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지난번에 본문을 살피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인식 즉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할 필요를 말씀하고 그다음 본문을 조금 보다가 마쳤는데, 오늘 이어서 생각하겠습니다. 

○‘교회’라는 선지식(先知識)의 필요

‘교회’라는 말을 할 때에 우리 인식에서 얼른 떠오르는 것 하나가 단어 자체인데, ‘교회!’인데, 한문에서 온 말로 가르칠 ‘교’자, 모일 ‘회’자를 써서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 자체를 생각하면 복음을 가르치는 단체, 조직체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것도 어떤 강의를 듣는 것처럼 듣고 흩어지고 또 함께 모여서 종교행위를 하고 설교를 강의를 듣듯 하고 흩어지고 이런 조직체 정도를 교회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 얼른 떠오르는 것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특히 한국 땅에서 경험하고 있는 이 조직체,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고 집사나 무슨 여러 조직과 프로그램이 있는 이 조직체를 교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교회는 여타의 종교 단체처럼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 조직체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지요? 이 조직체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교회, 말씀에서 가르치는 주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걸 전제하고 본문을 봐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고린도교회를 봐야 하고 오늘 우리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라는 말을 쓸 때 차라리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이 더 이해하기가 좋은 말입니다. 본문 27절에 그러지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지체, 이 연합체가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라는 것을 생각하고 지금 고린도교회가 어떤지, 오늘 우리 교회가 어떤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를 종교 단체, 조직체, 우리가 지금 이루는 이 교회, 이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본문을 보면 잘못 보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전제하에 본문을 봐야 합니다. 다른 모든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지금 고린도전서 12~14장은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에 관하여 가르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에 대한 전제를 하지 않으면 결국 개인주의 적용을 하고 맙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그러니까 전면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 그리스도의 몸에 우리가 다 연합해서 여기 연합체로 있다는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 이 그리스도의 몸, 이것이 하나로교회라면 이 하나로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잘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분자의식을 가지고 본문을 읽고 들어야 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

1절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아니하노니.” 여기 사도가 “형제들아!” 한 것은 ‘고린도교회여!’, 혹은 ‘하나로교회여!’ 하고 ‘신령한 것을 너희가 알았으면 좋겠다!’ 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 하고 ‘신령한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첫째,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살게 하신다고 합니다. 지난번에 본 로마서 8:15에는 성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살게 하시는 것을 가르칩니다. 예수를 ‘주’로 성부를 ‘아버지’로 고백하는 이 신앙고백은 성령께서 생명을 주신 결과입니다. 우리가 다 죽어 있던 존재인데 성령께서 우리를 새로 지으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새 기능이 생기고 새 생명을 발휘하게 되니까 예수를 우리의 ‘주’로 알고 고백하고 성부를 우리의 ‘아버지’로 알고 고백하며 섬깁니다.

또 하나는 성령께서 이렇게 ‘신앙고백’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다 연합시켜서 계속하여 신앙고백하고 따르고 살게 하십니다. 예수 믿으면 그다음에는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이 교회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삽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지체들이 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항상 말씀을, 진리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쓰셔서 일하심으로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지요? 다른 말로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딱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십니다. 다스리셔서 성장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목적

바울 사도는 교회가 이 땅에 서게 되면 조직 활동을 하는 조직체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일하셔서 자라게 하신다는 전제 하에 성령의 은사를 4절부터 쭉 말씀합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도 실력이 없기 때문에, 성숙함이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지고 남용하고 서로 잘났다고 자랑하고, 개인주의 신앙으로 돌아서고 하여 결국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적 상황을 놓고 지금 사도가 성령의 은사를 아홉 가지 죽 말합니다. 여기 아홉 가지는 초기 당시 교회에 필요한 은사를 대표로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적 상황을 놓고 말한 것입니다.

은사가 무엇입니까? 은사가 무엇이지요? 첫째,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고 둘째, 왜 주시는가? 교회를 교회답게 건설하려고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건설하기 위하여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주십니다. 셋째, 교회답게 건설해서 뭘 하고자 하는가?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십니다. 이런 것을 전제하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도록, 또 교회답게 되어서 사명을, 시대적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을 전제하고 지금 성령의 은사를 쭉 말합니다. 개인이 무슨 재능을 쓰듯이 그래서 무슨 조직에 힘을 주듯이, 가령 돈이 많은 사람이 어느 조직에 있으면 많은 돈을 팍팍 써서 조직이 활발해지지 않습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되는 것은 그 개인도 드러나고 조직도 활발하게 되는 정도뿐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자기 은사를 개인적으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답게 성숙하여 할 일을 제대로 하도록 은사를 각각 주십니다. 

은사란 성령께서 주님의 몸인 교회를 건설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자기 재능이나 무슨 여러 학습이 된 그 개인의 탁월함을 잘 발휘하는 그 자체가 은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도록, 그래서 그 시대 사명을 수행하도록 각각에게 주는 것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개인이 자기 은사를 자랑하고 남용하고 함으로 은사를 주신 목적을 훼손했고 그 결과 분열이 되었습니다. 은사를 잘 몰랐습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잘못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은사를 주시느냐? 무엇보다 주님의 몸답게 서도록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새 생명을 가진 자라면 누구에게나 다 은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어떤 독특한 사람들에게만 은사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독특한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면 누구에게나 다 은사가 주어집니다. 그래야 누구든지 다 요긴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해 나갈 수 있지요? 

‘은사’ 할 때 주님의 몸답게 서는 데 쓰여야 은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지금 서로 분열하고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그래서 이게 그리스도의 몸인가? 의문이 들 정도가 된 것은 성령의 은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은사를 정리하여 가르칩니다. 당시에 필요한 은사를 대표로 아홉 가지를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려고 ‘성령께서 각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합니다(8~11절). 그러면서 12절에 ‘그리스도의 몸’을 또 이야기하지요? 그리스도께서 마치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많은 지체를 갖고 계시는데 이것이 ‘한 몸’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연합된 몸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다’ 합니다. 은사를 말하면서 ‘한 몸이다, 주님의 몸이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주님의 몸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는가? 13절에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유대인과 헬라인은 철천지원수지간인데, 또 종과 자유인도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인데 이런 관계,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을 마셨다’고 합니다. 이게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일이지요? 성령께서 행하시기 때문에, 재창조한 사실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을 마셨다고 하는데, 우리가 물을 마시고 또 마시고 하듯이 성령께서 계속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이끌어 나가시는 공동체라는 겁니다. 인도를 받고 또 받고 끊임없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가르침이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참 어려운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들으니까 하나의 도식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는 데서 이 사도의 가르침을 들으면 ‘그런가?’ 하고 교회는 또 다르게 이루지 ‘그리스도께 연합된 교회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자, 성령의 인도를 따르자! 그런 연합체이다, 성령의 인도를 쭉 따라가는 공동체이다!’ 하지 못합니다. 이는 내가 지금 이루고 있는, 경험하고 있는 교회가 내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루는 이 조직체를 나의 이성과 동맹을 맺어서 하나님께서 가르친 이 간단한 도식도 실현시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데, 성령과 말씀으로 인도받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보호하고 인도하고 성숙시킨다는 말이 그저 이상이 아니고 실지 말씀을 풍성히 공급하면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구현됩니다. 그럼에도 첫째는, 설교에 문제가 있으면 ‘아, 그것은 이상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고 ‘목사, 장로, 집사가 있는 우리가 이루는 이 조직체가 교회다, 더 이상 실현시킬 것이 뭐가 있는가?’ 하는 데서 못 벗어납니다. 

우리나라 현실의 첫째 문제는 강단의 설교 문제입니다. 설교에서 교회를 바로 말해주지 않으면 또 혹은 말을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한두 번 하고 말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교회를 못 내놓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설교가 전체적으로 전해지고 또 전하고 또 전할지라도 우리의 인식이 이 설교가 우리의 머리를 지배해서 변화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교회를 못 내놓게 됩니다. 

○성숙을 전제한 교회

13절에서 가르친 대로 우리의 신분 여하를 불문하고 과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지체로 활동한다는 것, 그리고 이 몸이 자라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뭐, 몇 명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열 명이든 혹은 천명이든 실력이 자라야 합니다. 성숙을 전제하고 실력이 성숙한, 실력이 장성하는 것을 전제하고 성령의 은사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현실을 놓고 지금 꼬집어서 지금 이야기하는데, 그걸 꼬집어서 그걸 지적하고 거기에 답하는 것에 급급하는 정도로 단답형을 주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교회는 성숙을 전제하고 성령의 은사가 주어진다, 하는 이것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데 그러므로 그분께 연합이 되었으면 생명적 결합이지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결합되었으니까 지금 당장 죽어도 천당에 갑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 가지고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된 교회에 내가 합당한 철차를 밟아서 세례를 받고 연합하면 지금 죽으면 천당에 갑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와 결합이 된 현실 교회가 없는데 나 혼자 힘을 주어 믿으니까 천당, 하는 데는 성경에 없지요? 그리스도께 연합한 교회에 속하지 않고 어떻게 천당 간다는 말입니까. 첫째, 생명으로 결합되었다면 과연 그런가? 하고 생각해야 하고 둘째, 희미하게 시작했을지라도 점점 명료한 데로 성숙해가야 합니다. 지식이 자꾸 자라야 합니다. 막연한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곳을 찾아보지요. 베드로후서 3장입니다. 베드로후서 3:18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여기 중요한 말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말이지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지체라면 ‘뭘 좀 알아야하겠다’는 것입니다. 10년 20년 되어도 아는 게 없어서는 이게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지체인가, 의구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연합된 교회는 또 여기에 속한 지체들은 다 지식이 자라는 것을 전제하고 연합이 된 거지요? 주님께서 천당으로 바로 쑥 데려가 버리시지, 교회로 구원하신 것은 이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교회에 참여시켰습니다. 구원시키셨습니다. 구원의 백성으로 자꾸 지식부터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좀 알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겠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리스도께 우리가 다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또 설교와 연관이 안 될 수 없는데, 설교를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면 되겠습니까?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설교 같으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지요. 뭐 내가 시간 있으면 출석해서 듣고 그렇지 않으면 안 들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면 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공동체가 그 말씀의 인도를 따라서 계속 중단 없이 전진해 나가는, 행보해 나가는 이 역사 속에 있는데, 역사를 지어나가는데 여기에 참여한 신자라면 설교를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일 수 없지요? 

또 한곳을 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바로 앞에 베드로전서 2:2 다같이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들같이”, 갓 태어난 어린아이는 엄마의 젖을 찾지요? 절실히 찾지요? 본능적으로 찾습니다. 그것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합이 되었으면 성장하려고 “신령한 젖”을 사모합니다. 갈구합니다. 이건 본능적이지요. 말씀을 전해보면 알지요? 그가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말씀을 전해보면 압니다. 생명이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자양이니까 쏙쏙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점점 인식이 변화되고 자랍니다.

여기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지요? 여기 ‘구원’은 중생이 아니지요? 완결되는 구원을 말합니다. 영광의 나라, 천당에 이르게 되는 완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그렇게 천당에 이르도록 영광의 나라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것이 신령한 젖이라고 하지요? 신령한 젖이 무엇입니까? 신령한 젖은 바로 앞에 말씀, 1장을 죽 봐도 그렇고 여기 영광의 나라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도 바로 양식이지요? 신령한 젖,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이지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점점 성숙하는 것이 일생동안 이루어져야 할 과제인 것을 알 수 있지요? 

○활동, 장성

‘생명’ 하면, 생명이신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되었으면 생명이 연결이 되었는데, 그래서 우리가 새사람이다, 거듭났다, 재창조되었다, 새 생명을 가졌다, 하는 말을 쓰는데, ‘생명’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나지요? 활동한다는 것과 자란다는 거지요? 어떤 생명이든지 활동하고 자랍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것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라는 것은 더 더욱이 없지요? 생명이 있다는 특징은 활동한다는 것이고 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일체로 연합했으니까 활동하고 자랍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양육을 받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강조하고 힘주어 말해도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안자라면 의구심이 듭니다. 아, 중생한 자가 아닌가? 그렇게까지 의심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십자가에 죽음을 내어주고 지체들을 연합시키셨는데 이것을 지상에 서 있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그리스도 안에서 양육을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양육을 하실 때 무슨 요술을 부려서 자라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양을 공급하시는 것이 있고, 그 자양을 소화하고 각 기관에 전달이 되어 지체가 다함께 한 몸으로 활동하고 자라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잘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자양분을 공급하십니다. 자양을 공급하신다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고 거기에 모든 지체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신데, 생명을 연결해 주셨고 거기에 생명의 자양을 계속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자랍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럼 주님께서 자라게 하실 때, 교회를 자라게 하실 때 신령한 젖인 말씀을 공급한다면 어떻게 공급을 하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무슨 요술을 부려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세워서 하십니다. 말씀 사역자를 세우신다는 원칙을 세우셨습니다. 본문 28절에도, 27절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야기하고 28절에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세째는 교사요...” 여기까지가 말씀 사역자, 은사입니다. 최초 교회가 설 때부터 말씀사역자인 사도나 선지자, 교사를 세우셨습니다. 한곳을 또 찾아보지요. 

에베소서 4장입니다. 에베소서 4:11을 보시지요. 좀 전에 본문을 본 것은 고린도교회의 은사를 이야기하면서 말씀사역자를 이야기한 것을 보았고 여기 11절 여기는 에베소교회의 은사를 말하는데,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은사, 직분자를 선물로 주신다고 하는데 여기에 말씀 사역자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사도나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는 다 말씀을 맡은 은사자입니다. 이런 말씀사역자를 왜 주시는가? 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그러지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각양 은사를 주시는데 첫째, 말씀 사역자를 이야기합니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자라는 것을 전제하고 말씀 사역자를 첫째로 세우고 각양 은사를 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을 목표하고 교회가 섰고 각양 은사를 주십니다. 16절을 보지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 “그에게서”란 “그리스도에게서”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서로 연락하고 상합합니다.’ 자라게 할 때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말씀사역자를 세워서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16절에서는 서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는다고 합니다. 바로 앞에 15절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 하고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하는데, ‘자랄 때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운다’고 합니다.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조직체를 움직이는 것같이 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리스도의 양식이 공급되는 터 위에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자랍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몸답게 성장하는 것을 전제하고 우리에게 각양 은사를 주시는데 그 각양 은사 중에 그리스도께서 자양분을 공급하는 즉 말씀을 맡은 사역자를 은사자로 세워서 양식을 공급하는 것을 밑바탕에 깔고 각양 은사를 다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몸답게 세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답게 자라가는 것이 아니면 개인은 의미가 없지요? 조직체로 활발한 자체로도 의미가 없습니다. 여타의 종교와 차이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할 수 있기 위하여 결국 진리의 양식으로 공급되는 강단의 설교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요? 말씀이 공급이 되면 교회는 자라갑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살지요? 밥을 먹으면 장으로 들어가 소화가 되어 영양소가 공급이 되어서 모든 지체에게 다 미치지 않는 곳이 없지요? 손가락 끝은 저 멀리 있으니까, 발가락 끝은 저 멀리 있으니까 혜택이 없고 머리카락 끝에는 더 떨어져 있으니까 혜택이 없고 하는 게 아니지요. 몸 전체가 혜택을 누립니다. 그렇게 하여 온 몸이 생명을 유지하고 활동하고 자랍니다.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답게 서서 성숙해 가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신령한 젖인 설교가 전해진다는 전제하에, 설교가 생명의 양식으로 전달된다는 전제 하에, 그것이 전달되는 것은 각 마디를 통하여 오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지체를 통하여 나에게 오기도 하고 말씀을 맡은 직분자를 통하여 가기도 하고 나를 통하여 옆의 교인에게도 갑니다. 지체가, 지체 하나가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 그를 통하여 나에게도 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체가 장성합니다. 이런 점에서 지체가 없이 내가 자라고 서고, 교회 전체가 자라고 서는 법은 없습니다. 개인이 또 따로 서 나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가 되어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습니다. 

○은사의 중요성 - 요긴함과 차이

이런 점에서 은사는 다 요긴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1절에 보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여기 눈, 손, 머리, 발, 등은 지체인데, 다양한 은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은사와 직분이 다양하다는 것을 표시했는데, 눈이나 손이나 머리나 발, 이런 몸의 지체가 있어서 활동하고 몸을 자라게 하지요?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와 직분이 있고, 이것이 서로 유기적으로 생명의 일체로 연합하여 교회가 자랍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자라게 하는 일에 모든 지체들이 다 필요하고 요긴합니다. “(22)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연합되어 지체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불필요한 사람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 “약하게 보이는 지체”라고 하지요? “약한 지체”라고 하지 않고 “약하게 보이는 지체”라고 한 것은 사람이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약하게 볼뿐인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긴합니다. 왜 그렇지요? 그리스도에게 연합이 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지체가 다 귀합니다. 다 교회를 교회답게 성숙하게 하는 요긴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활동하고 성장하는 데 필요치 않은 지체가 있나요? 우리 몸의 지체, 팔 다리 머리 허리 다 필요하지요? 그런 점에서 다 요긴하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몸답게 하는데 다 필요한 지체이기 때문에 요긴하다는 말을 씁니다. 그리스도의 몸답게 서는데 해악을 끼친다고 하면 요긴하다는 말을 쓰지 않지요? 다 그리스도의 몸답게 됨됨이를 갖추어 가는데 다 기여하기 때문에 지체이고 그 지체는 다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모든 지체에게 은사를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은사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있지요? 교회를 장성하게 하는 요긴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차별이 없으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몸도 손가락 하나 없어도 좋다고 할 만한 것은 없지요? 손가락 하나 없으면 장애인이라고 하지요? 그런 점에서 다 요긴합니다. 그러나 손가락이 하나 없어도 살수는 있지요? 만약에 심장을 들어내 버리면 몇 분도 가지 않아서 죽을 것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지체들에게 각양 은사를 주시는데, 그래서 다 요긴한데, 이 요긴한 은사들 중에 없으면 안 될 은사가 있지요? 다 요긴한데 없으면 안 될 은사는 첫째는 말씀을 공급하는 대언자인 사역자가 없으면 교회가 살아갈 수가 없지요? 그런 점에서 은사는 다 요긴하나 차이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장성하게 하는 방도

에베소서 3장을 한번 찾아볼까요? 3:14부터 보겠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사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데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요? 또 “각 족속에게” 하는데, ‘족속’은 ‘권속’, ‘가정’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 즉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는 가정입니다. 땅에는 교회에 속한 참 백성이고 하늘에는 옛날 아브라함이나 바울 같은 이름이 있는 사람과 또 무명의 믿음의 선진들 다 있지요?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위에 걸쳐 있는 이 가정의 아버지로 계십니다. 그 아버지께 사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19절까지 쭉 읽어보면 기도의 요지가 18절입니다.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이것이 요지입니다. 사도가 구하는 요지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절에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충만”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충만이 임하면 결국 구원이 완성되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 자답게 그분의 성품이 온전히 나타낼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하게 나타냅니다. 영광의 나라에 가면 그렇지요? 그러면 과연 하나님의 성품을 충만히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충만히 보이셨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성품의 충만을 십자가로 나타내셨고 성도 각각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하나님의 성품에 가담한 거지요? 다만 충만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충만의 요소가 신자 안에 있으나 아직 차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사도는 신자에게 이미 있는 것을 가득 차게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시에 헬라인도 죄인도 종도 하나님의 신의 성품이 충만이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서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며 살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충만이 에베소교회 안에 거하게 해 달라고 바울이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방식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나님의 성품이 그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성숙한 교회로 나타납니다.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야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계명을 지키는 성숙한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18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때 “모든 성도와 함께” 깨닫는다고 하지요? 모든 성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는 촉각을 곤두세워서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지 않도록 깨우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함께 깨달아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든 성도”란 첫째,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 가운데 내신 모든 성도를 말할 것입니다. 거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런 사람들, 또 무명의 성도들. 

또 “모든 성도”는 둘째, 에베소 교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말로 하면 하나로교회에 속한 교인을 말하지요? 자기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배웁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회개하고 믿음을 따라 사는가? 무슨 어려움 가운데서도 어떻게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사는가?’ 그런 것을 보지 않습니까? 또 말씀을 지키려고 무슨 환란이나 시험이 올지라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믿음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먹을 것임을 것이 부족해도, 재물이 없어도 그런 염려 때문에 할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서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하며 사는 것을 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친화력이 있어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봅니다. 혹은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할 때는 답답해하고, 어떻게 하면 말씀을 잘 깨달을까, 하고 노력을 합니다. 또 깨달았을 때는 기쁨으로 그것을 속히 실천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크다 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할 때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자양, 말씀의 자양을 공급받아서 인식을 하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 그리스도의 사랑 아래에 실천하고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지체들이 다 보고 상호 작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셔서 지체들이 믿음 있는 이런 저런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데 그런 은사 발휘를 보고 다른 지체들이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사람이 새롭게 되고 사랑을 나타내고 살게 되는 것을 지체들이 보고 다 배웁니다. 그런데 이런 지체들이 한 사람도 없다, 너도 나도 ‘말씀은 그렇고, 현실은 그렇지 않아’, 하고 살면 교회는 안자라지요? 자랄 수 없지요? 첫째는 말씀의 자양을 공급받을 때 인식이 변화되고 한 사람이라도 깨달아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을 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배워서 ‘아, 나도 저렇게 살아가야겠다’, 하고 상호 상승효과가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자라갑니다. 

무슨 학식이 많아서 무슨 재물이 많아서 은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어도 믿음을 좇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치는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 배우지 못하여 무식하고 아주 각박하고 고약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말씀이 잘 받아서 지식이 변화고 믿음이 생기고 그래서 늘 예배 때 단정히 드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믿음을 따라서 살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아, 그리스도께서 저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신 결과 저렇게 변화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걸 보고 또 배웁니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 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호 작용해서 합력해 나갈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신자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방도가 되어서 마음이 새롭게 되고 믿어 순종합니다. 그러나 둘째,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배워서 온전하게 됩니다. 말씀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데서 교회가 서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혼자 서 갈 수 없고 교회가 없으면 도무지 자랄 수 없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따라서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목사가 잘나고 잘 갖추었다고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께서 교회에 내리신 직분과 은사에서 목사가 굉장히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신도 교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지 못하면 목회를 못합니다. 설교를 잘하면 끝나는 게 아니지요? 그 설교를 듣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변화되는 그런 지체 하나하나를 보고 목사도 배웁니다. 목사도 교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전체가 다 자라도록 하는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교회답게 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없어서, 저 사람이 성장하지 않아서, 저 사람이 변화되지 못하여서가 아니지요? 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갈 때 주께서 이 사랑을 나타내게 하셔서 옆의 지체들이 배우고 상호 작용해서 같이 자라지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시고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믿음과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살게 하셨사옵나이다. 이로써 저희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여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나라로 서 가게 하시옵나이다. 이것으로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나라로 전진하게 하시옵나이다. 주님,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진리의 양식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고 가는 것을 통하여 지체들이 상호 배워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답게 성숙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충만을 받을 수 없사옵나이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가는 것이 지체로서 본문을 다하는 것이옵나이다. 주님, 저희에게 본분을 다 행할 수 있는 깨달음과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주께서 주시는 기쁨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