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본문 27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의 한 부분이 우리입니다.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답게 서는 것이 목표이지요? 장차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충만하게 드러날 텐데, 그 목표를 두고 이 땅에서 계속 성장하도록 주님께서 이 교회에 은사와 직분을 주십니다. 지난번에 좀 생각하다가 마쳤는데 오늘 이어서 보지요.

○아홉 가지 은사, 주신 목적

7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각 사람" 모든 지체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시는데, "유익하게 하려"고 주십니다. '우리 함께 유익을 도모하고 가자!' 그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끼리 좋다, 아름답다, 하도록 주신 것이 아니고 위로 그리스도처럼 성장해 가는 데 유익을 끼치도록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9절에서 아홉 가지 은사를 죽 말합니다. 지난번에 생각을 했지요? 초기 당시 교회에 필요한 은사 중에 대표적인 아홉 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8절에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9절에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또 10절에 "능력 행함" "예언함", "영들 분별함" "방언" "통역"이런 은사 은사가 다 왜 주셨느냐? 그리스도의 몸답게 그리스도처럼 점점 더 나은 공동체가 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생명체가 이 땅에서 마땅히 할 일을 하도록, 은사를 주십니다. 은사를 왜 주시느냐? 그리스도의 몸체인 교회가 점점 더 향상하도록 은사를 주셔서 발휘하게 하십니다. 개인주의가 되어서 자기 무슨 명예를 위함이 아니라, 무슨 능력을 나타내어 '아, 참 그 사람 훌륭하다!' 하는 식의 은사가 아닙니다. 개인의 무슨 명예를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은사든지 다 그리스도께 연합한 몸체가 더욱 향상되도록, 그리스도처럼 더 거룩하게 되는데 보탬이 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분자'라고 하고 '지체'라고 하지 '개체'라고 하지 않지요? 어떤 이는 발 노릇을 하고 어떤 이는 손 노릇을 하고 어떤 이는 손가락 노릇도 하고 하도록, 그래서 한 사람이 잘 나타나도록, 그와 같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아서 순종하도록,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수족이 되어서 이 땅에서 할 일을 하도록 각양 은사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은사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아, 너는 말씀의 은사가 있어!' 하고, '아, 너는 병 고치는 은사가 있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개체가 무엇을 두각을 나타내고 가면 그건 은사를 주신 주님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처럼 된다는, 그리스도의 몸이 향상해 간다는 점을 잊으면 사람들끼리 뭘 자꾸 하려는 데로 빠집니다. 개인뿐 아니고 사람인 우리끼리도 잘해보자, 하고 사람이 좋아하는 공동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은 여타의 종교에서도 다 하지 않습니까? 교회라고 다른 게 없지요? 주님의 교회라고 하면서 주님의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고 그저 여타 종교에서도 다 할 수 있는 단체 하나를 내면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럴듯해도 주님께서 인정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은사!' 할 때 우리는 반드시 밑바탕에 깔아야 할 인식은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되는 데 쓰이도록 주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교회로 구원하신 것은 교회 전체가 주님의 수족이 되고 몸이 되어서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체가 무엇을 하는 이 원리를 생각지 않고 그저 하나하나가 구원을 달랑 얻고, 무슨 보람도 없고 가치도 없이 일생 자기 나름대로 그럭저럭 살다가 천당을 간다! 하면 안 됩니다. 개인적으로 살다가 개인적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지요? 개인이 교회로 구원이 되고 할 일을 하다가, 연합체인 교회가 할 일을 같이 하다가 교회가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지요? 주님께서 구원하여 '천당!' 하고 천당으로 바로 데려가지 않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하여 연합체에서 살게 하신 뜻은 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사명이 무엇이지요? 여러분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칫하면 '나는 이런 것을 잘하니까 이것이 내 사명이야?' 하고 개인주의로 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사명 무슨 사명하는 것이 잘못임을 우리가 이미 배워서 아는데, 사명이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갖습니다. 지체니까 몸에서 자기 분야가 뭔지는 아는 것입니다. 개인이 사명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교회에 속하고 보니 교회의 사명이 있고, 거기에 내가 지체로 참여했으니까 손가락이면 손가락노릇 하는 겁니다. 발이면 발 노릇 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교회의 사명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요? 자기가 정말 신자라고 하면 교회의 사명을 모르면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거지요?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답게 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몸답게 되는 것인데, 그래서 마땅히 할 일을 하는 사명인데, 무엇인가요? 구약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입니다. 오고 오는 모든 교회의 대표로 서서 하나님과 언약한 시내산 언약 전문(前文)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니까 얼른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20장부터 하나님께서 직접 계명의 말씀을 주시는데 그 율법 전체가 언약의 내용이고 그 이전에 전문과 같이 하신 말씀이 19장이지요? 20장 바로 앞에 19장이 율법의 전문인데,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4~6절이지요? 먼저 6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를 앞장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거지요? 여기 잘 보면 "제사장 나라." 이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목적입니다. "제사장 나라"로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나라", 두 명사를 붙여서 말하지요? "제사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소에서 예배하는 직분자들이지요? 구약 성도인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제사장들이 전면에서 예배를 합니다. 성소에서 예배를 잘 드림으로써,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여 예배한 것임으로 전체 공동체가 제사장 나라가 되지요?

왜 제사장 나라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신 거지요? 왜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 나라라고 하고 예배를 잘 드리도록 하신 거지요?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을 불러내어서, 애굽민들과 함께 불러내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불러내셔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토록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요? 다른 민족도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이스라엘을 먼저 선택한 거지요? 제사장은 중보사역 아닙니까? 예배를 잘 드림으로 이방 민족들도 그것을 보고 '우리도 주님 앞에 부복하여 예배하고 싶다' 하는 걸 불러일으켜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그 목적을 이루도록 먼저 이스라엘을 불러내셨지요? 이스라엘을 먼저 불러내신 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으로 똑바로 서서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도록 수족으로 쓰십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교회가 바로 서 있지 못한다면, 그래서 제사장 사명을 실패하면 이방인들이 구원의 길이 막힌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게 구원의 책임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책임은 뭐 무책임하고 그저 잘먹고 잘살고 천당도 간다는 이런 가르침이 성경에 어디에 있습니까.

자 그럼 제사장 직분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저절로 됩니까? 제사장이 저절로 됩니까? 5절에 말하지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입니다. '너, 무슨 재주를 펼쳐서 해보라!'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제사장이 됩니다. 구약의 제사장을 보면 잘 알 수 있지요? 순종 여부에 따라 제사장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했지요? 여기에 말씀이 핵심입니다. 직분자가 말씀을 등한히 하든지 백성이 등한히 하든지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제사장 직분자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따라서 구약 교회는 항상 '우리는 제사장이다!' 하는 정신을 가지고 항상 주님의 말씀을 첫째로 경청해야 하지요. 제사장임을 명심하고, 또 '나라'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 하면 무엇이 생각나지요? 나라, 나라는 왕이 있고 '다스림'이 있지요? '왕'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데, 물론 위로 하나님을 임금으로 모시고 그 수하에서 예배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이 일이 언제 완전히 성취되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시고 또한 제물도 되셔서 피를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뿌렸지요.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때 아버지께서 제사장 직분이 온전히 성취된 그 열매로 교회를 내셨습니다. 얼른 찾아보지요. 베드로전서 2장입니다. 지금 본 말씀과 같이 볼 텐데요, 여기 출애굽기 19장을 덮지 말고 이것도 쥐고 있고 베드로전서 2을 보십시다. 같이 보겠습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제사 직분을 수행하신 그리스도의 그 공로를 힘입어 신약 교회도 구약 성도들과 똑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섬깁니다.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가 출애굽기 19:4~6의 말씀을 잘 생각하고 여기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구약 교회가 신약 교회에서 성취된 거지요? 우리가 참 주님의 교회라면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 사명을 가진 것과 똑같이 교회가 제사장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9:6에 "제사장"과 "나라", 두 명사를 베드로는 여기서 형용사로 바꾸어서, '왕 같은 제사장이다!' 하지요? 제사장과 나라, 두 명사를 "나라"와 "왕", 형용사로 고친 것인데 의미는 같습니다. '나라'나 '왕'은 다 국민을 다스리는 왕을 생각게 하는데, 그분이 그리스도이지 않습니까? 그가 다스리는 직분자입니다. 여기 교회를 두고 말한 것이니까 그리스도의 수족이 된 교회도 그리스도의 왕 직을 이어받아, 연합하여 수족노릇을 하는 직분자이지요? 공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인데 우리도 제사장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살던 우리를 구원하여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직분자들로, 제사장들로 삼으셨습니다. 공인이지요? 그런데 "제사장"이나 "나라"가 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뭐라고 했지요? 앞에서? 출애굽기 19:5에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여기 베드로도 8절에 보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하지요? 그런 후에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순종해야 교회가 제사장 나라로 유지된다는 말뜻입니다. 불순종하는 데도 여전히 '우리는 제사장이야,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수족이 된 제사장들이야!' 하면 안 되지요? 또 여기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하지요? 출애굽기 19:4에 '애굽에서 불러내셨다'고 하지요? "애굽"은 신약으로 말하면 "어두운 곳", 세상입니다. 구약의 애굽은 오늘 어두운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중요하게 볼 것은 "왕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지요? 이 말이 또 의미가 있는데요, 우리가 다 만인 제사장인데 자칫하면 개인주의로 나갈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개인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제사장들"입니다. 즉 개인주의 사람들이 한데 모래알처럼 모였다가 흩어지고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질서 있게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예배하는 유기체입니다. 몇 사람이 모였든지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듯 예배하는 직분자들입니다. 여기엔 개인주의가 물러나지요? 우리를 교회로 구원하신 주님의 뜻은 그리스도께 붙어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여 예배하는 직분을 수행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사명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하여 우리의 생활의 이런 저런 면이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잘못 살펴서 어제도 오늘도 작년에도 올해도 내년에도 매번 그 모양 그대로 예배하면 형식이 되기 쉽고 형식이 오래 지속되면 결국은 이스라엘 교회가 망한 것같이 됩니다. 여기 무엇보다 "제사장들"인 우리가 직분을 수행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유기체가 되어서 예배를 잘 드리면 주님께서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고 응답의 식물로 말씀을 주시지요? 그 말씀을 받아서 삶의 현실까지 나아가 제사장으로 살아갑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제사장 직분인 예배를 잘 드림으로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알 것을 알아서 아직 회개하지 않은 이방인도 돌이켜 구원하시는 주님의 수족이 됩니다. 제사장 직분은 이렇게 행합니다. 알면 행위로 말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지요? 그런데 이런 사명은커녕 교회가 바로 향상되지 못하면, 성숙하여 가지 못하고 정체되면 점점 어두워지고 어두워지면 결국 예배가 형식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의 현실이 피폐해지고 맙니다. 무엇을 알아야 제사장 노릇을 할 게 아닙니까? 제사장다운 인식이 서지 않으면 결국 제사장 직분을 잃게 되고 그러면 이방인들이 구원되는 길도 막아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바리새인들 보고 '너희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마 23:13)고... 그렇게 질책하셨지요? 오늘 교회도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를 긴장하게 합니다.

○꼭 있어야 할 직분

그래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그다음 28절을 꼭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여기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하는 이 직분은 무슨 은사이지요? 가르치는 은사이지요?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사도와 선지자 '직분'은 지금 없으나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는 지금도 있지요? 말씀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들이 되어 예배를 점점 더 잘 드릴 수 있지요? 그런 전진하는 터 위에서 우리의 삶에서도 파급이 되잖습니까? 그러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자는 어느 시대나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교회에 반드시 말씀의 은사자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하고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하면서 말씀의 은사를 첫째로 말씀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이 없으면 교회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 "사도나 선지자" '직분'은 그 당대에 있고 이어지지 않았지요? 사라졌지요? 그러나 사도적인 성격은 어느 시대 교회나 있어야 하지요? 사도나 선지자 직분 자체는 초기 당시의 교회에 필요한 직분입니다. 또 그 뒤에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 또 방언 통역하는 은사 역시 성경이 완결된 이후에는 사라졌지요? 이에 대한 문제는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느 시대 교회나 말씀 은사자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말씀사역자는 항상 있었지요? 심지어 다 타락하여 깜깜한 가운데 빠져버렸을지라도, 심지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나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도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는 항상 있었지요? 거짓 선지자가 득세하는 그런 어두운 상황에서도 참 선지자는 항상 있었지요. 특히 이 신약시대에는 주님께서 자기 몸에 연합한 교회에 항상 말씀을 대언한 목사를 세우셨습니다. 목사가 없으면 교회는 타락합니다. 어두워져버립니다. 직분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말씀을 사역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도 어느 시대에든지 주님께서는 말씀 전할 직분자를 불러내어, 전 세계 교회가 어두워져버린 중세 시대에도 말씀 사역자를 다시 불러내어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답게 서도록 어느 시대에든지 말씀사역자를 불러내십니다.

○모든 지체가 존귀함

또 하나 생각할 것은 그럼 목사만 있으면 다 되는가? 목사만 있으면,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다 되는 게 아니지요? 목사가 반드시 있어야 하나, 주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말씀이 전해지면 그걸 달게 받아서 깨달아서 옆의 형제들 지체들에게 영향을 주고 영양 공급을 주고받는 즉 진리의 말씀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는 지체들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전해져도 그 말씀을 깨달아서 주고받는 지체들이 없으면 교회는 교회답게 되지 않지요? 목사 혼자 똑똑하고 말아버리지요? 그래서 각양 은사가 다 필요합니다. 목사가 분명히 있어야 하나 여러 은사를 모든 지체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런 다 주신 은사들을 서로 보완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성숙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은사는 주님 것이고 주님의 교회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런 은사를 자기 자랑하는 데 쓰거나 우월의식을 갖는데 쓰면 안 되지요? 고린도 교인들처럼 자기 은사를 자랑하고 우월의식을 가지면 교회는 분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이 사도가 15절부터 가르칩니다.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발도 손도 다 몸에 붙어 있다는 말은 제사장 사명을 수행하는,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몸에, 교회에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따로 노는데 몸에 붙었다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예배를 잘 드리는 제사장 직분 수행을 위하여 연합되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성립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또 한 몸에 지체처럼 어떤 은사든지 우월한 것이 없고 열등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지체라면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제사장들입니다. 이런 제사장들 서로가 존중하고 아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서 서로가 시기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주님의 몸에 붙은 자신을 업신여기고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한 지체가 헌신하고 봉사하면 우리 몸이 유익하게 되는 것처럼 어느 지체 하나가 봉사하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요? 그렇게 해야지요? 자기 개인의 유익을 거두고 마는 것이 아니고 몸에 유익을 끼치는 봉사가 되어야지요. 그것이 참된 봉사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버리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봉사가 되면 그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또한 그 봉사한 지체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당연한 일이지만 감사의 심정을 가져야 옳지요?

이건 자기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슨 봉사를 하여 교회가 유익을 얻었다면 주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출발한 지체라도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봉사하면 이것은 주님께 감사할 일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출발을 해서 말씀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헌신하고 봉사하고 나가는데 오래된 신자들이 시기하고 질투하고 그러면 교회가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거지요? 과연 우리의 지체인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말씀을 순종하여 위로 주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데로 예배를 잘 드리는 데로 가야 하지요? 예배를 잘 드리는 쪽으로 상호 보완하여 동심협력하여 가야하지요? '너는 잘해라, 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가면 교회가 될법한 일이 아니지요? '우리끼리 잘하고 그래 너는 천천히 와라!' 이렇게 해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리스도 몸을 더욱 잘 이루는 지체로 있다는, 은사를 가졌다는 생각을 하면 다 귀하지요. 18절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몸을 말하는지, 교회를 말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막 섞어서 말하지요? 우리 몸에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 어떤 지체도 불필요하거나 필요 없는 지체가 하나도 없고, 또 모든 지체가 몸의 유익을 위하여 완벽하게 붙어 있듯이 교회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눈이 필요한 것처럼 귀도 필요하고, 냄새 맡는 코도, 손발도 다 필요합니다. 이 지체들이 연합하여 몸 전체가 원활하게 움직이고 활동하는 것처럼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는 누구든지 불평하거나 시기할 수 없고 업신여길 수 없고, 다 존중해야지요? 그렇게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것이고 지체인 우리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서로 손가락질 하고 있으면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는 것이고 이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몸의 지체를 들어서 교회에 주신 은사를 말하는 것은 어떤 지체이든지 다 존귀하단 뜻입니다. 물론 교회에 주신 은사 중에 아주 없어서는 안 될 은사가 있는가 하면 없어도 괜찮은 은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로가 없어도 교회는 되지만 목사가 없이는 교회가 안 됩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가르친 복음을 이어받아야 하는,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지키기 위한 직분의 독특함 때문입니다. 교회가 생명을 나타내는데 필수적인 것이 복음을 믿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 일을 말씀 직분자가 갖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고 지킬 목사는 없으면 교회가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가르치는 것은 주님께서 필요한 직분과 은사를 주셨다면 필요 없는 것, 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주셨을 때는 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데 요긴하게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2절에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쓰일 그릇

다시 정리하지요. 은사와 직분은 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제사장 직분을 잘 수행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은사를 주셨습니다. 인간 자기 영광이나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목사가 빠지기가 쉽습니다. 목사 직분을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하는데요, 목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직분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그 말씀을 잘 받아서 전하는 직분이기 때문에 귀하게 존중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사도들이 가르친 복음을 잘 이어받아야 할 직분인데, 교회가 사도성을 잇기 위하여 가장 필요한 직분이 목사입니다. 교회가 생명을 잃지 않게 하는 아주 중요한 직분이 목사직분입니다. 그래서 목사 자신도 목사 직분에 대하여 존중해야 하고, 주님께서 주신 권위를 잃지 않아서 주님께 명예가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겸손해야 되겠다고 '나는 목사가 아니고 그냥 선생이다, 선생이라고 불러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겸손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직분을 바로 생각지 못한 태도입니다. 주님께서 목사 직분을 세우신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서 그리스의 명예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런 특성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맡은 직분은 우리 모두가 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은 그 직분으로 군림하고 우월의식을 가지면 안 되지요? 만약 조금이라도 우월의식을 갖거나 명예직처럼 생각하면 주님께서 교회답게 세우려고 주신 임무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직분을 사사롭게 하여 주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됩니다. 회중들이 '좋다, 당신 목사 하라'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지요? 주님께서 교회에 필요하여 주신 직분입니다. 주님의 몸에 유익을 끼치도록 세우신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예를 세우려 하고 주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주님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만이겠습니까? 모든 은사가 다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누구나 다 목사와 똑같이 육체의 본성대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자기 개인의 유익이나 명예나 자랑을 위하면 교회가 바로 설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개인의 어떤 생각, 사고방식에 의해서 교회의 은사와 직분을 생각하면 이는 큰일 날 일입니다. 교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누구 하나가 자기 개인주의로 가면 이것이 그냥 그 사람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지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손가락 하나가 문제를 일으켜도 몸 전체가 신경이 가듯이 교회도 똑같습니다. 이런 점이 우리 모두가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고 무엇보다 주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다스림의 방식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한 점은 주님께서 은사와 직분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데, 그럼 어떻게 쓰시느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이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몸의 머리가 목사가 아니고 교황이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이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엡 1:22)로 계시면서,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려서 교회됨을 드러내십니다.

이를 굳이 행정이라고 한다면 신정정치이지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실 때 무엇으로 다스리는가? '성령'과 '말씀'으로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만 강조하고 말씀을 빼버리면 신비주의가 됩니다. 반대로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능력을 빼버리면, 하나님 없다, 하고 빼버리면 사람 생각대로 움직입니다. 합리주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이게 무서운 일이지요? 성령의 능력, 능력 하면서 말씀을 빼버리면 신비주의로 빠져버립니다. 대단히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신비주의자입니다. 하나님과 직통하는, 미신과 똑같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능력, 엄위로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지 아니하고 빼버리고 말씀만 추구하고 가면 우리 이성의 사고방식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합리주의 방식으로 움직입니다. 양쪽 다 극단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을 붙여서 생각한다는 것을 누차 말했지요? 말씀과 성령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교회는 사람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아, 우리 교회는 참 좋아, 우리 목사님은 참 좋아! 내 마음에 맞아!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움직여' 이러면 큰일이지요. 내가 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아,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나가니까 우리 교회가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돼!' 이러면 큰일입니다. 내 이 생각의 범위 안에서 교회가 왔다 갔다 움직이고 목사가 움직이고 우리 교우들이 움직인다면 내가 즐거워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다 이런 데 빠지기 쉽습니다. 첫째로 성령 하나님께서 경영하셔서 움직이는 교회인가? 성령 하나님께서 경영하셔서 움직이는 목사인가? 우리 지체들인가? 이점을 봐야 하지요. 나에게 유리 하냐, 아니 하냐, 이건 상관할 바가 아니지요? 우리는 자칫하면 나에게 유리한가? 이렇게 본능적으로 움직이지요? 그것을 접어두고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경영하시는데 여기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봐야하지요. 무엇보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그분이 첫째, 진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쓰셔서 우리 인식을 변화시켜서 주님께 부복하여 예배하게 합니다. 그렇게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서 주님께 공동으로 예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답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무슨 좋은 행정체계를 도입하여 은사나 직분 자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면 교회가 되는 줄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특히 필요한 직분이나 은사가 많지요? 그렇다고 그런 것을 더 추구하고 가면 결국 사람을 의지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도 필요하고 누구도 필요하고 어떤 직분도 필요하고 그러면 사람 생각대로 움직이고 사람을 좇아갑니다. 틀림없습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드릴까, 생각하지 못하면 사람 좇아갑니다. 우상을 섬깁니다.

물론 교회가 행정적인 것이 필요치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야 하기에 주님을 순종하는 질서가 서야 하지요? 무질서해서야 주님을 어떻게 순종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질서를 세워야 하기에 교회법이 필요합니다. 또 주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기 위하여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연합하는 연합체가 예배하기 때문에 질서 있게 예배를 해야 하고 그래서 예배모범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무엇에 근거를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자, 이것이 옳다!' 하는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사람 생각에 둡니까? 여론에 둡니까? 다수가 그러니까 그쪽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움직이면 교회는 사람 집단이 되고 맙니다. 예배 하나를 생각하더라도 '이렇게 드리는 것이 옳다, 찬송이나 기도, 헌금이 이것이 옳다', 하는 그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좀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우리가 말씀의 깊이에 따라서, 가령 말씀의 깊이가 얕으면 우리 생각, 사람의 생각이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연약한 줄 잘 알아야 하고 연약하다는 걸 잘 알면 신중해지잖아요? 어줍지 않게 몇 가지가지고 그걸 쥐고 가면 그걸 가지고 다 깨달은 것처럼 이리저리 재단을 하고, 그렇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 서려면 거룩한 질서가 서야 하기에 치리도 하고 예배모범이나 교회법이 필요한데, 그런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둬야 합니다. 교회법이나 행정 체제 자체에 의존하면 안 됩니다. 만약 법과 체제를 의존한다면 결국 사람 생각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생각에 의존하거나 사람의 모임, 질서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세우거나 필요한 행정 체제를 세워서 운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에다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 교회의 법이나 행정 조직은 아주 조촐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다 그렇습니다. 교회법이나 그런 행적 조직이 아주 조촐합니다. 직분 문제만 보더라도 목사, 장로, 집사뿐입니다. 여러 직분을 세우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그 모범을 볼 수 있지요?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주신 직분은 목사, 장로, 집사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교회법이나 교회 조직이나 운용을 위한 체제와 관리가 아니고 교인 개개인, 지체 개개인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13절에 "우리가...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주신 성령으로 형성되었고, 또한 성령으로 다스려서 교회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에베소서 5:18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충만히 받아라', 한 사도의 명령은 우리가 언제든지 성령의 충만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지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성숙한 위치에 올라서 신령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면 끊임없이 거룩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기 육체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기 속에 악한 본성을 찍어 누르고 죄를 이겨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성령을 의지하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저절로 되는 것 아닙니다. 느슨하게 해도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자연스럽게라는 말을 잘 쓰는데 이것이 육체의 소욕과 타협을 합니다. 동맹을 맺어요. 그래서 느슨합니다. 우선 편한 것 같지만 어렵습니다. 자꾸 갈수록 힘들지요. 그 때문에 사도는 "(22)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합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각자가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에 힘쓰는 것이 주님께서 각양 은사를 주신 목적입니다.

○변화가 필요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교회를 건설하신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그 사실을 잘 깨닫는 것이 필요하지요? 선한 사업을 하거나 무슨 종교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지요? 말씀으로 돌아가서 과연 그러한가? 내 자신은 과연 어느 위치에 있는가, 하고 살펴야 하지요? 그래서 깨달아야 합니다. 외부에서 큰 박해가 올 때는 교회가 똘똘 뭉쳐서 저항하고 싸워야 하지만 외부에서 물리적으로 오는 박해가 없는 시대에는 우리의 적이 누굽니까? 우리의 적이 누구예요? 우리 안에 육체의 소욕입니다. 우리 안의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을 살펴서 우리 안의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복하여 말씀을 늘 탐구하지요?

교회는 선한 일을 하거나 구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사람을 많이 모아서 예배를 드리고 구제 사업을 많이 하면 참 교회답습니까? 내가 어려움에 처해버리면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래서 교회가 구제를 좀 해주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사랑도 없는 것 같다, 하고 교회인가?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교회가 구제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각인들이 성령 충만한 인도를 받아서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 교회답습니다. 그것은 행정 체계를 아주 완벽하게 세워서 운영하는 것에 비해 외적인 모습은 부족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운영 자체가 잘 안 될 때도 있고 지지부진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면 누구는 뭐하고 누구는 무엇을 하고 딱딱 맡은 임무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 훨씬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개개인의 죄가 없어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개개인들의 죄가 점점 물러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것이 교회답습니다. 만약 그 반대로 죄는 그대로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실히 드러나지 않으면 효율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효율적인 것이 결국 각자의 죄 문제가 점점 물러나고 그 안에 거하는 죄가 씻어지고 점점 마음의 변화가 향상되는 데 쓰여야 합니다. 은사와 직분도 그렇게 쓰여야 합니다. 그게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잘 서 간다는 것은 결국 교회 안에 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사람 생각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이다, 그렇게 가자!' 거기에 개체의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능력입니다. 열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하면 열 사람 생각이 다 다르고 백 사람이 모이면 백 사람 생각이 다 다르고 그래서야 무슨 교회의 능력이 나옵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표준이 되어서 '저쪽이다' 하면 '그렇게 가자!' 하고 사람 생각이 다 사라지고, 그게 교회의 능력입니다.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에베소서 3:18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했듯이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이 성도 간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위하여 각자에게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은사와 직분은 결국 우리 안의 마음의 변화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은사와 직분을 받은 자들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것을 늘 인식하고 성령을 좇아서 순종하는 생활을 하고, 또한 우리 옆에 있는 전체 형제들이 다같이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쳐서 각자 변화를 받아서 마음에서부터 주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것이 상호간에 교류가 되면 그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고 전체가 그렇게 가면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이 세상만 알고 보이는 몇 가지 알아서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저희들을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주셨사옵나이다. 또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 땅만 바라보고 살던 저희를 높이 계신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발휘하고 살게 하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받아 이 생명을 잘 발휘하여 그리스도를 높이 나타나고 살도록 저희에게 은사를 주셔서 말씀으로 깨우치시고 성령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게 하시옵나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이끄시고 쓰셔서 영광을 나타내시고 거기에 접촉한 저희를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옵나이다.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진 저희가 이처럼 주님께서 쓰시는 그릇이 되어 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입어서 사는 저희들은 늘 주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서로 격려하며 주님의 몸이 점점 성숙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잘 나타내고 가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우리 안의 죄와 끊임없이 싸우며 이 죄가 힘을 쓰지 못하도록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주장하며 이끄시는 그 이끄심을 저희가 늘 받아서 변화되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각인들이 이러고 가는 가운데 연합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밝히 드러날 것이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