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목사(하나로교회)

개인주의 교회(신앙)는 없다

그래서 초월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성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내어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처하여 죽으면서 흘리신 대속의 피 공로를 믿고 나오는 자들을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도 개인주의로 산다면 그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개인주의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개인주의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사실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보니 다른 이도 있고 같은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체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입니다. 이걸 보고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지체는 철천지원수간에도, 유대인과 헬라인도 하나라, 이것이 교회입니다. 본문 13절에도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합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이제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 특히 개인주의로 살아오던 방식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는 방식으로 바꾸어지는 의식이 세례입니다. 단지 의식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성령으로 나를 연합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개인주의가 있습니까. 왜 교회를 이루면서도 개인주의가 팽배한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모르고,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결국은 강단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령하게 연합하도록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회를 인식할 수 있도록 설교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떤 본문에서도 개인주의 도덕주의 말씀은 한곳도 없습니다. 전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놓고 계시하신 것이 성경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그 한 개인에게 관계하신 것 같은 말씀도 그 사람 뒤에는 공동체가 있지요? 족장 교회라는 그 교회를 대표로 세워서 언약하고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렇게 살고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렇게 하자!’ 하고 모범적인 설교를 하면 안 되지요? 모범적인 설교를 하면 개인주의 신앙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계명까지도 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계명도 전부 도덕적 강론이 아니지요? 다른 종교에서도 할 수 있는 도덕 설교를 하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거지요? 거기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공동체, 천국을 증명하는 기관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천국을 증명하는 교회를 내놓을 수 없으면 종교 단체에 불과하지요? 그러면 여타의 종교에서도 다 할 수 있는 것을 할뿐입니다. 여기서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은 정체불명의 교인이 되고 천국백성인 것도 구원도 확증할 수 없게 됩니다. 교회가 정체불명이고 주님의 교회인지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데 어찌 그 안에 속한 교인이 구원을 확증할 수 있습니까. 참 교회가 없는 개인주의 구원은 성경 어디에도 가르친 바가 없습니다. 교회가 없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개인을 불러내실 때 바로 천당으로 데려가 버리지 않고 전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연합한 교회로 구원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사명을 교회와 함께 행하다가 영원한 하늘나라로 갑니다. 짧은 생이지만 천국의 직임을 맡아 한 부분을 담당하고 오라고 교회로 주님께서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개인이 착한 일을 하고 사명을 수행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 연합하여 사명을 수행합니다. 주님의 교회와 함께 지체로 행보하는 중에 주님께서 오시면 교회 공동체가 다함께 영광의 혼인잔치인 식탁에 앉습니다. 

그런 교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 성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설교를 하면 아무리 해도 개인주의 신앙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고 그렇다면 개인 구원도 불확실합니다. ‘예수 믿고 천당, 끝!’ 하는 게 아니지요? 조금만 정신 차려서 성경을 보아도 개인주의 구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개인이 천당 가서 거기서도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벌써 천국 백성이냐, 아니냐? 결정이 납니다. 교회를 이루는 이 교회에서 결정 나는 것입니다. 

○본질의 교회를 깨달아야

본질의 교회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첫째, 설교하는 사실이 있어야 하고, 둘째, 깨닫는 대로 연합체를 그리스도의 몸답게 잘 이루어가야 현재 우리의 문제와 부족이 무엇인지도 알고 주님께 간구할 수 있고, 주님의 말씀을 더 가르치고 배우게 되고 그래야 성장합니다. 이 본체의 교회를 생각지 않고 이루면 어디로 갈지 몰라서 이렇게도 했다가 저렇게도 했다가 중구난방으로 이루고 가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일이지요? 우리의 약점을 잘 알아야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더욱 주님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정말 주님께 연합된 생명체라면 주님의 말씀을 잘 듣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 잘 받습니다. 요한복음 10:27에 예수님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몸,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된 생명체라면 반드시 주님의 음성을 알고 따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음성을 설교로 들려져야 하지요? 설교 아닌 다른 방식으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길은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교회를 알게 하는 설교가 들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본질의 교회를 인식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루아침에 깨달을 수 없으니까 말씀을 늘 가르치고 배워서 본체의 교회를 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문제 우리 교회의 약점을 알고 고쳐갈 수 있고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이런 방향도 잡지 못하고 가면 어디로 갈지 몰라서 방황하고, 결국 허망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착하냐, 안 착하냐? 좋은 교회냐, 아니냐를 논할 때가 아닙니다. 어느 교회 목사가 도덕적인 문제가 있고 어느 교회 목사가 윤리적인 문제가 있고 하면, 이렇게 하면서 시간 보낼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교회가 무엇인가? 그것을 고민할 때입니다. 우리나라에선 교회의 본질,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깊이 고민하고 주님의 교회를 건설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으면 내 생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본질의 교회를 인식하고 성경을 읽고 해명해야 합니다.

○신령한 것

1절을 보시지요.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 앞에 편지를 쓰면서 “형제들아!” 하고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신령한 것’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하나님께서 교회에 내리시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많은 문제를 알고 있는 사도가 지금 여기 와서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라!’ 하고 가르칩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우리에게도 역시 ‘신령한 것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2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합니다. 고린도 교회원도 전에 세상 사람으로 살고 있을 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 이끌림 받아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지요? 우상이 무슨 말을 하거나 힘이 있어서 이끌고 간 것이 아니고 사람이 말 못하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사람으로 살고 있을 때 이 말 못하는 우상에게 이끌림 받아 살았습니다. 특히 요즘 같이 발전한 시대에는 기계우상 돈 우상, 명예 우상이 팽배해 있고 이것은 다 개인주의 우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개인 자기 힘으로 살겠다는 이 우상에서 살던 우리였습니다. 

그런 우상에 빠져서 살던 것을 지적하면서 3절 후반부에 “(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하고 말씀합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알아야 하겠다’ 하고 우상과 대비하여 성령을 말씀합니다. 전에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으로 구출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라 하고 고백하고 나오게 하는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1절에 “신령한 것”이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상은 말을 할 수 없고 무슨 힘을 쓸 수도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나 성령은 하나님이신데, 그분이 하시는 일이 곧 신령한 것입니다. 지금 ‘너희 고린도 교회원들아! 그러하냐?’ 하는 식입니다. 오늘 ‘하나로교회 너희도 성령께서 하신 결과 그리스도를 주시라 부르며 예배하느냐, 그리스도를 주로, 너는 종으로 부복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여기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첫째,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있게 합니다. “(3)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이시라 우리를 새로 나게 하셔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전에는 우상을 섬기고 살았으나 이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알고 나는 ‘종’처럼 예수님을 섬기고 살게 하십니다. 이런 사람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확증합니다. 로마서 8:15에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합니다.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께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첫째, 우리를 재창조하여 아바, 아버지라, 성부를 아버지라 예수를 주시라 하고 신앙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또 둘째, 성령께서 ‘아버지’라, ‘주’라,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을 한 번만 딱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고백하게 하십니다. ‘아버지’고 ‘주’로 고백한 자를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늘 현재도 여전히 ‘아버지’라, ‘주’라, 하고 고백하고 순종하고 살게 하십니다. 그 현실은 성찬으로 확증합니다.

이렇게 세례와 성찬으로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살도록 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항상 주님의 말씀 앞으로 인도하셔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더 알아가게 하십니다. 한번 힘주어 고백하고 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하여 고백하고 살도록 그리스도를 풍성하게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13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십니다. 여기 “장래일”이란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시는 일인데,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성령께서 오셔서 자꾸 가르쳐 주심으로 풍성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아는 거기서부터 풍성한 진리를 깨달음으로 우리가 계속하여 예수를 ‘주’라, 하나님을 ‘아버지’라 능력 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능력 있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말씀을 자꾸 풍성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정체되어 있으면 그 고백이 희미해져버립니다. 능력 있게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주’라 성부를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게 하셔서 주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고 교회를 형성하게 합니다. 또 계속하여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게 하시고 성숙하게 하십니다. 이런 일이 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지요?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성부를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이런 자를 성령께서 내주의 사역으로 평생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 살게 하십니다.

○성령의 은사와 직분

이어서 사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4절부터 쭉 말씀합니다. 이 성령의 은사는 교회가 주님의 교회답게 향상하도록 주시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를 우리가 잘 깨달아야 주님의 교회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은사를 주시는 것은 교회가 주님의 교회답게 성장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8절에 “지혜의 말씀을, 어떤이에게는 ... 지식의 말씀을.” 9절에 “다른이에게는 ...믿음을...” 등등, 당시 교회에 필요한 은사 아홉 가지를 쭉 말하고 11절에 이런 은사를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합니다. 교회에 나누어 주시는 ‘은사’도 신령한 것 즉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요?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에 이렇게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몸답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 연합된 몸답게 하시려고 각양 은사를 다 나눠주십니다. 은사와 직분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구현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은사주의자들과 같이 자기 자랑을 하고 힘을 드러내고 무슨 개인의 위력을 나타내려고 주신 것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몸체를 거룩하고 실력 있게 성숙하도록 은사를 주신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첫째, 은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가 그분의 지체답게 존재하고 살아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답게 서 가려면 저절로 되거나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지요? 각 지체들이 자기 위치를 잘 지키면서 건실하게 서가면 되지요? 그러라고 각 지체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베푸십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처럼 은사를 가지고 자기 자랑을 하거나 자기 영광을 삼기에 바울은 ‘그것이 아니다, 각각 은사를 주신 것은 서로 상호 보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실력 있게 건설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몸답게 되도록 교회에 성령의 은사를 주실 뿐 아니라 또 여러 직임도 주십니다. 27절부터는 교회에 직분을 죽 말씀하는데 이 직분도 역시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성령의 은사를 주시고 또 직임자도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이 은사를 잘 사용하셔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일하셔서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활동하고 자라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은사와 직임을 교회 안에 주시고 사용하셔서 교회를 교회답게 건설해 가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로 연합하면 저절로 완전케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자라되 지체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몸답게 장성해야 하기에 주님께서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바울이 신령한 것,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를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하는데, 우리 ‘몸’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합니다. 12절을 보지요.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교회도 그러하니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합니다. 교회를 앞세운 것이 아니지요? 그리스도를 앞세우는데, ‘그리스도’가 앞세워지지 못하면 참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연합한 교회이니까 그분이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지체요 분자인가? 생각하고 거기에 부응해야 합니다. 아직도 육신은 개인주의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고 실지 개인주의로 돌아서기도 하기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으로 가지고 계신다, 하고 가르칩니다. 우리 사람의 몸처럼, 지체를 많이 가진 것처럼 그리스도도 지체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게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생각지 않고 교회를 이루면 판판이 실패합니다. 이 교회를 생각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면 개인은 구원 보장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전면에 모셔놓고 우리는 그분께 머리를 조아려 경청하고 따르려는 자세를 취하고 가면 주님의 교회로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전면에 모시고 가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람 교회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교회가 무엇이냐? 유대인과 헬라인은 도무지 하나를 이룰 수 없는 원수인데, 이 원수들끼리도 하나를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사람 상호간에 가로막힌 담은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의 잘잘못 때문이 아니고 위로 하나님 앞에 놓인 죄 때문입니다. 그 죄악의 담을 그리스도께서 헐어버리셨습니다. 

찾아보지요. 에베소서 2장입니다. 에베소서 2:12부터 읽겠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여긴 교회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말입니다. 단지 우리 가정과 같은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명 공동체입니다. 철천지원수지간도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목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사그라들게 한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화목한 자들과 화목공체를 이룬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합니다. 당시에 주인과 종은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언제나 종ㆍ주 관계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보니 주ㆍ종 관계가 허물어지고 형제입니다. 굉장한 일이지요? 종은 종일뿐 당시엔 마치 가축처럼 대해도 주인을 탓하지 못하는 시대인데 한 가족 형제로 사는 충격적인 파괴입니다. 당시 시대 현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그러하고 실지 그리스도와 연합했으니 주ㆍ종은 없는 것입니다. 굳이 종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종만 있습니다. 이런 큰일을 에베소교회, 고린도교회, 주님의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주인이 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합니다. ‘성령을 마신다’는 것은 마치 물을 마시는 것처럼, 물을 한번 마시고 말지 않지요? 또 마시고 또 마시고 또 마시는 것처럼 성령을 계속하여 의지하고 계속하여 인도받아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끝. 성령은 어디간지 모르고, 인도받을 줄 모르고 사는 것, 이런 구원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의 인도를 따른다는 것이 성령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는 계층이 없고 차별이 없고, 빈부귀천이 다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의 피 흘림 은혜로 사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으니, 재창조되어 영생을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몸을 잘 이루는 지체입니다. 다만 성령을 늘 마시듯이 그분 인도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책임을 다할 뿐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시지요.

○기 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고린도교회 앞에서 가르친 사도의 복음을 오늘 저희에게도 가르쳐 주셔서 저희가 하늘의 그리스도께 연합된 존재로 이 땅에 남아 주님의 교회를 형성케 하신 은혜를 알게 하시옵나이다. 저희는 옛 것을 다 버리고 항상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이루고 그러기 위하여 본체의 교회, 주님의 교회를 잘 아는 데 열중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지체들에게 항상 보호와 양육을 위하여 성령의 은사를 주신 사실을 저희가 잘 인식하고, 은사와 직임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교회, 본질의 교회를 바로 알고 그 방향을 잡아 나아가도록, 또 주님의 교회답게 성장하도록 은사와 직분을 주신 것을 늘 의식하면서 더 배울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단 두 사람도 하나 될 수 없고 개인주의 성향을 나타낼 뿐인 저희를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시고 내주의 성령으로 이끄시오니 감사하옵나이다. 

오늘 무엇보다 성령 안에서 한 세례를 받아 한 몸을 이루게 하신 저희 형제들을 서로 사랑하고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주인의 담이 다 허물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보혈을 늘 의지하고 일치하고 생명적 결합을 한 가운데 주님의 명예를 위하여 이 교회를 건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직도 저희는 연약하오니 주님,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깨달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