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1학년 때인 1979년, 제2회 TBC 젊은이의 가요제에 선배들과 함께 결성한 그룹사운드 '라스트 포인트'로 출전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김소월 시, 원용성 작곡)로 대상을 타고 가수로 데뷔했다. 본격적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공연을 다니면서 자연히 명예와 돈도 따라왔다. 군에 입대했을 때에도 '가수'인 그는 가발을 쓰고 공연을 다니는 기회가 많았다. 제대한 후에도 공연을 다니면서 밤무대 행사도 마다하지 않고 갔다.

이평찬
▲이평찬 목사는 대학교 1학년인 1979년 젊은이의 가요제에 그룹 ‘라스트 포인트’의 리드싱어로 참여하여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앨범 표지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는 맨 왼쪽 사람이 이평찬 목사. ⓒ이평찬 목사
'찬양사역자' 이평찬으로 거듭나

세상에서 가수로서 잘나가는 그를 위해 70대인 어머니는 날마다 교회에서 새벽제단을 쌓았다. 스케줄이 바빠지면서 주일도 못 지키고 손님이 따라주는 술도 먹으면서 점점 교회와는 멀어지는 그에게 어머니는 "세상 무대에서 노래하지 말고, 주님을 찬양할 것"을 자꾸 권했다. 복음찬양가수도 드문 그 시절, 25세 때부터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그는 30세인 1990년에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시 첫 직장으로 63빌딩 ㈜대생기업에서 일한 그는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았으나, 밤에는 밤무대 공연을 다녔다. 밤마다 노래하며 직장 월급의 2배 이상을 벌었고, 모은 돈으로 28세 때 사업을 차렸지만 2년 만에 완전히 바닥을 쳤다. 결국엔 이전의 삶은 청산하고 직장과 교회 생활에 충실하기로 그는 마음먹었다. 이것은 어머니와 아내의 끊이지 않은 기도의 응답이었다. 이후 이 목사는 직장과 교회에서 찬양선교대회를 만들고, 교회 찬양단 솔리스트 등으로 헌신하며 이름이 알려져 교회, 기도원, 방송 출연 요청이 늘어났다. 5년 뒤인 1995년부터는 찬양사역과 방송사역에 매진하게 됐다. '찬양사역자' 이평찬으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이평찬
▲이평찬 목사는 매년 300~500명과 영국을 방문, 영국교회의 현실을 보고 한국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능력의 기도자로 회복시키는 ‘영국기도선교대’를 모집하며 참여하고 있다. ⓒ이평찬 목사

또한 기독교방송인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극동방송의 출연 요청을 계기로 이후 토요일마다 방영하는 교회탐방 프로그램 '우리교회 좋은교회'에서 7년 최장수 MC로 활동하게 되었고, 교계에 얼굴이 알려지면서 전국을 넘어서 전 세계로 집회를 다니게 되었다. 이후 CTS기독교TV에서 진행자로 활약했고, 사역을 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백석대 실천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병행하여 2006년 6월 6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5년 만인 2011년 우리교회 좋은교회의 이규영 원로목사가 은퇴하면서 담임목사로 취임해 목회를 시작했다.

2016년 1월부터는 GOODTV의 미니스트리본부 본부장으로 옮겨 사역하고 있다. 전국 교회를 탐방하며 목회자, 성도와 교회의 자랑거리 등을 소개하는 '미션 X파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교회 홍보영상을 제작, 지원하고 있으며,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방송으로 기도해주는 '능력의 기도' 프로그램의 진행자 섭외 및 전국 순회집회 등도 하고 있다. 매년 300~500명과 영국을 방문, 영국교회의 현실을 보고 한국과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능력의 기도자로 회복시키는 '영국기도선교대'에 모집하며 참여하고 있다. 특히 주말에도 예배를 드리지 않고, 교회 건물은 박물관, 술집, 이슬람사원 등으로 팔리는 영국교회를 보고 와서 한국교회의 미래를 생각하고, 예배 회복을 꿈꾸는 영국기도선교대 프로그램은 이미 2017년 6월 17일부터 7월 6일까지 일정에 250명(정원 300명)이 신청한 인기 프로그램이다. 영국 현지교회에서 숙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비용도 저렴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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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염소은행 설립 사역에 참여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한 이평찬 목사. ⓒ이평찬 목사

GOODTV 미니스트리본부는 글로벌청소년나눔운동 GYN과 함께 아프리카 염소은행 설립 사역도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는 우간다, 르완다를 방문해 선교사들이 소개해 준 크리스천 빈곤가정들에 어린 암염소를 선물해 주었다. 염소 한 마리는 빈곤 가정의 경제를 살리고 자녀 교육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염소가 새끼를 낳으면 또 다른 크리스천 가정에 분양도 가능하게 했다. 우간다, 르완다에는 지금까지 총 450여 마리의 염소를 심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