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
▲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를 주님께서 자기 몸이니까 양육한다는 것, 양육할 때 은사와 직분을 주셔서 하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좀 보겠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연합한 연합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교회'라고 합니다. 이 교회는 에베소서 1:4~5에 이미 창세전에 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보았는데,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가 참여하든지 하지 않든지 이미 택정한바 되어 존재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를 가담시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몸체에 결합시켜서 바로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두셨는데, 두신 이유는 할 일을 하라고 두신 거지요? 할 일이란? 그리스도를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신 것도 교회가 스스로 빛인 것이 아니고, 빛이신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빛이고 그러므로 교회를 빛 노릇한다, 할 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종교 사업을 하거나 착한 일을 많이 하여 덕을 나타내라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이 땅위에 그리스도의 몸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참 교회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기에 장차 하늘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도 능히 이를 자들입니다. 이들을 이 세상에 잠시 남겨두신 것은 그리스도를 선전하고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몸답게 그리스도를 잘 드러내고 삼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처음 설 때는, 세리와 죄인들이 처음 교회를 이룰 때는 '이게 무슨 그리스도의 몸인가?' 할 만큼 세상 것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나타낼 줄 모르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 잘 안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틀림없는 교회라 할지라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18.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했고, 골로새서 1:10에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며" 하고 바울이 기도합니다.

세리와 죄인이 연합한 교회라도 참 교회이면 점점 자라서 자라는 만큼 바리새인보다 훨씬 더 그리스도의 명예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로 존재하고 선다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이 교회가 자라가는 것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자라는가? 그 목표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랍니다. 지난번에 본 에베소서 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존재합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것을 목표하고 시작합니다. 교회가 형성되면 처음부터 모든 일에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세리나 죄인들이 형성된 교회 같으면 처음에는 바리새인보다 훨씬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생명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양육을 받아서 나중에는 바리새인들 보다 훨씬 더 나은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을 뿐 아니라 점점 더 성장하여 범사에,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랍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지식부터 그리스도처럼 아는 데로 자라면 그 자라는 만큼 이것저것을 그리스도처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자라지 않으면 명목만 그리스도의 몸이지 아무 것도 못 나타내게 됩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자꾸 자라야 이것저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가깝게 자꾸 자라가야 하는데 그래야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되어서 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다 순종하는 것처럼 교회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아무런 막힘이나 거리낌이 없이 아주 친밀한 교통을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순종하는 데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주님을 순종한 것처럼 교회도 그렇게 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장성함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 개인이 자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체인 교회 안에서 자라지요?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면서 교회 전체의 장성 안에서 개인도 장성합니다. 개인이 따로 떨어져서 자랄 수는 없습니다. 교회 행보 안에서 자랍니다. 주님의 참 교회라면 분명히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것'를 목표하고 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그리스도처럼 지식부터 자꾸 자라가야 하고, 그런 교회의 행보 가운데서 지체 하나도 같이 자랍니다.

그런데 개인이 자꾸 자라지 못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를 이루고 있는데도 개인이 자라지 못하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말씀을 공급하는 목사에게 책임이 있을 수도 있고 개인이 느슨하여 자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실정에서는 설교자의 책임이 다수 있습니다.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보다 말씀을 공급하는 강단의 문제가 큽니다. 무엇을 가르쳤기에 10년 20년 되어도 잘 모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아는 교인이 성실하게 교회를 출석하는데도 별로 안자라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충실하게 이루는 사람인데도 5년 뒤에 만나든 10년 뒤에 만나든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의 생각,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그것은 그 교회의 강단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강단의 설교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전체적으로 공급이 되는데도 안자란다는 것은 그 개인이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강단의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책임이 참 크고 또 어느 신자이든 그 지체의 자기의 책임이 굉장히 큽니다.

○은사 직분 주께서 세우시고 쓰심

주님께서 우리 개인과 교회를 자라도록 하시기 위하여 교회 안에 여러 은사와 직분을 두셨습니다. 목사만 두시고 설교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지요? 각양 은사와 직분을 교회의 성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십니다. 그래서 본문 22절에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지체가 다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어느 지체 하나도 필요치 않는 것이 없고 전체의 한 몸의 활동과 장성을 위하여 모든 지체가 다 보탬이 됩니다. 한 지체도 전체의 장성을 위하여 해악이 되는 지체가 없지요? 교회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지체가 다 활동하여 몸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지체에게 다 성령의 은사를 각양 베풀어 주십니다. 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합니다. 한 성령께서 여러 가지 은사를 지체에게 다 주십니다. 5절에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여러 가지 직임, 직분을 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교회는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와 직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답게 되도록 성령의 은사와 직임을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은사와 직임을 주시는 분이니까 그 은사와 직임을 사용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요? 6절 "(6)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와 직임을 사용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은사와 직임을 사용하셔서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은사와 직분이 있으니까 저절로 교회가 주님의 몸답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일을 이루셔야 주님의 몸답게 됩니다.

여기 4~6절을 잘 보면 '은사'와 '직분'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고, 주님께서 그 은사와 직임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답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은사와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지요? 은사주의자들, 직분주의자들은 교회에 직분과 은사를 잘 갖추면 저절로 교회답게 되는 줄 생각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삼직을 잘 갖추고 있으면 교회가 저절로 잘 굴러가는 것이 아니지요? 고린도교회를 봐도 그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에 1:7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믿음과 지식 같은 은사뿐 아니고 이적 행함과 병 고침, 방언과 예언 같은 은사들이 풍성했습니다. 또 1:5에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합니다. 고린도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각 방면에서 풍족하게 드러났습니다.

지금 여기 이 설교를 듣는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선 교회인데, 나중에 아볼로가 가서 복음을 더 전했습니다. 또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압니다. 다른 교회와 달리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1년 반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전하고 또 거기에 아볼로가, 또 베드로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것에 비해서 데살로니가교회 같은 경우는 바울이 삼주일 만 거기서 복음을 전했는데,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7.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믿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신자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고린도교회는 여러 사람이 가서 복음을 전했으나 어린아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온갖 분쟁과 파당이 일어나서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가 왜 그렇게 온갖 문제를 야기했습니까? 문제는 은사나 직임을 주시는 주님의 뜻에 접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은사와 직분이 잘 구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쓰시는 일에 접촉하지 못하면 교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바울은 은사와 직임을 말하면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은사와 직분을 사용하셔서 일을 이루셔야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상적인 활동을 하고 성숙하려면 성령의 은사와 직분이 꼭 필요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직분이 없으면 교회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은사와 직분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나 직분과 은사가 풍족할지라도 자동적으로 교회가 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사와 직임을 붙잡아 쓰셔서 능력을 베푸셔야 교회가 거룩한 교회로 섭니다. 교회에 은사가 충족하고 직분이 잘 갖추어져 신실하게 봉사하니까 '우리교회는 잘 된다' 하고 마음을 놓고 있으면 안 되지요? 또 그 반대로 무슨 은사나 직분이 잘 구비되지 못했으니까 우리 교회는 아직 멀었다, 하고 생각할 것도 아니지요? 은사나 직분자가 있고 없고에 따라 교회가 되고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나 사람을 의지하는 꼴이지요? 사람을 의지하면 이런 직분, 저런 은사를 찾고 또 찾아서 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지하게 되지요? 사람을 자꾸 찾아다녀요. 은사를 주시고 직분자를 세우시는 그분이 무엇을 위하여 은사와 직분을 주셨는가, 그래서 무엇을 이루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주시고 직분자를 세우시는 바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결국 주님보다 우상을 숭배하는 심정이 됩니다.

지금 오전에 우리가 사무엘상을 배우고 있는데 백성들이 왕을 구하지 않습니까? 세상 왕과 같은 왕이 있으면 나라가 평안할 줄 알았습니다. 왕이 자기들의 안전과 평안을 지켜줄 줄 알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울 왕이 없을 때보다 훨씬 더 못했지요? 블레셋이 쳐들어오니까 꼼짝 못하고 벌벌 떨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지요?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왕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켜 주셔야 안전합니다. 그 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은 세상 왕과 훨씬 다르지요? 세상 왕은 나라를 강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왕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등사하여 주야로 그것을 읽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을 먼저 백성들 앞에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백성을 선도하여 모든 백성이 주님을 최고의 위치에 두고 섬기고 살면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에 필요한 것을 다 내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왕을 구하려면 먼저 이스라엘 왕을 세우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분을 왕으로 공경하면서 그분을 순종하여 구해야 하지요?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보다 사람 왕을 세워서 그 사람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큰 문제점입니다. 그런 불신앙 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 주님이 두신 은사와 직분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사라는 것 자체도 사람의 역량이나 무슨 선한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직분도 사람의 생각으로 '이렇게 세우면 교회에 유익이 되겠다' 하고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지요? 주님께서 사람을 불러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교회에 충족하게 있어도 능력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능력을 베풀어 주셔야 교회에 유익이 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그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구하면 은사나 직분들이 교회를 복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망각해버리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홉 가지 은사

주님께서 교회를 주님의 교회답게 하시려고 성령의 은사와 직임을 주시는데,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지체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나누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8~9절을 보면 전부 아홉 가지 은사를 말하지요? 여기 은사는 당시 교회에 주신 은사를 대표로 말한 것입니다.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각양 은사가 있으나 고린도교회에 주신 은사 중에 아홉 가지를 대표로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은사를 생각할 때 첫째는, 초기 당시 교회에 필요하여 주셨음을 생각해야 하고 그러므로 둘째, 어느 교회나 다 필요한 것이 아니라 초기 당시 교회에 필요한 은사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 셋째, 어느 시대의 교회에나 반드시 필요한 은사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직분자는 어느 시대에나 다 필요하지요? 주님의 말씀이 없으면 주님의 지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대언하는 은사는 어느 시대에나 있습니다. 또 넷째, 모든 은사는 다 주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건설하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라는 것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이 개인의 자랑이나 우월의식, 혹은 열등감을 가져라고 은사를 주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할 수 있도록 주신 은사인 것을 알고 충실히 자기 은사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잘 건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세네가지 전제를 하고 은사를 봐야 합니다. 여기 12장부터 14장까지 볼 때도 이런 전제를 가지고 봐야 합니다.

8절을 보지요. "(8)어떤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 또 "지식의 말씀"을 말하지요? 지혜와 지식은 정확히 무슨 은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지혜"는 교회에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 같고, 그러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것을 잘 깨달아서 교회를 건설하는데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능력을 가진 은사인 것 같습니다. 또 "지식"은 이론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지혜나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서 교회를 세우고 형제를 세우는 은사입니다. 은사는 전부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도록 주신 은사이니까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은 다 교회를 바로 건설하는 데 쓰인 은사임에 틀림없습니다.

9절에 "다른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여기 "믿음"이라고 했는데, 모든 신자에게 있는 믿음과 좀 다릅니다(롬 1:17; 3:22).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든지 교회에 참여하지요? 교회에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은사로 말하는 "믿음"이란 '믿음의 용장'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믿음을 잃지 않고 그 어려운 난관을 다 뚫고 가는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교회원들이 큰 힘을 얻어서 교회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본 것이지만, 다윗이 그랬잖습니까? 사울 왕과 온 백성들이 골리앗 앞에서 40일간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 몰랐을 때 믿음의 용장 다윗이 나서서 단숨에 거꾸러뜨리지 않았습니까? 그 한 사람 때문에 온 회중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 믿음의 용장 한 사람만 있어도 교회는 큰 힘을 얻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은사입니다.

또 "병 고치는 은사를" 말했는데, 초기 때 있었던 은사인데, 요즘 우리나라에서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은사입니다. 당시에는 믿음의 은사를 가진 자가 병 고치는 일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10절에 "능력 행함"을 말하지요? 믿음의 은사를 가진 자가 능력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도록 하셔서 교회를 세우게 하신 은사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교회가 영광스럽게 출현한 그 영광에 삽비라 부부도 참여하고자 밭을 팔아서 헌금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어떤 일인지 얼마를 감추고 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가 그것을 잘 알고 '너희가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 하고 말하자 능력이 나와서 부부가 갑작스럽게 죽었지요?(행 5:4~5) 그런 것도 "능력 행함"의 은사입니다. 베드로의 능력 행함을 통하여 교인들이 두려워서 주님의 교회답게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 10절에 계속하여 "예언함", "영들 분별함", "방언" "통역"의 은사를 말합니다. 먼저 "예언"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물론 앞으로 있을 일을 미리 전하기도 했으나 신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가진 자들입니다. 오늘 목사와 비슷합니다. 다만 초기 당시는 오늘처럼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완성된 성경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주님의 말씀을 분별을 해서, 주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섞여 있으니까 그것을 분별해서 확정하면서 전해야 하는 것이 오늘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가 꼭 필요합니다.

또 "영들 분별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완성된 성경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여러 가르침을 분별해야 하는 은사가 필요합니다. 가령 금욕주의나 영지주의를 따르는 가르침은 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분별하여 거부해야 하지요? 그래서 당시는 "영들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습니다.

또 "각종 방언"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각종 지역 말을 하는 은사입니다. 외국말을 하는 은사이지요? 당시는 특히 사도행전 2장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말을 알아듣도록 각처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의 그 각 지역의 말을 하는 은사가 필요했지요? 그처럼 고린도교회도 예루살렘교회와 다름없는, 고린도교회는 이방 지역에 선 교회이니까 유대인들이 주축이 된 예루살렘교회와 다를 바 없는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방언의 은사, 즉 각 지역의 말을 하는 은사를 통하여도 알 수 있습니다. 또 고린도교회에도 말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각 지역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의 각양 말로 복음을 전하면 다 알아먹을 수 있었지요? 그래서 아마 방언의 은사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또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했는데,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통역하여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한 은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부 아홉 가지 은사를 말하는데, 당시 예루살렘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드러내고, 주님께 영광 돌리도록 각양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의 보편성 일시성

성령의 은사를 말한 다음 28절부터 여러 가지 직분도 붙여서 말합니다. 은사를 말하면서 직분을 말한 것은 직분도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한 대로 은사가, 어느 시대의 교회에나 다 필요한 은사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는 은사도 있는 것처럼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사도"나 "선지자"는 다 초기 당시 있던 직분인데 그러므로 지금도 사도나 선지 직분이 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행한 역할은 지금도 똑같이 있습니다. 사도나 선지자는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인데, 그 직분은 지금도, 어느 시대의 교회에도 다 있지요?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분이 없으면 교회가 주님의 말씀대로 서 갈 수 없기 때문에 말씀 사역자는 어느 시대의 교회에나 다 있습니다.

여기 28절에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하는데, "사도"는 초기 당시만 있었던 직분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어느 교회에나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높이 되신 복음을 다 전했는데, 그것이 신약성경을 형성하게 되었지요? 이런 사도들의 가르침의 터 위에서 교회가 서가야 합니다(엡 2:20). 사도들의 터 위에서 세움을 받지 않으면 교회라고 할 수 없지요? 사도들이 교회에 명령을 하고 교회는 그 사도의 명령을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받아서 순종해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사도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대로 사도 직분, 선지자 직분은 일시적으로 있었던 직분입니다. 또 그 밑에 "능력"이나 즉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의 은사, "통역"하는 은사도 당시에 예루살렘교회나 이방인 교회나 다같이 주님의 교회인 것을 드러내고 또 건실히 주님의 교회로 서도록 주신 은사입니다.

또 은사가,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나바 같은 경우는 사도의 반열에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지요? 특히 복음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믿음을 세워서 좋은 신자가 되도록 하는 은사를 발휘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37에 보면 교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자기 밭을 다 팔아서 사도들 발 앞에 둔 것을 보면 그가 남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은사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바울을 사도로 알고 예루살렘교회에 있는 사도들에게 데리고 가서 악수를 시키고 안디옥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한 사람입니다. 또 마가의 신실치 못한 일로 바울과 다툼이 있었으나 그를 끝까지 붙들어서 아주 요긴한 백성이 되도록 한 것을 보면, 바나바는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진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한두 가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사란?

중요한 것은 은사와 직분이 다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기 위하여 주시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은사'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재능일까요?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남달라서 무엇을 잘 만들기도 하고 손으로 하는 것을 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래 사람이 가진 이런 재능이나 무슨 기술 같은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까? 11절에 보면 은사는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천적으로 가진 재능이나 혹은 후천적으로 학습하여 얻은 무슨 재주나, 특기 같은 것이 성령의 은사는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특기나 재능을 교회 건설에 보탬을 주고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을 연마한다고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원칙적으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결합한 모든 지체가 다 이 은사를 가졌습니다. 마치 우리 몸의 팔, 다리, 머리, 허리, 손가락, 발가락, 이런 것이 다 은사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로 참여했다면 은사는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은사든지 반드시 지체의 역할을 다할 뿐 아니라 몸에 유익을 줍니다. 몸에 해악을 끼치지 않습니다. 몸에 해악이 되는 은사가 없습니다. 몸을 세워 가는데 해악이 된다 하면 그건 은사가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재능이나 재주가 사람 보기에 아무리 좋게 보여도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나오면 은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가 영광을 가로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재능이나 재주 같은 것이 그대로 교회에 쓰일 수는 없습니다. 성령께서 새로 주시는 것이라야 하고 그것이 발휘되어 그리스도의 명예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곧 그리스도의 것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생각할 때 본성적인 것을 앞세우거나 성령의 은사와 재능이나 성품을 구별 못하면 주님께서 주신 것을 소홀히 여기고 세상 것을 크게 여길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을 크게 여겨서 좇아가게 되면 교회가 거룩하게 서지 못하고 곁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답게 세우는 데에 쓰이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와 직분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12절부터 죽 읽어보면 은사나 직분은 자기를 나타내거나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주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그것이 크든 작든 귀하게 여기고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을 알고 주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대로 봉사해야 합니다. '왜 나에게는 보잘 것 없는 은사를 주셨는가?' 하고 불평하거나, 그래서 '내가 주께 속한 것도 아니고 교회에 속한 것도 아니다', 하고 가면 안 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또 보잘것없이 보이는 은사라고 소홀히 여기고 멸시하는 태도를 갖는 것도 잘못인 것을 가르칩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를 소홀히 하거나 멸시하면 결국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을 위하여 쓸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기를 높이는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높은 것 많은 것을 판단하면 교회 안에서 자랑하려는 태도를 갖게 됩니다. 크게 보이는 것이든 작게 보이는 것이든 주님께서 주신 것임으로 감사히 여기고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은사에 대하여 높은 마음을 가지면 다른 지체가 받은 은사에 대하여 폄하하고 멸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가 받은 은사가 주는 유익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21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또 26절을 같이 읽지요?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모든 지체 하나하나가 영광을 얻는 쪽으로 가면 모든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되지요?

주님께서 교회에 은사와 직분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답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답게 향상해 나아가는 데서 여기에 참여한 지체들도 향상해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몸답게 그리스도께 영예를 돌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서 여기에 참여한 우리에게도 영광입니다. 개인이 영광을 가로채는 데서는 교회에 유익이 아니고 교회에 해악을 끼치면서 자기에게도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생각하겠습니다.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연약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다 연합시켜 주셔서 연약한 중에도 그리스도께서 공급해 주시는 양식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하시옵나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여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연약한 저희를 다 구원하시고 이곳에 성령의 은사와 직임을 허락하셔서 이를 사용하여 교회됨을 드러내고 가게 하시옵나이다. 이런 주님의 일을 저희가 잘 깨달아서 성령의 은사와 직임을 어떻게 귀하게 여기고 가야 할지 알게 하여 주시고 또 이런 은사와 직임을 허락하시는 주님을 철저히 의지하면서 주님께서 어떻게 쓰시고 가시는지를 잘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사와 직임을 소홀히 여기고 교회를 허는 일이 우리 가운데서는 일어나지 않도록 주님께서 저희를 늘 양육하여 주셔서 주님을 두려워하며 섬기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