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3월에 개봉한 <배트맨 대 슈퍼맨>도 그랬지만, 근간에 쏟아져 나오는 미국의 슈퍼 히어로물을 보노라면 근자에 들어 미국은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것만 같다.

악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는 영웅의 문제를 이야기의 발단으로 삼은 '배트맨 대 슈퍼맨'처럼, '캡틴 아메리카'의 '시빌 워(Civil War)'도 악의 퇴치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자들의 원한 이야기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시민들이 슈퍼맨의 선(善)에 대한 의지를 의심해 결국 그를 사회를 도탄에 빠뜨린 영웅으로 평가 절하했던 것처럼, 어벤져스의 현란하고 '멋진' 전투력 뒤에 속출한 피해자들의 원성은 어벤져스의 존재 가치에 의구심을 던진다.

아이언맨의 화려한 무대 뒤에서 한 맺힌 희생자 어머니가 던진 나직한 절규는, 전편(全篇)에 걸쳐 유아독존으로 일관하던 그의 자유분방함을 질서와 체제라는 전혀 다른 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만든다.

반면 아이언맨 스타크의 분방함에 비하면 언제나 전체의 조화와 화합의 구심축으로 일관해 왔기에 누구보다 먼저 이 새로운 질서로의 편입을 주도하고 설득할 줄 알았던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는, 되려 반기를 들며 강하게 저항한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그리하여 새 질서에 편입해 UN 산하기구가 된 어벤져스의 리더가 된 스타크와는 달리, 이 '소코비아 합의서(Sokovia Accord-전투 과정에 도시 하나를 통째로 날린 사태에서 딴 이름. 그 가상의 도시 이름이 Sokovia)'라는 협정에 서명을 거부한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는 졸지에 범법자 신세로 전락한다.

이 협정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In accordance with the document at hand, I hereby certify that the below mentioned participants, peoples and individuals, shall no longer operate freely or unregulated, but instead operate under the rules, ordinances and governances of the aforementioned United Nations panel, acting only when and if the panel deems it appropriate and/or necessary. -Sokovia Accords"

(나는 이 문건에 따라 즉시, 아래 언급된 관계자나 사람들, 또는 개인들이 더 이상은 규제되지 않은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으며, 대신에 규칙과 조례, 그리고 상술한 UN 산하기구 통제 아래서, 기구가 적합하거나 필요하다고 여길 때에만 활동할 것임을 증명한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가 이 협정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하나다. 어벤져스에게 부여된 초법적 지위를 포기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악이 출현했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 서명으로 오히려 손발이 묶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언맨 스타크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희생시킨 피해자 가족을 만난 것을 계기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어벤져스의 존재는 더 강한 악이 출현하는 데 발단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벤져스 자신들의 좌충우돌 판단에 따라 일하던 시대는 이제 저물어가고 있음을 역설했다. 체제와 시스템에 맡길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 팽팽한 두 입장의 대립은, 체제의 지휘에 따르겠다는 영웅들과 따르지 않겠다는 영웅들로 분열을 가져 온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실제로 슈퍼 경찰국가를 자처하던 미합중국의 위상은 영화가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예전 같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이와 같은 분열에 비친 그들의 자의식이, 뜻밖에도 2016년 그들의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당내 경선 출발 당시 지지율 1%대에 지나지 않던 미(美) 대선 공화당 후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강세 전환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전혀 비호감이던 그의 위상과 지지율은 엊그제 발언한 '안보 무임승차론', 곧 미군의 주둔을 원하는 국가는 100%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해괴한 논리로 그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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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슈퍼 히어로란 초월적 가치 체계로 움직일 때 슈퍼 히어로인 법이다. 되려 평범한 범인(凡人)의 제도로 귀속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범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의 지위를 포기하려는 영웅 집단과 도널드 트럼프로 대변되는 미국의 집단 자의식은-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지난 2002년 주한미군 장갑차에 여중생들이 당한 사고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다. 특히 당시 한국의 '이상한' 사제들이 백악관 앞까지 쫓아갔던 반미 정서 속에서, 한국 다수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미국에 대한 우호적 대처를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또한 유라시아와 동아시아 대다수 영토의 이데올로기가 붉게 물들었던 시절, 유일하게 파란 점 하나를 찍고서 자기들을 도와 자유주의를 수호했던 이 작은 우방국을 잊은 듯하다. 오로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도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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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의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그동안 미군이 주둔하며 무상으로 제공받았던 '훈련 제반의 거점 사용 비용'은, 이 거점 국가에서 청구해야 할 것이지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님 또한 망각한 듯하다. 이러한 일련의 망각은 병든 어벤져스 집단의 자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어벤져스(Avengers)라는 말은 '복수자들'이라는 뜻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원수를 갚아 줄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주어나 목적어가 빠진 이 술어에서, 누구를 위해 누구의 원한을 갚아 줘야 한다는 것일까? 그것은 단연 약자를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이들의 정체성은 성서의 등장인물로 치면 마치 '판관(判官/ 士師)'에 가까운 것이다(형법 재판관 개념이 여기서 나왔다).

이들의 주된 활동 시대를 담고 있는 '사사기'의 종말에 가서는, 이 초법적 시대를 오히려 뒤로 물리려는 시민의식이, 범인(凡人)의 제도에 지나지 않던 왕의 제도를 들여오려고 시도한다. 그때 마지막 판관이었던 사무엘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갈 것이다. 그가 너희 딸들을 취하여 갈 것이다. 그가 너희 소산을 취하여 갈 것이다. 그가 소산의 십일조도 취하여 갈 것이다. 그가 너희 노비와 가축도 취하여 갈 것이다. 너희는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1-17)

이 영화의 원작 <시빌 워>에서는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가 죽는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슈퍼맨이 죽는 것처럼.

이 글을 마무리하려는데 이런 기사까지 뜨고 있다. 우리의 발목을 잡을 지 모를.

"클래퍼 국가정보국장, 북·미 평화협정 한국 입장 타진했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에필로그

아이언맨 스타크가 자기 편의 세를 불리기 위해 소년 '스파이더맨'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타크: 너는 왜 그 일(복면을 쓰고 위급한 상황에 돕는)을 하는 거니?

소년 스파이더맨: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그들의 안전을 도외시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껴서요. 꼭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스타크는 이 말 한 마디를 확인하자마자 소년을 합류시킨다.

지금으로부터 66년 전 이 소년과 같은 마음을 지녔던 수많은 어벤져스들이, 기름 한 방울 안 나오는 이곳에서 목숨을 바쳤을 것 같다.

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병사들 수(괄호 내 사망자 수)는 다음과 같다.

이영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미국 1,600,000(36,492), 영국 56,000(1,177), 캐나다 27,000(516), 터키 14,936(1,005), 호주 8,407(346), 필리핀 7,500(120), 태국 6,326(136), 뉴질랜드 5,350(41), 네덜란드 5,320(124), 콜롬비아 5,100(213), 그리스 4,440(186), 프랑스 3,760(270), 벨기에 3,590(106), 에티오피아 3,518(122), 남아공 900(37), 덴마크 630, 노르웨이 623(3), 스웨덴 380, 인도 346, 이탈리아 185, 룩셈부르크 89(2), 유엔군 총계 1,754,400(40,896)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하여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는 신학자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