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

날짜 : 2016년 7월 10일
본문 : 시편 103:2

<서론>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삶의 고통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어디든지 찾아 갑니다. 요사이 구라파에서나 소련에서 우리 한국에 수술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병이 나을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해결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상 사역을 할 때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계신 곳에는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몰려 왔습니다. 시편기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 사역을 성령을 통해서 멀리 바라보며, 예수님이 베푸신 은택을 잊지 말고 감사 찬송하라고 우리에게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본론>
1.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모든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고 송축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만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만약 50년형을 받았다면 50년을 감옥에서 지내야 되고, 종신형을 받았다면 평생 감옥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종신형 정도가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장 23절)’이라고 했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나니(히브리서 9장 22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그 누구도 자기 죄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사형선고를 받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때 그냥 죄를 눈 감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어떤 법관이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가족이라고 해서 그냥 눈 감아 준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그 사람은 법관의 자격이 없으니 당장 물러가라”고 여론을 일으킬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재판관이기 때문에 죄를 그냥 눈 감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는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나무에 달아 죽음을 당케 하심으로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치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신 창조주시기 때문에 조금도 편협되게 판단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학생들은 시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중년들은 직장이나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있고, 노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움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온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 그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와서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죄를 지으면 그 마음에 두려움이 꽉 들어차게 되는 것입니다. 잡초를 뽑을 때 뿌리 채 뽑지 아니하면 아무리 잡초를 뽑아도 어느새 다시 잡초가 무성해집니다. 또 집안에 있는 거미를 잡지 아니하면 거미줄을 아무리 걷어치워도 또 거미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지 아니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생에 가시와 엉겅퀴 가득하고, 수고와 슬픔이 가득한 것은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택은 잊지 말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그 은택을 꼭 누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한 은택이기 때문에 그 은택을 늘 마음에 기억하고, 누리고, 사람들에게 전달해줘야 될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만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조차도 죄를 용서하시는 대가로 그 아들의 생명을 나무에 달아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도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니라’고.

죄가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고로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조금도 두렵지 않고, 하나님을 보면 한없이 즐겁고, 기쁘고, 감사하고, 사랑이 넘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하게 되고 두려움이 들어오게 된 것은, 하나님을 반역해서 죄를 짓자마자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 있을 뿐 아니라 죄가 있는 곳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값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는 차원이 높을수록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옵니다. 마가복음 14장 33절로 36절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가 마음에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으므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힐걸 생각하니 엄청나게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아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체험했으며, 배신당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치고, 은총을 베풀어주는 사람들이 군중과 끼어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을 치고. 외로움이 극에 다한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고 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가혹합니까. 십자가에 매달리어 피를 흘려 죽음의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 것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위해서 당한 고통이 상상을 초월하게 괴로운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미리 고통당하기 전에 고민하시고, 괴로워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십자가 고통을 면했으면 여러분 우리는 이미 다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서 고난당한 것이 아니라 날 위해서 고난당하셨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고통 내 고통, 예수 버림 내 버림. 예수님의 음부의 괴로움은 나의 음부의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잔을 옮겨버리셨으면 우리는 희망이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장 2절)’ 우리의 삶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취생몽사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떻게 되어도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고, 사태가 나고, 홍수가 나고 이런 일이 있어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정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에 보면 좌우에 못 박힌 추악한 두 죄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죄인은 좋은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매달려서 그 고통 중에 예수님께 기도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2절로 43절에 한 죄인이 일생에 한 번 예수님을 모셔드린 연고로 영원한 구원을 얻은 장면이 나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단지 그 말입니다. 좋은 일이란 하지 않았습니다. 나쁜 사람입니다. 흉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 주님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장 43절)’ 그러면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나도 천당 갈 수 있겠네요.” 한 번 말해 따라해 보십시오. “나도 천당 갈 수 있겠네요.” 저 도적이 그 간단한 기도 한 마디에 천국 간 확신을 얻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 나라 임할 때 날 기억해 주시옵시고’ ‘진실로 진실로 말하노니 너는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야. 세상에 그렇게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이란 이렇게 좋은 것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위해서 대신하여 고난당해 주시던 것이 이렇게 위대한 힘이 있습니까.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즉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할것이로다(에베소서 2장 8~9절)’

내가 무얼 잘났기에 만세 전에 하나님 자녀로 택하시고, 손으로 지적해서 부르시고, 영생을 주셨습니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볼 때 ‘내가 잘났다.’ 그런 생각이 생깁니까? 나이를 먹으면 ‘내가 못 났다.’ 그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날 보고 좋다하는 데 어떻게 합니까? 내가 싫다고 해도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니깐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게 은혜의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 식구들이 싫다 해도, 친구들이 싫다 해도, 이웃이 싫다 해도 하나님이 좋다고 한다. 떡 줄 사람이 좋아하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고 찬송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절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 로마서 6장 17절로 18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나니라’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예비해서 구속의 은혜를 허락한 그대로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백성이 되게 된 것입니다. 온 세상 날 버려도 나는 버림당하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핍박을 당해도 버린바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24시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러분이 잘났고,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죽어도 낙원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2.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가 예수 믿고 속사람이 살아날 뿐 아니라, 우리가 집 삼고 사는 육체의 병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함을 ‘야훼 라파’라고 하셨습니다. 라파란 의원이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야훼 라파다. 너의 의원이 된다.” 의원도 아닌데 의원이라고 하나님이 말할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원이 되신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야훼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야훼임이라’ 병이 하나도 안 내리는 건강의 생명을 갖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병은 인생을 극한적으로 괴롭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병을 미워하시고, 병을 영원히 멸하기 위하여 자기 육체가 채찍에 맞는 벌을 맞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습니다. 죄를 지시고, 우리 병을 담당하셨다고 성경은 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로 보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 꼭 죄 사함을 말했으면 병 고침이 그에 뒤따라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 사함과 더불어 병을 고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로 보면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모든 도시와 촌락에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증거 하시고, 어떤 질병의 고통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말로 다할 수 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사형선고를 받고, 암을 고치겠다고 우리 교회 찾아오고, 안수기도를 해달라는 만지장서의 편지를 보내오는 것을 늘 보고 지내고 있습니다. 정말로 불쌍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생각이 한없이 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 얼마 전 순복음가족신문에 우리 교회의 김지희 집사의 간증을 적어놓은 것을 제가 읽었습니다. 한번 여러분에게 말씀한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이것은 두고두고 들어봐도 감격적인 것입니다. 이분은 1995년 첫 아이를 출산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몸이 이상해서 건강진단을 받아보니깐 췌장암인데, 그것도 시작이 아니라 말기 6개월밖에 살 수 없는 시한부인생을 가지도록 암이 온 몸에 쫙 퍼진 것입니다. 의사선생님이 자기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어떻게 몰랐습니까? 이제는 의학으론 고칠 수 없으니 한 6개월 동안 살겠으므로, 남편하고 맛있는 것 잡수시고, 기운 있을 때 여행도 좀 하시고, 죽을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듣고야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살고 싶다.’ 그런데 남편은 교회에 나가는데 자기는 교회를 안 나갔습니다. 그래서 남편 따라 교회를 나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충청도가 고향이어서 고향에 내려가서 생활을 정돈하고 죽음을 맞이하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간증에 보면 남편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너무 간절하게 땅을 치고, 몸부림치며 기도를 하는데, 겁이 덜컥 나요. ‘저러다가 날 따라 죽겠구나. 그러면 딸내미는 어떻게 하지? 하나님 만나봐야 되겠다. 안되겠다. 내가 살든지 남편이 살든지, 살아있어야 자식을 돌보지. 그냥 무책임하게 갈 순 없다.’ 그래서 남편하고 오산리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래서 오산리 기도원에 가서 목숨을 내어놓고 기도를 하는데, 마침 부흥회 기간이라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 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강사 설교가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반드시 병 고침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자세히 그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다음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오늘 암이 걸려서 피를 토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와 있는데, 하나님이 고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 ‘저것은 날 보고 하는 말이다.’ 묵시가 와요. 그 목사님이 대중을 보고 한 말인데, 묵시는 자기 영혼 속에 ‘내가 저 말한 사람이다.’ 그러더니만 머리에서부터 뜨거운 기름을 확 붓는데, 온 몸이 화끈해지고 고통이 눈 녹듯이 녹아 가는데 기가 막히거든. 누구보고 한 번 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 남편하고 “여보. 나는” 닭도리탕이라 합니까, 뭡니까? 금촌 쪽으로 닭도리탕을 사 먹으러 갔습니다. 남편보고 의사가 먹고 싶은 거 있거든 다 먹으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래서 남편이 금촌으로 가는데 중간에 “아이고 화장실에 가야 되겠다”고, “빨리 화장실로, 닭도리탕은 다음에 두고 화장실로 가자”고. 그래 화장실로 가는데, 그냥 소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름변을 봤어요. 막 고름이 뭉치로 나와요. “내가 나았습니다.” 그 이튿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병원에 가서 다시 조사 해 보자”고. 그러니깐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이 “아니, 나를 놀리는 거요? 나에게 교훈을 하는 거요? 온 몸에 암 덩어리가 꽉 퍼진 사람이 며칠 만에 이렇게 깨끗하게 돼서 올 법이 있느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나니라(베드로전서2장24절)’ 하 얼마나 좋은 일인 것입니까! 예수 믿으면 이런 체험도 해야 돼요. 이런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가서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묵시를 주시고, 그 다음에는 기적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도할 때 하나님 성령께서 머리에 기름 부으셔서 뜨거운 사우나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은 기가 막히게 상쾌한 생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새로 결혼한 거와 같은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게 되었으니 고맙기 말을 다할 수 없지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한삼서1장2절)’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라고 하는데, 이게 강건해지면 범사도 잘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가 “예수를 믿어도 잘 못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아주 배고프고, 굶주리고, 고통당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건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것이 얼마나 슬프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6.25사변 나고 난 다음 우리 한국 사회에 굶어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때 굶어죽는 것은 보통 있는 것이었습니다. 미군부대에 쓰레기통을 뒤지러 가면 온갖 먹던 쓰레기들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끓여서 꿀꿀이죽을 만듭니다. 온갖 양분 있는 음식은 다 들어 있지요. 꿀꿀이죽을 만들어서 그것도 충분히 먹을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걸 보고 “당신 복 받았네. 꿀꿀이죽 먹는 걸 보니까는 복 받았네” 그렇게 말하면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면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저가 부요하신 이로서 너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로 부요케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8장 9절)’ 예수님께서 여러분 부요케 만들기 위해서 직접 자기가 가난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니(파멸은 저주를 뜻한다)
그것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졌지 않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해서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에서 이마에 땀을 흘리며 먹고 살았는데, 이 저주를 주님께서 제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니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함이라(갈라디아서 3장 13~14절)’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복주고 복주며, 번창케하고 번창케하리라” 아브라함의 복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총을 넘치게 받았기 때문에 좋은 이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을 나눌 수 있으니깐. 그런데 우리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믿고 난 다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고생시켰다는 말은 한 마디도 읽어 보지 못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담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다가 흉악한 사탄의 계획에 빠져서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 무엇을 하더라도 안 되고, 실패하는 것이 저주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7~19절)’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고 너희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채소를 먹으라고 그랬어요. 요사이도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우리의 양식은 채소라고 말했었습니다. 채소를 잘 다스려서 먹으면 병이 낫습니다. 그 후에 우리 사람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고, 몸이 산성화되어져 지금도 여러분 채소를 잘 다스려 먹으면 병들지 않습니다. 또 병들어도 낫습니다.

출애굽한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저주를 받아 다 죽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라서 온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 자손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2절로 23절에 보면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민수기 14장 32절로 33절에 보면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 반역의 죄를 지고 너희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고 말했습니다.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들이 뱀에 물려서 죽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뱀을 장대에 만들어서 높이 세우고 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 독이 사하여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놓고 “쳐다보라”고. 쳐다본 사람은 뱀독에서 다 나았습니다. 반역하고 안 쳐다본 사람은 죽었어요. 그래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이 나보고 하는 말이다.” 니고데모보고 말하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3장 14~15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은혜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므로 저주의 독을 다 청산하고 만은 것입니다. 여러분 언제든지 마음에 저주 받은 데에서 해방되어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꼭 그렇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생각에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 여러분이라 생각하고, 여러분 하시는 사업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축복을 받았다고 꿈꾸고, 믿고,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나는 용기니깐 “용기야. 너 복 받은 사람이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꼭 그것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보고, 믿고, 말하는 것 이것은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 반드시 놓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통해서 여러분 복 받은 사람이 된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은 그를 통해서 성공한다고 믿고, 기도하고, 입술로 꼭 시인하십시오. 한 번 따라 말씀해 보세요. “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이다.” 주무실 때 자기를 바라보고 그렇게 입으로 시인하고 주무시고, 아침에 깨어 일어나서 그렇게 입으로 시인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결론>
한 사람 아담의 탐욕과 반역 때문에 그 후손들이 죄 중에 태어나고, 숙명적으로 저주를 받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고, 일어서고 앉는 것마다 저주스러운 무거운 짐을 목에 달고 살아왔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렇게 변화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된 우리들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피의 능력으로 여러분 같이 계시고, 여러분의 의로움이 되시고, 축복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