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긴밀한 사귐 가운데 들어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임을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교회’를 좀 더 생각하겠습니다. 

○본체의 교회

본문을 보기 전에 생각할 것은 ‘본질의 교회’, ‘본체의 교회’입니다. ‘교회’하면 우리나라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 우리가 지금 보고 있고 이루고 있는 이 교회를 생각하고 성경을 보려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를 더 깊이 못 깨닫게 됩니다. 이미 생각한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공동체입니다. 

12절,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리스도께 연합된 교회를 말하는데, ‘교회도 그러하니라’ 하지 않고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하지요? ‘교회가 하나이고 많은 지체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몸으로 갖고 계시고, 교회는 많은 지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앞세워서 말하지요?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기 몸으로 가지고 계십니다. 이 교회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몸, 이것이 교회입니다. 

11장에서 성찬에 대해 생각했듯 성찬과 세례가 ‘그리스도와 연합’입니다. 내가 삼위 이름 안으로 세례를 받으면 삼위 하나님과 연합, 혹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데, 이때 세상에서 빠져나와 이제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으로 바꾸어졌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 땅에서 벌써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를 정점으로 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바꿔진 것이 구원입니다. 

세례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보니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교회’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는, 이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이미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는 가운데 이 세상 방식으로 사는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다’, 하고 주님이 차려주신 식탁에 앉는 것이 성찬입니다. 세례는 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존재의 행위라면, 성찬은 현재도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요 개인주의로 사는 것을 그치고 신령한 연합을 이루어 사명을 행하고 살아가는 자임을 현실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경이 말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성경을 봐야 오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에서 성경을 읽을 때 많은 실수를 하고 잘못 해석하는 것은 이런 교회, 주님의 교회를 잘 인식한 터 위에서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내가 참여하든 안하든 이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는 이미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계시고,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구원한 지체들을 자기에게 신령하게 결합시킨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몸이 교회인데, 이것은 내가 참여하든 안 하든 이 교회는 이미 있습니다. 이 교회를 인식하고 성경을 읽어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6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그 고백을 받아내고 예수님께서 그 터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하신 이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8:19~20에 ‘삼위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것도 삼위 이름 안으로 연합한 교회를 형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교회를 인식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보편적으로 이루는 교회적 현실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적 현실을 벗어나라

대개 목사, 장로, 집사가 있고 무슨 프로그램이 있고 제도나 조직체 등이 잘 갖춰진 곳을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명령을 경청하고, 그리스도가 앞에 계셔 경청하는 모습보다 사람들이 앞에서 움직이는 조직체를 교회로 생각합니다. 목사면 목사지 부목사가 성경에 어디 있습니까? 장로도 아무리 큰 교회라도 몇 사람이면 되지 그렇게 많은 수가 필요합니까. 무슨 명예직처럼 어느 정도 열심이 있고 연수가 차고 또 헌금을 잘 내면 너도 나도 장로를 세우니까 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봐도 그 많은 회중인데 집사 일곱만 세우지 않았습니까? 이런 수보다 더 큰 문제는 직분에 대한 인식의 결여입니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 자기 생활을 잘 보아보는 자라야 하는데, 그래야 남의 생활도 돌아보고 심방할 수 있는데 이런 생활의 문제, 심방의 문제는 생각지도 못합니다. 뭐 착해야 한다, 훌륭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하고 알 것을 아는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목사와 같이 주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건설할 수 있게 됩니다. 먼저는 강단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받아 살아갈 수 있고, 만약에 말씀이 바로 전해지지 않고 자꾸 다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자꾸 다른 것을 붙여서 가르치고 오해하도록 가르치고 희미하게 가르치고 하면 그 목사를 위하여 기도할 줄 알고 그래도 안 되면 항의도 하고 할 수 있어야 장로의 자격이 됩니다. 교회가 설교가 잘못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 전해지는데도 한두 번의 실수가 아니고 계속하여 회중들이 굶주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편파적이고 협소한 복음을 전하고 마는데도 아무 소리도 못하고 간청도 못한다면 어찌 강단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나오지 못하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나 다름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잘 알고 주님의 교회답게 성숙하도록 설교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파되고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고 지지하고 잘못 되면 정중이 아뢰고 또 아뢰고 그래도 안 되면 항의도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문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전해지는지는 상관도 하지 않고 무슨 자기 마음에 드는 목사냐 아니냐를 따져서 자기 맘에 들면 지지하고 그렇지 못하면 대립각을 세우고 편 나누기나 한다면 이건 주님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교회답게 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교회도 주님의 교회답지 못한 그런 지경에 처하여 지금 바울이 바로 가르치려 하는데, 오늘 우리나라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고 장로란 자기를 돌아줄 알아야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심정으로 교우들을 돌아보고, 강단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서 그 말씀대로 사는데 문제가 무엇인지 살피고 심방하는 것이 장로의 주 임무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벼슬이나 하듯이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목사와 대립각을 세우고 교인들을 명령하고 에헴 하고 있으면 장로의 자격이 없지요? 앞으로 이것을 더 배우겠습니다만 이런 문제는 장로의 문제 이전에 목사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알고 주님의 교회 장로를 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자신부터 주님의 교회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깨달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의 실체를 깨닫는 대로 자꾸 가르쳐서 세우지 않으면 오늘 우리나라 교회적 상황을 못 벗어납니다. 

또 집사 문제도 마찬가지이지요? 왜 그렇게 많습니까? 성경에서 그렇게 많은 집사를 세우라고 하는 데는 한 군데도 없지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도 일곱 집사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아무리 큰 교회라도 구제하는 일, 재정을 담당할 봉사자 몇이면 충분하지요. 교회에 다닌 지 몇 년 만 되면 전부 집사가 되니 무슨 명예를 받는 무슨 수순처럼 ‘아직도 집사가 안 되었느냐?’ 하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다가 성경에도 없는 직분까지 만들어서 세우니 무슨 교회를 건설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교회가 무엇인지 몰이해의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 본체의 교회를 깨닫지 못하면 세례와 성찬으로 그 몸체에 연합한 교회를 우리 현실에 내놓을 수 없게 됩니다. 설사 세례와 성찬을 주고받을지라도 주님의 교회를 잘 모르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지 못하게 됩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지 못하면 결국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주변적인 것을 막 끌어들여 성경에도 없는 조직체 하나를 내놓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 몸체에 대한 인식이 없이 성경을 보고 설교를 하면 아무리 열심을 다할지라도 결국 악순환이 반복될 뿐입니다. 본질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 설교를 하면 그릇된 교회를 내놓게 되고, 교회를 알지 못하고 성경을 읽으면 그릇된 삶을 내놓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교회처럼 개인주의 신앙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개인주의 신앙은 우리나라에 아주 심각한 수준입니다. 많이 모인 교회든지 적게 모인 교회든지 모래알처럼 우르르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모였다가 흩어지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흩어질 뿐이지 유기체인 그리스도의 몸체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 개인주의 신앙으로는 교회는커녕 자기 구원 하나도 불확실해집니다.

○연합을 목적하고 지어진 인간

하나님은 이미 창조 때부터 개인주의로 사는 것을 배제한 창조를 하시지 않았습니까? 연합을 염두 한 창조입니다. 아담을 시작으로 하여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이 연합하여 주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도록 지었습니다. 생명으로 말하면 아담은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의 씨앗입니다. 개체로 지은 게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씨앗으로 시작하여 발아가 되고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큰 나무를 형성하여 열매를 내듯이 이 사람 생명도 주님 앞에서 모든 형제가 연합하여 성령의 열매를 내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아담 한 사람을 먼저 지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이런 사실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죄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듣고 주님을 등지고 나간 그것이지요? 기독교의 죄란 바로 하나님을 등지고 내 인생을 내 힘으로 경영하겠다고 개인주의로 돌아선 것입니다. 개인주의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독립하고 보니 사람끼리도 하나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부 자기중심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사람끼리도 하나를 이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고 단절한 죄가 이 땅에 들어옴으로 사람 상호간에도 단 두 사람도 하나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노력을 하고 힘을 썼을지라도 하나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일은 사람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