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운동 연구가).
예언과 계시의 개념을 크게 오해한 근래의 대표적 사례를 한 가지만 든다면 1992년에 발발한 다미선교회 사건이다. 그들은 성경의 교훈보다도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나 에드가 케이시(Edgar Cayce) 등의 예언과 계시의 체험을 더욱 신뢰하여 종말론을 해석하였다. 더군다나 그들은 소년들이 받았다고 하는 주관적 체험의 내용들을 성경의 권위와 견줄 수 있는 객관적 계시로 간주하였으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분별없이 인용하여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다미선교회는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신념을 갖고 기독교계에서 스스로 고립된 집단적 신비주의를 형성해 나갔으며, 그뿐만 아니라 임박한 시한부 종말의 위기감 속에서 비정상적인 형태의 금욕주의를 발전시켰다.

신학적으로 '계시'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전 인류의 구원과 창조의 질서에 대한 초시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말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진정한 계시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물론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개인적인 인도하심과 진리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현상을 '계시'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며, 또 각자에게 주어진 이 같은 깨달음이나 인도하심이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복음적 신학계에서는 대부분 계시라는 단어가 초시대적·범인류적 계시인 성경의 객관적 진리에 국한시켜 사용돼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만이 예언의 전부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점 또한 사실이다. 특히 20세기 초의 전통 오순절운동과 1960년대의 은사갱신운동,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제3의 물결을 거치면서, 새로운 계시에 대한 가능성과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최근에는 '신사도 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에서 예언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확장해 왔다.

신사도 개혁운동은 예수님 시대 사도들의 사역을 계승하자는, 이름 그대로 신사도적(New Apostolic) 운동이라고 당사자들은 말한다. 교회성장학자이자 은사주의적 성령론 학자인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인데, 이 운동에서는 사도와 사도적 사역을 강조하며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신사도적 교회들이 나타나야 함을 역설하였다[Peter Wagner, "The New Apostolic Reformation Is Not a Cult," Charisma News(24 Aug 2011)].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선 성령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운동에서는 이른바 '오중 직임'이라 부르는 사도, 선지자, 목사, 교사, 전도자의 현대적 적용을 주장하는 등, 사도적 은사 및 예언과 계시 해석과 관련해 현대 한국교회 내에 큰 논란의 파장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혼란의 핵심에는 '한 용어'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논하는 데서 야기되는 불협화음이 존재한다. 예언이나 계시에 대한 용례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두 신념 그룹 사이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은사의 유무(有無)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은사에 대한 표현상의 방법과 능력에 있어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이나 계시라고 하는 표현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는 집단과 전통적 복음주의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먼저 비판받는 집단들이 명심해야 할 일은, 이미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보편적 정의를 확보하고 있는 용어에 대한 이해를 무시하고 새로운 개념을 설정할 경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용어의 기본 개념에 대한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불일치와 몰이해가 결국엔 교회론의 균열을 깨는 더 큰 갈등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