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출판기념회에서 저자가 일본어판 해당 도서를 소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출판기념회가 8일 오후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개최됐다.

지난 1월 국내에서 출간된 이 책은 일본 개신교 선교 150주년을 맞는 해(2009년)를 맞아 나왔으며, 유명한 천주교 선교사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전의 선교 가능성부터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를 다루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2000년대까지의 일본 개신교 교회 역사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저자 나카무라 사토시(中村敏) 니가타성서학원 원장이 방한해 강연을 전했으며, 책 번역자인 박창수 니가타성서학원 전임교사가 통역을 맡았다.

나카무라 원장은 책과 이날 강연에서 "일본 개신교 선교 역사가 짧지 않음에도, 왜 일본 기독교인은 인구 대비 1퍼센트의 벽을 넘지 못하는 소수자에 그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기독교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며 "따라서 서구 선교사들은 어떤 복음을 전했고 일본인들은 이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배움으로써, 나아가 어떻게 하면 일본에서 선교가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돼 교회가 성장할 것인지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 역사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시선이 가게 됐다. 한국은 일본보다 복음이 늦게 들어왔지만 이렇게 부흥하고 큰 교회가 많으니, 일본 선교에 무슨 잘못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라며 "그래서 역사를 통해 배우고 싶었고,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단순한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 선교가 그 배경에 있었다"고 전했다.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왼쪽부터) 번역자 박창수 교사와 저자 나카무라 사토시 원장. ⓒ이대웅 기자
이에 대해선 한-일 개신교 선교 전래 과정에서의 차이점을 짚었다. 그는 "일본에 개신교가 전해졌을 때는 에도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을 통해 전환이 이뤄지던 시점으로,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에게 '복음전도자'라는 정체성보다는 '서양 문명을 소개하고 영어를 가르치며 개화를 돕는 이들'로 비쳤던 것 같다"고 했다.

나카무라 원장은 "서양 선교사들이 영학(英學) 등 서양 문물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나름 효과를 거뒀고 교육과 문화 면에서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면서도 "그 과정에서 평범한 일본인들에게 기독교는 '지식층의 종교', '서양의 종교', '문턱이 높은 종교'라는 인식을 줬고 전도도 '도시 지식인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일반인들과 멀어지면서 지금까지도 성도 수가 전 국민의 1%를 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선교사들 주변에 몰려든 이들은 막부가 무너지면서 권력을 잃고 몰락한 사무라이의 자손 '사족(士族)'들로, 이를 통해 다시 자신의 가문과 함께 신생 일본의 토대가 될 만한 것들을 발견하고자 했다"며 "이들은 일본어 성서나 기독교 서적이 없는 단계에서, 중국에서 수입한 한역(漢譯) 성서나 기독교 서적을 전도나 교육에 사용했는데, 당시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지식층인 사족 계급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

나카무라 사토시 원장은 "반면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고,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철저히 활용하면서 일반 대중과 근로자들, 그리고 여성과 특히 어머니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당시 평민들의 언어였던 '한글'을 중시했다"며 "따라서 이화여대 등 여성을 위한 미션스쿨들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처음부터 철저히 대중에 초점을 맞춰 전도했기에 혹독한 일제 통치기에도 국민들과 운명을 함께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나카무라 사토시 원장. ⓒ이대웅 기자
'교회와 국가의 관계'도 중요한 이유였다. 그에 따르면 메이지유신 후 시작된 '천황제'는 크리스천이 되는 일을 '국가 방침과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 특히 '3명만 같은 의견을 표시해도 나머지 1명은 따라가야 할 정도'로 시류에 순응하고 대세를 따르는 것을 중요시하는 '동조압력' 문화의 일본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100명 중 99명과 다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결단을 요구받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본에서는 한국에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오던 1880년대에 일시적인 '부흥'이 일어나, 성도 수가 1885년 1만 1천 명이던 것이 5년만에 3만 4천명으로 2배 이상 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부흥의 불길은 우치무라 간조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최경례(最敬禮·가장 존경하는 뜻으로 하는 정중한 경례)'를 하지 않다 경질되는 '불경사건'이 상징하듯, 천황제가 확립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여기에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은 혼란을 더해가면서 전도는 '부진'에 빠지게 됐다.

뿐만 아니라 전후, 즉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연합군(미군)이 주둔하면서 다시 한 번 '기독교 붐'이 일어났다. 크리스천이 총리에 올랐고, 동경대 총장에 연이어 크리스천이 임명됐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들어찼고, 지역마다 미션스쿨이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빠져나가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에 대해 나카무라 교수는 "결국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듯 '돌밭'에 뿌린 씨였기에 금방 말라 죽고 말았다"며 "신앙에 깊은 뿌리가 없었고, 일본인들에 의해 일어난 기도와 신앙 운동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도 한국에서 일어났던 1907년 평양대부흥처럼 철저한 회개와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도 했다.

일본 기독교 선교의 역사
나카무라 사토시 교수는 마지막으로 현재의 일본에 우려를 표시했다. "일본은 점점 우경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달 <흔들리는 시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부제는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으며 우리는 어디에 설 것인가'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교육과 언론 등 여러 분야에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1920-30년대로 후퇴하는 것 같다. 그때 일본 교회는 국가와 타협했다.'"

그는 이 책에서 '주기철 목사'를 대안으로 거론했다고 한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현실 가운데, 파수꾼처럼 시대를 향해 외치고 지켜낼 수 있는 모델로 주기철 목사를 제시하고, 일본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앞으로도 일본 사회가 잘못된 길로 갈 때마다 바른 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들께도 배우고, 제가 배운 점들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