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제목이 멋지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제목만 듣고선 현대 유대교 랍비 혹은 이슬람교 이맘이 쓴 글인 줄 알았는데, 책을 펼쳐 보니 중동에서 오랫동안 사역한 기독교 신약학자였다. 하지만 필자에겐 케네스 베일리란 이름이 낯설었다.

신약 배경에 관한 문헌들을 참고한 복음서 해설서는 적지 않다. 하지만 도대체 케네스 베일리가 말하고자 하는 '중동의 눈'이란 무엇일까? 읽는 내내 고민했다. 그리고 다 읽고 또 다시 훑으면서, 비로소 그가 말하는 '중동의 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중동의 눈은 하나의 '시각'이 아니었고, 생각보다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케네스 베일리는 중동 출신이 아니다. 신약 공부를 끝낸 뒤 중동으로 넘어간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40년 삶이 묻어 있는 중동을 굉장히 좋아한다.

케네스 베일리에게 있어서 중동이란,

①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40년 중동의 삶이다. 거기서 그는 중동인들의 문화를 경험한다. 타자를 환대하고, 공동체적으로 생각하며, 여성에 대해선 보수적이고, 명예를 중요시하는 등의 삶이 그에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타자를 환대하지 않는 1세기의 예수 기사들은 그에게 굉장히 심각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현대의 중동 경험이 1세기에 투영돼 복음서 해석이 이루어진다.

②아랍어, 시리아어, 콥트어 역본 성경이다. 어쨌든, 헬라어나 히브리어 등은 해석의 여지가 있는 원어다. 비록 케네스 베일리가 기본적인 사전(예를 들면 TDNT)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애매모호한 혹은 선택 가능한 번역이 있을 땐 앞서 나열한 중동의 성서 역본을 따른다.

③중동의 신학자다. 특히 가장 많이 눈에 띈 중동 신학자는 11세기 바그다드의 이븐 알 타이이브(Ibn al-Tayyib)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이기에 그의 해석에 의존하며, 심지어 그 해석을 존중하기 위해 현대 과학 논문까지 역으로 덧붙이는 걸까(나사로의 상처를 핥은 개가 치유의 역할을 했다는 이븐 알 타이이브의 해석을 지지하기 위해, '침에 치유 효과가 있다'는 논문이 각주로 달려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중동 이전의 눈도 있다. 그의 신학 세계이다. 그가 언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인용하는 책들의 출간 연도를 면밀히 본다면 꽤 옛 인물들(요아킴 예레미아스 등)을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필자의 분석이 맞다면, 중동의 눈이란 정확히 말해 '케네스 베일리의 중동의 눈'이다. 위와 같은 눈이 적용되어 읽어나가는 복음서 해석은 구체적으로 어떠할까?

예수가 태어난 '구유'에 대한 그의 해석의 중요성은, 실제 마구간에 있는 짐승의 밥그릇인지 아니면 여관 내부의 어떤 공간인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베일리가 경험한 중동의 환대 문화에 비추어 볼 때, (타자에게) '매몰차게 굴 리가 없다'란 것이 해석의 핵심이다.

그리고 예수의 계보 해석에서 나타난 그의 여성관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밧세바는 설계자이고 라합은 창녀다. 현대인의 시각엔 불편할 수 있지만, 그가 경험한 중동 세계에선 오히려 밧세바의 행동이 불편하다. 그러나 그러한 죄인이 메시야 계보에 속한 것이 위대하지 않느냐고 그는 도리어 역설한다.

한편 베일리는 주기도를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테필라(Tefillah)와 비교한다. 그리고 슬쩍 중동 번역 성경의 탁월함을 언급한다. 예를 들면 그리스어 본문에 담긴 셈어 어순을 보존하고 있다거나 '필요한'으로 번역되는 '에피우시오스(epiousios-주기도 외 다른 곳에선 발견되지 않는 단어, 즉 하팍스 레고메논)'에 대한 대략 네 가지 해석이 있는데 중동의 시리아 페쉬타 번역이 이것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다거나, 빚과 죄 모두를 의미하는 아람어 '호바'가 주기도 이면에 놓여 있을 텐데 고시리아 역본, 페쉬타, 하르켈 역본 등에 나타난다는 것 등의 주장이 그것이다.

여성에 대한 베일리의 해석은 직설적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당대에 높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 지역 일부는 그러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만, 여성 인권 신장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것은 잘 와 닿지 않는 피상적 서술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여성에 대한 보수적 시각을 느낀 베일리의 경험이 해석과 글에 반영된 자기 말로 다시 본문의 내용을 재구성한 문장, 즉 패러프레이즈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아래는 마르다 패러프레이즈의 일부다.

"이런 창피한 일이! 하필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다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여동생이 남자들과 함께 있네. 이웃 사람들이 뭐라 할까? 집안에서는 뭐라고 생각할까?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누가 쟤를 신부로 맞겠어? 꿈도 못 꾸게 생겼네(300쪽)!"

이 외에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 제자들이 "선생님,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중동 지역에서 "선생님, 이 여자를 쫓아 버릴까요?"라는 관용어라든지, 중동의 거지들은 공동체 문화 속에 살고 있기에 당당히 적선을 요구한다거나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든지, 개에 대한 태도(우리는 개를 친구로 또는 식용으로 생각하지만 청소부로 생각하진 않는다!) 등, 그들의 문화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이븐 알 타이이브는 케네스 베일리가 비유 파트에서 가장 빈번히 인용하는 학자다. 일일이 세어 보진 않았지만, 뒤의 색인을 참고하여 보면 베일리가 꽤나 의존하는 듯한 레슬리 뉴비긴이나 요아킴 예레미아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등장한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이미 예수를 알고 그를 믿은 자라는 해석은 이븐 알 타이이브의 것이다. 거기에 중동의 환대 문화에 대한 베일리의 사고를 합치니 놀라운 해석이 등장한다. 베일리에 의하면 예수가 시몬의 집에서 환대받지 못해 당한 망신을 보고 화가 난 여인이 환대 예법을 행하기 위해 극적인 행위를 한 것이며, 그렇기에 중동의 눈으로 볼 때 정숙하지 못한 여인에게 비난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예수가 여인을 감싸 줌으로써 그 여인에게 쏟아진 적대감을 대신 지는, 일종의 '대속'의 기독론이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사실 이런 식의 전개를 고려해 본 적이 없다. 환대 문화에 대해 그토록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눈여겨볼 이븐 알 타이이브의 해석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이다. 청지기는 채무자를 배임의 공범자로 만들어, 주인의 관대함을 칭송하게 만든다. 베일리에 의하면 중동도 명예와 수치의 문화이기에 이런 평판은 중요했고, 주인은 본래 관대한 자이다. 즉, 주인의 관대함을 꿰뚫어 본 청지기가 이를 이용한 것이다.

청지기와 채무자 사이에 벌어진 일에 대한 이븐 알 타이이브의 해석은 범죄 영화의 한 토막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결국 죄는 죄를 낳는다. 그것이 이븐 알 타이이브와 케네스 베일리의 결론이다. 예수가 청지기의 사기를 칭찬한 것이라며 비난했던 율리아누스는 틀렸다. 도리어 예수는 주인(하나님)의 성품을 파악한 청지기의 '지혜'를 본받으라고 했을 뿐이다. 세상의 아들도 주인의 성품을 간파하는데, 왜 빛의 아들이 주인의 성품을 간파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쿤틸렛 아주르드가 위치한 바란 광야
▲팔레스타인의 바란 광야. ⓒ크리스천투데이 DB

필자가 볼 때, 케네스 베일리는 나름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최대한 발휘해 복음서 해설서를 만들어냈다. 직접 번역하고, 구조를 분석하고 중동의 역본들도 찾아 다니며, 아랍권 주석들과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고, 마지막에는 요약까지도 달아 놓는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복음서 해설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비판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평행법이다. 저자는 평행법에 근거하여 본문 배열을 드러내는데, 스스로도 변칙이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사실 평행법이란 것은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둘째는 신적 수동태(divine passive vocie)다. 국내에는 장동수 교수를 통해 대한성서공회 성서원문연구(2000년 8월호)에서 학술적으로도 소개된 개념이다. 신적 수동태란, 수동태 구문에서 행위자가 누구인지 감추어진 문장(특히 예수가 직접 한 말)이 있다면 실제 그 행위자는 하나님 내지 신적 존재를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우회적 표현이란 개념이다.

그러나 이는 요아킴 예레미아스가 처음으로 주장한 것이자 이전엔 없던 개념이고, 나아가 행위자가 나타나지 않는 문장에서 하나님 내지 신적 존재가 전제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예레미아스나 소위 GGBB(Greek Grammar Beyond the Basics)라 불리는 두텁고 제법 상용화된 책의 저자 다니엘 월리스도 신적 수동태의 감추어진 행위자 전체를 반드시 하나님 내지는 신적 존재로 볼 순 없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신적 수동태는 신앙이나 교리에 문법 개념을 만들어낸 것으로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실제로 하나님이나 신적 존재를 '주어' 삼아 능동태 동사를 사용한 문장이 얼마나 많은가! 자세한 것은 'The passivum divinum: The Rise and Future Fall of an Imaginary Linguistic Phenomenon' FN 47 [2015] 3-24를 참조하라).

저자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필자는 이 지점에서 독자 반응 비평을 발견한다. 사실 본서를 단순히 제목대로만 기획했다면, 신약 배경사 혹은 초대교회 배경사만 배워도 충분히 풀이할 수 있는 내용이 될 뻔했다. 물론 그렇게 충실하게 했다면 필자에겐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는 또 다른 편리한 책 한 권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저자 스스로는 진심으로 자신이 객관적인 중동의 눈으로 예수를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필자는 너무도 주관적인, 그래서 가치 있는 책이라는 것을 완독하고 또다시 훑으며 느꼈다. 뻔히 아는 내용이라도 그토록 가슴에 와 닿도록 생생히 구현해내는 능력은 체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즉, '몰입'의 힘이다. 몰입하여 그 세계로 들어가 여행한 듯한, 자신의 모든 것을 총동원해 낸 책이다. '굳이 이런 책이 나올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은 '어떻게 이런 글이 탄생할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필자는 그의 책 중 그가 얼마나 중동을 사랑하고, 자신이 중동인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세계의 신학을 소개하고 싶은지 하는 그 열망을 다음 문장에서 읽는다.

"나는 마타 알 미스킨이 쓴 여섯 권짜리 방대한 복음서 주석이 영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 교회에 유익을 줄 날이 오길 간절히 바란다(580쪽)."

※본 서평을 위해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 속 문장을 몇몇 곳에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진규선 목사(번역가, 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