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운동연구가)

한국교회는 일제에게서의 해방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 그리고 이후 고착된 남북 분단을 맞이하면서 극심한 이데올로기 논쟁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내에도 사랑과 이해와 화합 대신 정죄 의식과 흑백논리로 인한 양극화 대립 구조가 심화됐다.

한편 전쟁 이후 재건의 의지를 다지면서 우리나라는 온 국력을 경제적 어려움 타개를 위한 산업화와 근대화에 집중하게 된다. 한국의 각계각층에서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비중이 높아져갔고, 교회 역시 그 영향에 있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해외에서 소개된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의 교회성장론, 그리고 노만 필(Norman Vincent Peale)이나 지그 지그라(Zig Ziglar)의 적극적 사고방식 등은 교회의 신앙에 물질주의적 호소를 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두 가지 묵과할 수 없는 정신성, 즉 양극화 대립 의식과 물질주의 의식은, 당시의 성령론 신앙과 논쟁 속에도 여지없이 반영되었다. 그 중 양극화 대립 의식은 방언이나 성령세례 주제를 다루는 신학 논쟁 속에 현저하게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으며, 물질주의 의식은 성령을 물량적으로 더 많이 받겠다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성령의 갖가지 은사들을 더 많이 받아야겠다는 생각 등이 이 시기의 성령론 신앙에 크게 드러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재건되기 시작한 한국교회에는 복음적 성령론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성령의 삼위일체성과의 관계,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의 열매에 대한 교훈 등 성령론의 핵심 내용에 대해 대부분의 성도는 잘 알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타종교나 기독교 이단들에서 나타나는 신비 현상이나 능력 현상은, 분별력 없는 신도가 미혹되기 알맞은 것이었다. 마치 타종교 영성에서 그러하듯이, 성령의 은사나 능력은 많이 구하는 자에게 많이 주어질 것이라는 신념이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았다. 예를 들어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운동'이 열풍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어떤 기도원에 가면 성령의 은사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소문까지도 퍼져 있곤 하였다.

한편 당시 한국교회 개혁주의 계통의 신학교에서는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소개하고 가르치고 있었으며, 따라서 방언이나 환상이나 예언 등의 오순절적 체험을 신비주의로 배격하는 경향이 심했다. 이러한 반대 입장은 비단 개혁주의 계통의 신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웨슬리안 신학을 따르는 감리교나 성결교회 계통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196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방언 문제에 대해, 성결교신학교 교수단의 "방언에 대한 해명서"가 다음과 같이 발표되었다; "우리 예수교성결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으로 믿으며, 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체험적 신앙으로 고조하는 성결교파요, 방언파나 진동파나 입신파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성결> 321호 (1963): 66).

장로교에서는 종래의 부흥운동의 성령론인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과 새로 소개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 간의 갈등과 마찰이 시작되었다. 한 예를 들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장로교 신학자 중의 한 인물인 박윤선이 지닌 성령론의 변화다. 원래 박윤선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전통을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유학하여 수학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의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의 노선은, 워필드(B. B. Warfield)의 주장을 따라 은사중지론이었다. 그런데 그 후 박윤선이 한국에 돌아와 보니 방언, 신유 등 성령의 은사적 현상들이 지배적이었고, 그는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차영배의 말을 빌자면, 그가 다시 옛 부흥운동의 성령론을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윤선의 성령론은 1980년 이래 확실히 차영배의 영향을 받아 마침내 바뀌게 되었다고 숭실대학교의 김영한은 보았다(김영한, "개혁신학의 성령론", <성경과 신학> 20권 (1996): 655). 다시 말해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에서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성령론으로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이 점에 대해 차영배는, 박윤선의 성령론이 변화된 것은 곧 이전 평양장로회신학교의 성령론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하였다(차영배 외, 『박윤선 신학과 한국신학』, 5).

이처럼 한국교회 성령론 논쟁의 핵심에는 성령의 은사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은사의 지속성 문제를 허용할지 여부에 따라 성령세례에 대한 정의가 또한 명백히 달라지는 것이고, 그것이 달라지면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받아들일지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성령의 은사 문제만이 아니었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에 개혁주의 신학을 뿌리내리기 위해서 오순절적인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전통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할 신학적 과제라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