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10월 11일
본문: 고린도전서 10:1~14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역사가 거울입니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10장 1-14절]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 하는 일을 피하라.


은혜를 잊어버린 교회에게
몇 해 전 강남 금식기도원에서 설교를 마치고 막 나오는데 몇 사람이 저에게 다가와 인사를 합니다. 대개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인사인데 이날은 저를 무척 당혹스럽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 분이 자신을 어느 교회 장로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한 가지를 주의해 달라는 것입니다. 설교 중에 제가 했던 예화를 거론하면서 따지듯이 말합니다.
설교 중 예화로 했던 “담배 피우는 장로님” 이야기를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목사님! 그런 소리를 하면 성도들이 장로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는 설교 중에 목사님의 잘못된 점도, 저의 허물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잘못을 통하여 우리 신앙의 거울을 삼고 고쳐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장로님에게는 제가 이야기한 예화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다음부터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라 그러고 나서 한 분이 저에게 또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언어 선택에 조금 주의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설교 중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는 표현을 썼는데, ‘축’이라는 말에 이미 주신다는 의미가 있어서 ‘복’을 주신다고 해야 옳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이라는 것은 보편타당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랜 기독교 전통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된다면 문법적인 의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또 이어서 말합니다. “목사님! 설교 가운데 크리스천의 ‘자존심’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자긍심’이라는 말이 옳을 듯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자장면이나 먹어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저렇게 분석적으로 듣는 것이 얼마나 피곤할까? 저분에게 예배시간에 은혜가 있을까? 설교를 구절구절을 분해하듯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에서 들으려고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저 정도의 신앙적 지식과 신앙의 연륜이면 실수를 지적하기보다는 그것을 소화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데 말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설교시간에 주보에 난 ‘오․탈자’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참 신기하죠?
하나님의 은혜로 모인 공동체에서 은혜로 보려고 하지 않고, 누군가의 허물을 잡아내려는 태도들 말입니다. 어쩌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고, 광야를 지났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공동체가 되었는데, 은혜로 세상을 보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순간 그들에게 찾아온 불평과 불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걷어찬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먼저 본문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먼저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오늘 전체의 말씀을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보면서 수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이해해야 교회 생활을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시작이 조금 복잡하죠?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말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꼭 기억해야 한다는 강조적인 표현입니다.
무엇을 말인가요?
“우리 조상들이 출애굽한 후에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 지났다.”
아마도 사도행전 7장 38절에서 스데반이 한 설교 중에 말한 적이 있는 “우리 조상들이 광야 교회에 있을 때”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지금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광야교회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말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둘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한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구약의 광야 교회 교인들은 단지 모세에게 속하여 인도함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가 똑같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름과 바다에서 받은 ‘세례’란 구별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의 조상들이 할례를 받고 구별된 사람들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즉,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다가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를 건너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교회공동체가 된 것처럼,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특별한 공동체를 이루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불림을 받았지만, 400여 년을 애굽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킨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가 우상 숭배하는 땅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애굽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동일하게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이요, 또한 애굽의 종이었으니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인생은 그렇게 살다가 그곳에서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신음과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저들에게 임했습니다.

광야 교회를 생각하면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교회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과 연결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이 나오죠?
사실 세례란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며 양쪽으로 갈라진 물벽을 지나며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우상을 숭배하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어 광야 교회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노예근성을 바다에서 다 장사지내고, 새 사람이 되어 밖으로 나온 것이죠.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많이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가사는 단순히 세상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우리가 최후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세상의 악과 치열하게 싸워 이긴 후 건너야 할 그 영광의 나라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공동체로 불림을 받은 고린도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왜 광야 교회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을까요? 광야를 지나는 동안 애굽적인 것을 깨끗이 제거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세상의 것이 들어오고, 오히려 교회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갈고 닦아야 합니다. 때로는 어려움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는 먹고 싶고, 놀고 싶고, 게으르고 싶은 욕망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이겨야 합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광야 교회를 지나는 동안 타락해 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린도 교회도 버림을 받지 않도록 깨어있자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다수’가 아닌 ‘순종’이라는 것을 꼭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역사는 거울입니다.”
지난해 “누가 왕인가?”라는 시리즈로 교인들과 함께 이스라엘 왕들을 주인공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시리즈를 거의 마쳐갈 무렵에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스라엘 왕들의 이야기가 그동안 드라마를 통해 보았던 사극의 이야기, 조선왕조실록과 다를 게 없군!”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로 너무나 평범하다 못해 못된 인간들의 이야기들도 가감 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거울이 되도록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의 예언은 아주 명확하고 간결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축복하실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곁길로 가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들의 범죄가 심각한 만큼이나 계속되는 무서운 심판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무서운 심판이 신속하게 찾아오기보다는 계속해서 심판을 유보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는 진노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적어도 제가 말씀을 묵상하며 느꼈던 부분이죠. 마치 아버지가 아이들을 혼내며 하는 말 같습니다.
“너, 셋 셀 때까지 안 하면 혼날 줄 알아!”
그리고 시작합니다. “하나, 둘, 둘 반, 둘 반의반. 셋 거의 다.”
그렇게 쉽게 셋을 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셋이 다 차기 전에 말을 듣기를 원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자신의 모습 하나하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숫자는 어디쯤 세어졌을까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실수가 아니라 실수에서 돌이키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역사의 거울 즉 옛 조상들의 성경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의 헌신으로 세워진 고린도 교회가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이 실린 말씀입니다. 메시지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친구 여러분 우리의 역사를 떠올려 경계를 삼기 바랍니다. … 광야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동안, 그들 대다수가 유혹에 무너지고 말았으니까요, 결국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다가 허를 찔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그들은 성적으로 문란하게 살다가 하루에 23,000명이나 죽었습니다. … 우리는 불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불평하다가 멸망했습니다. …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거울’이라는 원어(튀포이)는 ‘예들, 본보기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본보기를 주신 것은 우리에게 그들과 같이 악을 즐기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다시는 죄 가운데 살지 않고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배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에서 모범이 되는 인물을 통해 닮아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사람과 역사를 보면서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출애굽하며 광야를 통과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역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5절 말씀에 보니까, “그들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참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민주주의’ 그리고 다수의 의견을 들어서 움직이는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보니, 하나님께서는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선택받은 자들로 세례를 받고, 할례도 받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편안함을 추구하고 인생의 쾌락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이런 인간의 성향을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라고 표현하지요.
다수가 점점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진리를 떠난다 해도 진리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점점 진리를 떠나는 사람이 많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보고를 받습니다. 12명 중 10명이나 되는 다수가 그 땅을 불평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다수였기에 사람들이 그들의 보고에 힘을 실어줬지만, 하나님은 믿음으로 고백한 소수의 갈렙과 여호수아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편애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교회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무엇이 모범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7절)
재미있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 한 행동에 대하여 성경은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모세가 산에서 늦게 내려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여호와의 날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즉 이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이방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번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어놀았습니다(출32:6).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과 서두름이 우상숭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늘 우리가 정해 놓은 시간만큼만 기다리고, 우리의 욕망이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한, 우리의 예배가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우상을 숭배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바라던 명예와 돈과 자식의 미래를 얻지 못할 때, 얼마든지 욕망이라는 우상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음행하는 자들”(8절)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바다의 세례’를 경험하고서도 음행을 하다가 2만 3천 명이 죽는 비극을 경험합니다. 이 사건은 민수기 25장에 나타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고 2만 4천 명이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음행이란 무엇일까요? 육체적 욕망, 육체적 본능에 의해 주도되는 생활입니다. 사랑이 없는 성행위가 음행입니다. 사랑은 절제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지켜주고 배려합니다. 동물화된, 비인격화된 성행위는 음행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바로 음행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음행에 대하여 지적한 것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아내”를 범하는 일은 이방인들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음행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합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자녀들이 상처를 입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손상이 가는 일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들이 바다의 세례를 경험했는데도 이러한 일을 행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주를 시험하는 자들”(9절)
이 사건은 민수기 21장 4절부터 나오는 사건입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진노하여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셨습니다. 이 말씀도 저에게 깊이 생각하게 했습니다. ‘원망’과 ‘시험’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핏줄인 에돔의 백성과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므로 먼 길을 우회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일 때문에 백성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과 이스라엘이 가고자 하는 길이 달랐기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나 중심적인 해석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는 것이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높은 곳에 세워놓고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천사가 와서 붙들어 주리라” 그러자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고 드러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우리의 욕망을 이루고, 나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기도와 신앙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은 없나요?

“원망하는 자들”(10절)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이 멸망을 했다고 기록합니다. 원망하는 죄는 신앙인들이 범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이 왜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어쩌면 가장 무서운 죄가 원망하는 죄일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웃을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합니다. 원망은 감사를 빼앗아 가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마음을 앗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데 원망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비 신앙적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 중심적으로 믿어야 원망하지 않습니다. 나 중심적인 믿음은 늘 우리의 삶을 조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이 나의 판단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내 판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멋진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바로 13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세례’를 경험했으나 이들이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의 교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고 교회를 세웠으나 그들이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도 잘못된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넘어졌고, 때로는 알면서도 죄를 범하였습니다. 늘 우리 속에 비열한 욕망이 살아 있었습니다. 아니 어려움이 올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능력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선교사로 갔던 스탠리 존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폐허를 보지 않고 그 폐허 속에서 재건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죄악이 팽배해 가는 세상을 보지 않고 그 흑암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이미 아침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질책받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넘어짐 가운데서 또 다른 소망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시험과 넘어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나 오직 하나님은 미쁘시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나 피할 길을 주신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나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떠난 정주영 회장이 즐겨 쓰던 말이 있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우리에게 시험이 오든 유혹이 오든 하나님이 미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든, 능히 감당할 능력을 주시든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이 오는가를 따지기 전에, 이 시험을 통해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연단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운전면허 시험을 볼 때 필기와 실기를 보았습니다. 책으로 공부하기는 쉽습니다. 외우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직접 배우고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처음 운전할 때는 속도를 낼 수 없습니다. 작은 접촉사고도 냅니다. 주차하다가 차를 긁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실수의 과정을 지나야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작은 사고들을 당하지만,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운전하다 답답하게 하는 ‘신호등’ 신호를 위반했을 때, 교통경찰에게 걸려서 위반 범칙금을 내는 일들, 여기저기 숨어있는 과속 탐지기, 짜증스런 과속방지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런 작은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능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큰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작은 접촉사고가 아니라, 인명사고가 나기도 하고,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질병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끼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만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 13절은 12절 말씀이 없이는 완전히 이해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느냐 넘어질까 조심하라!”
실패는 자만심에서부터 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광야 교회의 범죄 함을 보면서 우리도 넘어질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서 넘어짐을 경험할지라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소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도 경계해야 하고, 넘어졌을 때 낙담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주시는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목회자로서의 고백일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은사들과 부흥의 역사가 자신들의 힘인 것처럼 자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면, 고린도 교인들의 하나님의 자녀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택함을 받았지만, 모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시험과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문제는 이 훈련의 시간을 잘 견딘 사람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신앙의 승리자들이 되기 위해 기억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환경을 보면서 낙담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넘어짐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넘어짐은 사단이 우리를 아직도 시험할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어 있으면 사단의 시험도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무좀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무좀을 치료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좀 낫는 듯하다가 다시 재발하는 것이 무좀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합니다. 나이가 많아지면 무좀이 저절로 없어진답니다. 사람이 늙으면 무좀균도 먹을 게 없어서 다 달아납니다. 발에서 땀이 나지 않을 때가 되면 무좀은 자연히 없어집니다.
우리의 발에 무좀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요,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에서 문제와 시험이 있다는 것은, 아직 살만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시험은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하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넘어짐은 우리 삶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빚어 가시는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넘어짐 가운데 우리의 자아와 욕심이 깨어지면, 그제야 하나님께서 일하실 호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