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웅
▲정일웅 박사
6. 코메니우스 이후의 형제연합교회의 유산과 오늘


코메니우스가 죽고 난 이후, 유감스럽게도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은 그 누구에게도 계승되지 못했다. 실제로 형제연합교회는 유럽전역으로 흩어진 주님의 백성으로 디아스포라의 주인공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1700년경에는 폴란드 리사(Lisa)에서마저도 형제연합교회의 예배들은 모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다만 폴란드 지역에 그 형제연합교회 지체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그러나 폴란드지역의 가톨릭교회의 현저한 박해로 인하여, 그들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인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그리고 폴란드 지역의 형제연합교회의 장로(감독)로는 1699-1741년까지 그 당시 베르린의 왕궁설교가로 활동하였던, 코메니우스의 외손자인 다니엘 에른스트 야블론스키(Daniel Ernst Jablon ski)가 이어받았다. 1768년에 이르러 종교의 자유가 폴란드에서 인정된 이후에, 그 당시 폴란드에 약 10개의 형제연합교회에 속한 지(支) 교회들이 있었으며, 이들 교회는 모두 폴란드 말과 독일 말을 사용하는 교회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신앙고백으로는 개혁파교회(칼빈파)의 신앙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엣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을 견지하기도 하였는데, 평생직인 장로선출이라든가, 16세기의 것을 계승하고 있는 감독의 목사직 안수 등이 시행되는 일들에서였던 것이다.

헝가리에서 1671년 종교박해가 진행되던 동안에 마지막 남았던 형제연합교회들은 모두 붕괴되었다. 그 가운데 흩어진 형제들은 슬로바키아 백성들 가운데 더 많이 확산되었던 루터파교회에 속하거나, 또는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인 북쪽 헝가리 지역에 특히 모라비아 국경선을 따라 정착했거나, 헝가리에 있는 개혁파교회에 속하여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리고 보헤미아-모라비아 지역에서는 30년 종교전쟁이래로 암흑의 시대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하는데, 이러한 어두운 암흑기의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모라비아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의 영향 하에서 '복음의 숨겨진 씨앗'들로 불리는 이들이 곳곳에 흩어져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숨겨진 씨앗들'에서처럼, 새로운 형제연합교회의 생명은 외국으로 망명한 자들에 의한 교회공동체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특히, 독일 루터파 경건주의운동의 본산지인 할레(Halle)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경건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었던 필립 야콥 스페너(Ph.J.Spener)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H. Francke)등은 코메니우스의 글(문서)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코메니우스의 문서를 통하여 그들 신앙운동의 선행자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이미 굳어진 독일프로테스탄트의 루터정통주의교회에 대립하여 옛 형제연합의 신앙모범을 따라 그들의 영적인 돌봄에 대한 위대한 가치를 다시 붙잡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설교들은 신학적인 논쟁 없이 전적으로 교회적인 모습으로 바뀌어졌고, 신학공부는 지역교회에서 목사후보자들의 미래적인 목회실천행위에서 시행되는 방향으로 정착되었다. 즉 신학공부는 그 목적이 교회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공적인 주일예배 외에 빈번히 작은 성경공부모임이 이루어졌고, 가정기도회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앙교리의 가르침에 대한 순수한 사색은 가능한 멀리하게 하고, 일상의 삶에서 신앙의 더 많은 결실(경험)들이 나타나게 되며,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임재가 경험되도록 하는 일들이 강조되었다. 역시 거기에는 세상에 대한 금욕적인 형태의 폐쇄적인 신앙적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다른 한 편으로는 이웃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적인 책임으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천의식이 자라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선교(복음전도)에 대한 의무감이 강하게 강조되었던 모습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적인 모습은 모라비아 동쪽지역에서 일어난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에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독일국적을 가진 자들로서 가톨릭으로부터 개종한 자들이었다. 후에 크리스천 다비드(Zimmermann Christian David)라는 인물이 1722년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백작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개종자들이 백작의 땅인 '헤른후트'(Herrnhut)로 이주하여 거기서 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 요청을 진젠도르프가 기꺼이 수용하여, 허락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모라비아의 신앙인들이 대거 헤른후트로 이주해 오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알려진 대로 그들 가운데 얼마는 이전에 코메니우스가 풀넥(Fulneck)에서 목회할 때, 함께 했던 그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이었다. 그 때문에 엣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은 그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헤른후트(Hernnhut)가 하나의 새로운 형제교회로 형성되는 일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 당시 분위기에서 그들은 특히 모라비아 동편지역의 라이토미슐(Leitomischl)이란 곳에서 계속적으로 이주해 오는 자들을 도우게 되었으며, 헤른후트의 신앙공동체는 점점 더 큰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후에 진젠도르프는 거대한 선교적이며 교회연합의 목표를 가지고, 헤른후트의 형제교회가 그 지역 '루터파교회'(Landeskirche)의 지체로 동화되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라비아 인들은 다른 이주자들과 합세하여 계속적으로 그들 이전의 모라비아-형제연합교회와 연결된 비슷한 교회를 형성시켜, 역사를 이어가려고 했는데, 마침내 그들 자체의 교회법과 감독을 가진 자립적인 교회조직체로의 발전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거기서 옛 형제연합교회가 지니고 있었던 신앙적인 모범과 신학적인 특성에 따라 그들 교회와 교회지체들의 삶을 보호해야 하는 평신도장로의 직무가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교회훈육이 도입되었고, 형제연합교회가 수년 동안 통상적으로 박해의 시대에도 한 번도 변경하지 않고 유지했던 간단한 형식을 갖춘 그 예배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엣 형제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경건의 형태들이 진젠도르프와 독일 경건주의적인 영향 아래에서 새롭게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헤른후트 교회에 새로운 경건의 형태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 형제교회(Bruedergemeinde)는 영국에서도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현저히 모라비아에 뿌리를 둔 새로운 이주자들의 모습과 함께 통상 모라비안 형제들로 불리게 된 사람들이 그곳으로 이주하면서 그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사도직의 계승으로 이해된 감독직이 큰 인상을 남기게 되는데, 폴란드의 형제연합교회의 장로는 다니엘 에른스트 야불론스키(Daniel Ernst Jablonsky)가 안수를 받고, 감독직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1735년에는 차우크텔러(Zauchteler)에서 이주해 온, 뉘츠만(David Nitschmann)이 또한 감독이 되었으며, 그 후에는 2년간 진젠도르프 백작이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새로워진 형제교회는 이웃사랑과 어린이교육과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역시 용감한 증언자의 의무를 수행하는 봉사활동을 지속하였고, 그들은 역시 이러한 실천적인 기독교의 모습에다 큰 가치를 두고 있었었던 것이다.

그 이래로 헤른후트의 형제교회는 수십 년간 전 세계를 향한 해외선교에 열중하게 된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이미 그 시대에 그의 글들을 통하여 해외선교에 대한 길을 보여 잘 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선교정신이 진젠도르프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가난한 이방인들을 돕는 선교를 헤른후트의 진젠도르프 신앙앙공동체는 지속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역사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처음으로 세계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이 헤른후트의 진젠도르프신앙공동체가 행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러한 작업의 주된 부분을 특히 모라비아에서 탈출해 온 형제들이 감당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벌써 1733년에 크리스천 다비드는 그린란드(Groenland)의 선교사로 파송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같은 시기에 후에 감독이 되었던 다비드 니취만도 덴마크의 서인도에 있는 성 토마스 섬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다. 그  후에 진제도르프의 신앙공동체인 형제교회는 선교지역을 점점 더 확대하게 되었는데, 아프리카 지역의 자마이카, 수리남 등, 여러 나라로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1734년에는 북아메리카 지역인 조지아주와 펜실바니아 등에 선교과제실현과 결부된 식민정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다비드 니취만(D.Nitschmann)은 풀넥의 차크텔에서 이주해 형제로 선교열정을 그 자녀들이 이어받아, 북미지역의 인디안 선교에도 크게 헌신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적인 선교 역사에서 칼 파칼트(Karl Pa'calt)는 출생이 체코인으로 불렸던 사람으로, 남아프리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가 활동했던 지역에다 '파칼도르프'(Pacaldorp)란 마을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