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철 목사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설교 :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날짜 : 2016년 7월 24일
본문 : 욘 4:4~11

하나님은 요나가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과 요나의 영적 씨름이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생각을 마지막까지 바꾸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생각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두 생각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이면 누구나, 인종이나 민족, 나이, 성별과 상관없이 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이고 요나를 움직이기 위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활용하여 요나를 설득하십니다. 요나서에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요나를 가르치신 기록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 (요나 1:4)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 (요나 1:17)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요나 2:10)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 (요나 4:6)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요나 4:7)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 (요나 4:8)

하나님은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시며 요나의 인생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요나의 오만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게 만들었습니다.

요나서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요나가 이 글을 남긴 것을 보면, 그는 자신의 삶 곳곳에 하나님의 손길이 묻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나가 도망을 가려 했을 때도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요나가 화를 내며 하나님께 대항했을 때도 하나님은 참으셨고, 도리어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사건을 통해서, 때로는 삶을 뒤엎을 만한 요란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그 방법과 모습은 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내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했던 신앙이 우리를 이렇게 모이게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왜 요나를 내팽개치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요나를 귀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거룩한 분이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 정의로운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사실에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면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면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이 마음으로부터 회개하면 용서하신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공의와 정의보다 훨씬 더 크다.’ 요나가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단지 그는 이것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의 편협함과 오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자 요나는 다시 분노했습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에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정말 니느웨 백성을 용서하시는지 확인하기 위해 뙤약볕 아래 앉아 니느웨 성을 지켜보았습니다. 초막을 지었지만, 너무 엉성하여 뙤약볕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요나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주십니다. 바로 박넝쿨입니다. 요나의 머리가 뙤약볕에 상하지 않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 4:6)

하나님의 작은 선물에 요나는 기뻤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헤아리고 계시는구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하는 안도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벌레가 박넝쿨을 갉아먹어 박넝쿨이 시든 것이 아닙니까? 시든 박넝쿨을 보니 요나는 다시 화가 났습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요나 4:8)

하나님은 요나가 있는 곳에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셨고, 요나는 화가 잔뜩 나서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나님을 향해서 터트렸습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이런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것도 못 봐 주시는 거예요? 너무하신 것 아니에요? 제가 이 정도의 복도 누릴 수가 없나요? 사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 제가 위로받고 있는 이 박넝쿨 하나를 시들게 하십니까? 차라리 제가 죽도록 내버려 두세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시고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질책이나 야단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물음이었습니다. 요나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 (요나 4:9)

굉장한 말이 아닙니까? 겨우 박넝쿨 때문에 화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나의 모습은, 그가 영적 침체에 빠진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영적 침체와 영적 분노는 자기연민, 자기모멸을 동반합니다.

하나님의 이해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요나를 괴롭혔습니다.

영적 침체를 경험하는 사람은 본래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뜨겁게 불타는 비전을 가졌던 사람들이 목표를 잃어버렸을 때, 영적 침체에 빠지고 영적 분노를 경험하게 됩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하나님이 도우시면 감사하고 안 도우시면 내가 하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영적 침체나 영적 분노를 경험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요나는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확인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사명감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무기력과 절망 속에서 신음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안 알아주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어서 기분은 나빠도 살아가는 데 크게 지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나 친구처럼 내가 사랑하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나를 안 알아주면 화가 치밀 뿐만 아니라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참을 수는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는 것이니 알아주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에게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의 괴로움입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느낄 때, 우리는 영적 침체와 영적 분노에 빠지게 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에게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모세도,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물리쳤던 용맹한 선지자 엘리야도 영적인 침체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욥의 이야기를 아시죠? 욥은 어느 날 모든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재산을 잃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몸에는 종기가 나서 괴로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내는 “당신을 이렇게 만든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라”라고 말하며 떠났습니다. 욥은 그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욥이 견딜 수 없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라지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자신을 외면하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는 물음을 하나님 앞에 토해 냈습니다. 이것이 욥기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박넝쿨을 통해 요나가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 요나의 마음을 움직이시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요나의 생각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려 주시며 요나를 설득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요나 4:10)

“네가 이 박넝쿨이 자라는 데 수고한 것이 없지 않느냐? 그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시든 박넝쿨인데도 좋아하고 아끼지 않았느냐?” 요나는 속으로 대답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제가 이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뙤약볕을 가려 주니 얼마나 소중합니까? 제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 정도는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 4:11)

11절은 요나서의 마지막 절임과 동시에 요나서 전체에 이르는 질문이며 대답입니다. “요나야, 네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사라지는 박넝쿨을 아끼지 않았느냐. 나도 그렇다. 네가 멸망하기를 원하는 이 니느웨 성에는 1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사람들과 박넝쿨이 비교가 되느냐? 여기에는 짐승도 많이 있다. 너는 하룻밤에 났다가 사라지는 박넝쿨도 아꼈는데, 내가 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고 이들에게 생명을 주려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 네 생각이 옳으냐? 아니면 내 생각이 옳으냐?”

놀랍게도 이 질문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하나님, 치유의 하나님이 아니냐? 나는 회복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냐? 나는 인간을 죽이고 파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고 사랑하고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이 아니냐? 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만민이 나의 살아있음을 알고 내게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좋아하셨다면, 요나를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에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내 속에 있는 죄악을 나는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움과 분노를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 새로운 일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언제 치유가 일어날까요? 우리 안에 응어리진 것들이 언제 풀어질까요? 어떻게 해야 내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사라질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토해 낼 때, 나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이 풀어 주십니다. 내 안의 질병과 나를 낙심하게 하는 불안과 탄식을 하나님이 사라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앞에 오기만 해라.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 아니, 네가 내 앞에 오기 전부터 나는 너를 지켜보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힘들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고 하나님은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의 은총을 경험하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소식을 갖고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선언하며 살도록 우리를 세우십니다. 바로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나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귀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생명의 축복,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축복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제가 주님 앞에 제 자신을 열겠습니다. 제 안에 오셔서 저와 동행해 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제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새롭게 결단하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