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역 초기에 산에 오르셔서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말씀을 가르친 내용입니다. 특히 본문은 산에 오르셔서 8복을 가르친 내용인데, 오늘 그중에 첫 번째 것,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생각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먼저 본문 3절을 읽어봅시다. 다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여기 "천국"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마태복음은 첫 독자들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란 말을 잘 안 쓴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계명을 따라서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이란 말이 나오면 '주'라는 말로 고쳐서 쓰고 아주 신중했는데,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도 '하늘나라', 하늘 '천'자에 나라 '국'자로 바꾸어서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만 '하늘나라', '천국'이란 말로 쓰고 마가나 누가복음은 첫 독자들이 다 헬라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여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누가 한 말씀이지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 분명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지요? 부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심령이 부하거나 넉넉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란 말이 없고 그냥 "가난한 자"라고 합니다. 여기 "가난"은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해야 할 정도의 가난'을 뜻합니다.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자, 구걸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가난'을 좋아할 까닭이 없지요?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꼭 돈 문제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인종이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다 '부', '넉넉함'입니다. 물질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것을 다 원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넘치고 희망과 꿈이 넘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요? 돈을 잘 쓰고,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드는 사람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얼른 보면 가진 자가 움직이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가난한 자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부를 추구하고, 풍요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렇게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좋아하고 희망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 절망한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분명히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하시고,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부자가 복이 있다, 천국은 부자의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게 진리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기는 하지요? '가난하지 않으면 복이 없는가?' '부자는 그럼 복이 없다는 말인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자는 복이 없는 것인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부자는 천국이 주어지지 않는가? 우리가 얼른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지요? 부자도 교회를 잘 이루지 않습니까? 부자도 구원의 백성으로 살뿐 아니라 목숨을 다하여 능력 있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잘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여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잘 납득이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많이 생각할 만하지요? 

○가난 자체가 복인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 자체를 축복하셨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한 것처럼 그것이 영적이든 물질적이든 그 자체, 가난 자체를 축복하신 것인가? 성경 어디에서도 가난 자체를 복된 것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시편 72편을 배우면서도 '가난한 자'를 생각지 않았습니까? 거기 가난한 자는 '주님의 가난한 자'이지요? 즉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기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경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고 돈 벌 기회도 잃어버리고 가난하게 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자는 주님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경우니까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가난 자체를 옳다고 지지하신 경우는 없습니다. 가난 자체를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을 잘 보면 가난은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교회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가난을 '이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은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하나의 '현상'일 뿐입니다. 가난 자체가 이상적 상태가 아닙니다. 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잘 못 해석하여 가난한 것,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 그 자체를 미덕으로 말하는 자들이 꾀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무소유가 좋다고 하고 추구하는 사람이 많지요? 일면은 우리가 본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가난 자체가 복 받는 유일한 상태라면 부작용이 많지요? 가난이 복인데, 무슨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발전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과 역사는 완전히 정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해지기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지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어느 누구든지 노력을 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됩니다. 배우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비참과 공포와 절망에 계속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되지요.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옳다고 할 수 없지요?

사실 가난을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신자이든 다 자기 포기에서 나오는 체념, 절규와 같은 것이지, 그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쥘 수 없는, 잠시 가져도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을 안 시한부 인생의 한탄이 곧 가난입니다. 그러니까 가난 자체를 복된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큰 잘못이지요? 성경을 잘못 본 사람들은 '봐라, 예수님도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면서 소유 자체를 죄악시 하고 돈 많은 사람을 무슨 죄인 취급을 하고, 그 가진 자들의 것을 빼앗아서 못 가진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곧 사랑이고, 천국이다,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혹은 더러는 자발적으로 소유를 버리고 가난을 선택한 자들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구걸하면서 전국을 유람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조용히 그냥 시골로 가서 아무런 욕심 없이 살겠다는 사람도 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 자체를 축복하시고, 또 부와 물질 자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을 왜 복되다 하셨는가?

가난은 그 자체가 '이상'이 아니라 영적 사회적 '현상'입니다. 그런데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가난'이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먹을 것, 입을 것을 구걸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상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가난 때문에 어떤 것을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것, 그 때문에 가난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난 때문에 그 자체로 족하고 살지 않고 다른 무엇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복된 것을 구하러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무엇을 구걸하러 다닌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좀 보지요.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까닭은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개역 성경으로 읽으면 잘 안 살아나는데, 원어를 보면 이 구절 두 번째 연에서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왜냐하면(οτι,)'이란 말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헬라어엔 '호티', '왜냐하면'이란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하면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 강조점은 '가난'이 아니지요? '천국', '하나님 나라'가 강조점입니다. 즉 가난한 것, 혹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서술문으로 번역했는데, 그래서 잘못하면 기원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편 1편의 '복 있는 사람은...' 하고 시작하는 것도 기원이 아니라고 했지요? 여기도 서술문이 아니고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 하고 감탄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이여!' 하고 탄성을 지르고 선언합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인가?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역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을 복되다고 하신 까닭을 조금은 알 수 있지요? 가난이 '동기'가 되어서, 가난이 '시발점'이 되어서 무엇을 구걸하는데, 무엇을 구걸하느냐? '천국'을 구걸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이에 빠진 것이 있는데, 무엇이지요? 가난이 시발점이 되어서 무엇을 구걸하는데 천국을 구걸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뭐가 있지요? 무엇이 빠져 있지요? 여기... 예수님이 빠져 있잖아요.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요. 가난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서 찾다가, 찾다가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니까 천국이 자기 것이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것이 복되었지요? 우리도 언제나 가난해야 천국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의 배경과 상황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잘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좀 더 알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이 빠져버리면, 성경은 특히 그런데요, 성경은 어떤 상황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그 상황을 빼버리면 말만 남지요? 본래 의도가 달아나지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사역 초기입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기 시작하면서 마태복음 4:17~22에서 먼저 네 사람의 제자를 부르신 사건을 소개합니다. 최초에 네 명의 제자를 데리시고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약한 사람들과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일이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 그리고 요단강 건너편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마태는 이 광경을 4:25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무리가 좇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셔서 8복의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의 사역은 절정에 달해 있었는데, 그러나 일하신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 고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천국 복음(4:23)을 자세하게 가르치려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절인데요, 보시지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으로 오르신 이유는 제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설교하시기 위함입니다. 여기 제자들은 열두 제자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는 10:1 이전까지는 열두 제자를 언급하지 않는데, 그렇게 보면 여기 "제자들"은 12명이 아니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따르기로 소원한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다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가르친 대상은 "무리"가 아닌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좀 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으시고 제자들은 예수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평평한 곳을 골라서 앉았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입을 여심으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설교가 7장에서 마치는데, 설교가 끝날 때까지 제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습니다. 설교가 다 끝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권위적인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서 탄성을 지릅니다. 그것이 7장 마지막 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8:1에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신다고 하고, 제자들과 무리들이 주님을 따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5:1에서 예수님이 산에 오르셔서 천국 복음을 설교하시고 그리고 8:1에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럼 5:1~8:1 그 사이는 무엇일까요? 산상수훈이지요? 산에서 말씀을 가르쳤다고 하여 '산상수훈'(山上垂訓)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보훈'(寶訓)은 보배를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누가 복된 자인가?

여기 산상수훈에서 첫 말씀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다!' 하십니다. 여기 '천국이 저희 것이다' 하신 말씀을 하셨는데, 천국이 누구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거지요? 여기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신 것인가요? 아니지요? '마음의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시고, '천국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 중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만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신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이지요? 나는 회원 가입했으니까 끝, 나는 천국 백성이야, 하고 끝, 그런 것 아니지요? 여러분들 중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 선언을 하시고 그 복음의 내용을 지금 산에서 현재 천국이 왔다고 하십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선언이 지금 산상설교에서 현재형으로 바뀝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미래의 것으로 남아 있는데, 영광의 나라, 미래 것으로 남아 있는데 그러나 천국은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함께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고 종점은 예수님 다시 오실 때지요? 이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여기 산에서 설교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왕의 선포입니다. 땅에 오신 천국 왕의 '왕국선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에게 가져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셔서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하고 선언하십니다.

그럼 천국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지요? 거기 모인 무리를 생각한다면 어떻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아는 자라야 하지요? '아, 저분이 천국을 가져온 왕이시다!' 하고 믿는 자들이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였는데, 거기에는 호기심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모여 들기도 하고 굶주림을 채우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 동기를 가지고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 도무지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현실을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다만 하나님을 바라는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이 가르친 말씀에서 해답을 찾았을 것입니다. '아, 저분이 바로 구원자다!' 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이미 천국을 발견하기 시작한 자도 있습니다. 천국의 왕이 오셔서 자신을 따르며 하나님의 도움을 고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 나라는 누가 소유하느냐? 천국은 누가 소유하느냐?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지요. 오늘날 똑같습니다. 신자로 세례 받고 언약 백성이 되었으니까 끝. 그렇지 않지요? 언약민이 영원한 영광인가요? 언약민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내일도 우리는 천국을 소유해야 합니다. 항상 천국을 소유해야 하지 오늘 소유했으니까 내일 끝이 아니지요?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외의 방법으로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결국 본문의 예수님의 축복 선언은 가난한 자들, 하나님 외에는 바랄 수 없는 텅 빈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채워주신다는 선언입니다. 복된 사람은 결과적으로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왔으나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록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에게 나오지 않거나 혹은 예수님에게 나왔어도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복된 사람이 아니지요? 산상 설교는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의 자격과 정체와 권한 또 의무를 규정하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사람,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왕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천국을 소유합니다.

○평지설교의 배경과 상황

여기 산상 설교와는 좀 달리 누가복음 6장에서 한 설교는 좀 다릅니다. 누가복음에서 설교가 시작되는 장소는 산이 아니고 평지에서 하는데, 평지 설교가 시작되는 시점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한창 진행 중일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제자를 부르신 사건 후에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신 사건이 5장에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 6:12에서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신 후 열두 사도를 임명하십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서시자 "제자들이 허다한 무리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와 있습니다(6:17). 그때 예수님은 "(20)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평지설교를 시작하십니다. 산상설교 때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설교가 끝날 때가지 남아 있지만, 평지설교는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하십니다. 여기 "너희"는 제자들인데, 즉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예수님 사역 초기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온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귀신들린 사람들, 억압당하고 배고파하고 우는 사람들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멸시의 대상이었던 세리들과 죄인들도 있었습니다(눅 5:29). 이 예수님을 따르는 가난한 사람들이 잠시 후에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고향과 가족과 직업을 떠날 것을 요청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정도 삶의 수단도 다 뒤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시고 '복 있는 사람'이라고 설교하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주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되다, 하신 이유는 가난 때문이 아니지요? 배고파하고 우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 가난 때문에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복되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천국이 주어지고, 그래서 복된 자들입니다. 

○천국은 누구에게 주어지느냐? 

그러므로 천국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외에는 누구에게도 천국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이외의 방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들의 것이 되는 것은 그 가난 때문에 아무 것도, 자신까지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실현됩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섬으로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자로 불리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왕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다 밝혀졌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가난한 상태나 마음의 가난 자체가 아니고, 그런 가난 때문에 자극이 되어서 예수님에게 나아오게 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줄곧 따르게 된 자들에게 선언하신 축복의 말씀입니다. 본문 3절의 강조점은 결국 앞에 '가난'이 아니고 뒤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복이지요? 그러니까 결국 복은 '천국'지요? 무엇이 복입니까? 하나님 나라이지요? 구원이 복입니다. 

○왜 가난한 자를 말씀하셨는가?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가난한 자는 복되다!'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냥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복이다' 하시면 될 텐데 말입니다. 왜 '가난한 자'란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첫 회중들이 대개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되다!' 하시고 '왜냐하면 가난할지라도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이라는 위로를 하신 것입니다. 구원받기 때문에 복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업신여김을 받고 천대꾸러기로 밀려나도 절망하지 말아라! 오히려 복이다! 구원받지 않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때 예수님의 말귀를 알아들었던 자들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너희들 나를 좇기 때문에 가난하냐? 낙망하지 말아라! 복되다! 천국은 너희들 것이다!' 하고 위로하십니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럼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가난'이란 말을 빼놓고 읽어야 할까요?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당시 청중들만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고 오고 오는 모든 당신의 제자들, 성도를 생각하시고 '가난한 자'란 말씀을 넣어서 하셨습니다. 특히 주님의 교회가 이 말씀을 설교할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말씀으로 들려주십니다. 현재 들려주십니다. '가난한 자를 빼지 말고 다 읽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가난함'도 생각해야지요? 사람이 가난한 심정이 되지 못하면 무엇을 찾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으면 먹을 것을 찾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이 가난하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면 무엇을 찾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잘난 멋에 살고 아주 교만하여 예수님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 하신 것은 그 가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가난하다는 인식을 하지 않았으면 실제로 가난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찾아오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가난한 사람이다', 하는 인식이 중요하지요? 가난하다는 인식이 없으면, '나는 배가 부르다' 하는 사람은 족하고 살지, 무엇을 의지할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항상 나는 족하지 않다, 비어 있다, 하는 인식을 해야 하지요? 그래야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찾고 주님을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 자신도 만족히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가난한 상태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살아가는데, 무엇이 족합니까? 우리를 신뢰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존재입니다. 재물이 있든지 없든지, 권세가 있든지 없든지, 명예가 있든지 없든지, 많이 배우든 적게 배우든 자신이 지금 아무 것도 없다는, 가난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빈 존재다', 하는 것을 인식하는 자가 늘 주님을 소유하고 주님 나라를 소유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에 믿을 때 가난한 마음이어서, 즉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망하는 존재다, 가난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인식을 했기 때문에 주님을 믿었고 현재 주님의 백성이 되어 살아가지요?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을 때 초심으로 돌아가서, 현재도, 아니 초심이 아닌 점점 발전된 현재 위치에서 정말 주님이 아니면 난 존재가치가 없다, 하고 고백하는 자에게 천국이 소유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잘 생각해야지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면 '족하다' 하고 살아갈 수 있잖아요. 지금도 우리 스스로는 족하지 않지요? 그리스도 때문에 족함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나 스스로는 족하지 않지요? 나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나의 것은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항상 의식해야 하지요? '나는 무가치한 존재다' 하는 것을 늘 의식하는 자가 늘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의지하느냐? 이 문제이지요? 오늘 우리에게는 이 문제입니다. 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의지하느냐? 아니면 나를 의지하느냐? 이 세상이냐? 이 문제에서 천국을 소유하느냐? 못하느냐? 갈리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부족함이 없는 부자처럼 살고 있지 않는지? 아무 것도 필요 없다, 하고 늘 그렇게 살고 있지 않는지, 자기 힘으로 그냥 사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살펴야지요? 언제나 가난한 심정, 현실적으로도 가난하게 살고자 하는 것이 좋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그저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뭐 별로 있지도 않으면서 가득하게 있는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그런 자는 넘어집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했습니다. 늘 '부족하다, 주님이 없으면 나는 가난하다', 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천국이 언제나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천국을 늘 소유하면서 앞으로 영광의 나라에 입성하게 될 것입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오늘도 저의 심정을 바로 직시할 수 있도록 하셔서, 참으로 가난한 저희 실체를 늘 알고 살게 하심으로 천국 백성으로 주님 안에서 살게 하시옵나이다. 주님 안에서 삶으로 저희는 하늘 백성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주님의 상속자들이 되어 족하고 늘 기뻐하면서 살 수 있게 되옵나이다. 하오나 저희 스스로는 역시 족할 것이 전혀 없고 춥고 배고프고 가난한 존재이옵나이다. 물질이 많아도 권력이 있어도 동지들이 많을지라도 주님이 없는 데서는 그것이 비참한 존재이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실체인 것을 인식하고 늘 가난한 우리 존재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의지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자에게 항상 천국이 주어지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저희 자신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주제넘게 살아가는 데서 벗어나게 하여 주시고, 주님께서 저희를 항상 다스려 주셔서 늘 가난한 저희 실체를 바로 알고 주님만 의지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