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성 목사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설교 :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
날짜 : 2016년 7월 24일
본문 : 시 79:1-13

시 79:1 하나님, 이방 나라들이 주님의 땅으로 들어와서,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었습니다.
2 그들이 주님의 종들의 주검을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먹이로 내주고, 주님의 성도들의 살을 들짐승에게 먹이로 내주고,
3 사람들의 피가 물같이 흘러 예루살렘 사면에 넘치게 하였건만, 희생당한 이들을 묻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4 우리는 이웃에게 조소거리가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5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여워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까?
6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 이방인들에게나 주님의 진노하심을 쏟아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저 나라들 위에 쏟아 부어 주십시오.
7 그들은 야곱을 집어삼키고, 그가 사는 곳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8 우리 조상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어서 빨리 우리를 영접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아주 비천하게 되었습니다.
9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10 어찌 이방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서 비웃게 버려두시겠습니까? 주님의 종들이 흘린 피를 주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11 갇힌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주님께서 들어 주십시오. 죽게 된 사람들을 주님의 능하신 팔로 살려 주십시오.
12 주님, 우리 이웃 나라들이 주님을 모독한 그 모독을 그들의 품에다가 일곱 배로 갚아 주십시오.
13 그 때에 주님의 백성,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인 우리가, 주님께 영원히 감사를 드리렵니다. 대대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목사 한 분이 시골교회를 담임하였을 때, 고난주간에 전도대상자인 분 한분을 데리고 예수님의 고난당하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유명한 ‘THE PASSION OF CHRIST’ 라는 영화를 보러 갔었답니다. 그 영화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영화를 다 보고 말하더랍니다. "사람 목숨 참 질기네. 사람이 쉽게 죽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을까?’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 자체가 대단한 믿음입니다. 누구나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 믿음에서 시련과 유혹을 이길 믿음으로 자라야 합니다.

시 79편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징계로 이방 민족에게 무너졌을 때 기록된 시편입니다. 1-4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이방인들이 난입하여 성전을 더럽히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하였습니다.
시 79:1 하나님, 이방 나라들이 주님의 땅으로 들어와서,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죽었으나 시체를 묻어줄 사람이 없어서 새와 들짐승들이 먹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주위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사람들이 조롱하였습니다.
이런 일을 목격하는 시편 기자는 참으로 비참했으며 두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드러납니다.

우리는 밤에 혼자 있다고 무섭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 때는 밤에 집에 혼자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그 정도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밤도 두렵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었으니 앞이 캄캄할 정도로 어려움이 닥치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를 만나도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믿음도 그처럼 어린아이 믿음이 아니어야 합니다. 평소에는 자신의 믿음이 어린아이의 믿음인지 어른의 믿음인지 잘 모릅니다. 두려운 밤이 닥칠 때 드러나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기도합니다.
:5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여워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까?
성전도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 당신의 백성도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이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불순종하였던 죄 때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 징계를 거두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결국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배후에는 이런 간절한 회개와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도도 믿음의 증거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이렇게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기도 속에는 어린아이의 믿음도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들이 죄를 지었지만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이방인들은 아예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니 더 나쁘지 않느냐고 호소합니다.

:6 주님을 알지 못하는 저 이방인들에게나 주님의 진노하심을 쏟아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저 나라들 위에 쏟아 부어 주십시오.
:10 어찌 이방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서 비웃게 버려두시겠습니까?
:12 주님, 우리 이웃 나라들이 주님을 모독한 그 모독을 그들의 품에다가 일곱 배로 갚아 주십시오.

그의 기도 속에는 원망도 두려움도 가득합니다.
13 그 때에 주님의 백성,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인 우리가, 주님께 영원히 감사를 드리렵니다. 대대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다 멸해주실 때, 감사하고 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감사하고 찬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렸던 나라들과 조롱하던 주위 나라들은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모든 것을 보지 못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그의 마음은 눈앞에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로 인하여 몸서리칠 뿐입니다. 그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간의 한 부분만 보니 하나님이 이해되지도 않았고 두려웠고 심지어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천국가면 억울하다고 할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과정을 알고 나면 ‘하나님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할 뿐입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만 보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심이 이해도 안 되고 믿어지지도 않고 원망스럽기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의 근거를 변화되는 환경과 펼쳐지는 상황에 두면 안 됩니다. 변함이 없는 말씀에 믿음의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른의 믿음인 것입니다.

WEC 선교회의 국제총재였던 노먼 그럽(Norman Grubb)선교사가 새내기 선교사 시절 콩고에서 사역하였는데, 사역의 열매가 없어서 너무나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런던에서 펜 루이스 (Penn Lewis)여사가 쓴 소책자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에 대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을 새우며 고뇌하였습니다. 충격을 받았지만 자신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죽으셨는가?”, “네, 주님, 예수님은 정말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너도 그렇단다. 그분께서 죽으실 때 네가 그분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갑자기 눈이 열렸습니다.” 나는 눈이 뜨였다. 나는 그에게 도달하기 위해서 몸부림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이미 그분 안에 있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들림 받았다. 나는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았다.”
그는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십자가 안에서의 죽음과 부활 생명으로 사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노먼은 빈 카드를 가져와서 묘비를 그린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넣었다. ‘노먼 그럽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곳에 묻히다.’그 후, 그는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그 말씀으로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WEC 국제선교회를 놀랍게 발전시키는 하나님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말씀을 붙잡고 사는 믿음이 어른의 믿음입니다. 그 때 환경과 형편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 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 때,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인들이 그 지시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였더니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로 잡혀가는 중에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되었을 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주께서 지난 밤 나에게 말씀하셨다. ‘바울아, 네가 두려워 말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가서 가이사 황제 앞에 서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이것이 어른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나이만 들면 안 됩니다. 믿음도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이 자랐는지 아닌지는 예수님이 얼마나 크게 여겨지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낸 만큼 예수님은 점점 커지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진정 그리스도인지 긴가민가했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었고, 십자가 때 잠시 시험이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으로 만나게 되었고 내주하심으로 온 열방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동행한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개 사정은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정말 큰 분으로 여겨졌습니다. 내 인생을 구원할 뿐 아니라 만왕의 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예수님이 점점 작아지십니다. 주님 때문에 깜짝 놀라는 일은 줄어들고 그분에게 지루함을 느낍니다. 아는 것도 많아지고 맡는 것도 커졌습니다. 그래서 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전도사도 되고 목사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아닙니다. 자신의 조그만 어려움도 해결해 줄 분으로도 믿어지지 않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놀라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놀라신 적이 최근 언제 있었습니까? 그래서 스캔들을 일으키는 목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은밀한 죄를 짓는 것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이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음란 동영상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 하나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돈 얼마 더 버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실제로 예수님 그 분올 믿고 따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만 다닌 것이고 교리를 안 것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주님이 되신 분께, ‘제 주님이 되어 달라’고 계속 요청 드리는 이상한 기도만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너무나 힘든 환경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도움의 손길도 미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 다닌 세월이 길고 나이도 들었다고 믿음도 저절로 자랐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밤이 무섭지 않다고 인생의 밤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어린 믿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오게 됩니다.

케네스 배 선교사, [잊지 않았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무서운 핍박이 닥치고 주위에 아무도 도울 자가 없고 성경도 읽을 수 없을 때,
많은 메일이 옵니다. 사역의 길이 완전히 무너진 목회자, 삶이 완전히 파탄 난 성도, 메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린아이를 보십시오. 사랑스럽고 귀하긴 하지만 얼마나 아슬아슬합니까?
넘어질까, 다치지는 않을까? 잘 못되고 탈이 나지 않을까? 해함을 받지 않을까?
이것이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빌 4:12에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어른이 된 믿음입니다. 한마디로 배고픈 때를 만나도, 궁핍한 상황이 와도 두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빌 4:13에서 그 비밀을 말씀합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능력주시는 자를 알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다 압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능력주시는 자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악한지,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얼마 전 중국 선교사 한 분이 질문하셨습니다. “제자훈련이나 성령의 은사 운동처럼 영성일기도 또 하나의 유행으로 그치지는 않을까요?”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의 유행일 뿐이야!”

그러나 영성일기는 결코 유행이 아닙니다. 기도가 유행일 수 있겠습니까? 성경읽기가 유행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 사는 것 역시 유행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기도나 성경 읽기처럼 그리스도인의 기본 삶이요 핵심입니다.

영성일기는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 사는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는 잘 드리는지, 기도를 열심히 하는지, 성경은 많이 읽는지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쉽게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성일기를 통하여 그가 주님 안에 있는지를 점검할 수도 있고 훈련할 수도 있고 검증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또 한주간이 지났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세월만 흘려보낼 것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믿었으면 주님과 실제로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성일기를 써 보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한 장로님, 영성일기, “회사가 교회라고 생각하며 근무하다 보니 저의 태도와 말에 변화가 있음을 봅니다.”예배 드릴 때와 직장에서 우리는 주님 안에 사는 것이 동일해야 합니다. 일터 컨퍼런스에서 간증하신 한 장로님께서 월요일에 “은혜 받으러 출근합니다!”라고 선포한다고 했습니다. 주일에 “은혜 받으러 교회 갑니다.” 만 아닙니다. 이런 믿음과 고백이 있어야 믿음이 자랍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매일 일기로 기록하고 그것을 정직하게 나누면서 서로 점검해 주면 반드시 믿음이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변화무쌍한 환경만 바라보지 않고 변함없는 말씀으로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