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엿새째 다 이룩하시고 제 칠일에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 지으시고 더 지으실 것이 없음을 보시고 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사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그 영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내가 다 이루었다” 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알고 믿고 온 세상에 전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1. 무엇을 다 이루셨나요?

무엇을 다 이루셨는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종종 질문할 때가 많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로 인간의 영이 죽고 온 세상이 저주를 받았는데 바로 이와 같은 흉악한 부정적인 세계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임하였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치고 죽음의 선고를 받지 않고 태어난 사람 없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영이 죽었습니다. 그러고 혼과 육을 가지고서 이 세상에 사는데 이 세상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편안하게 살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죽음에서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청산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을 당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등지고,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을 빼앗기고, 저주받은 땅에서 마귀의 종살이를 하고 살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마귀는 하늘에서 쫓겨나서 지금 공중에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첫째, 둘째, 셋째 하늘, 여러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천국 가서 놀랠 것입니다. 하늘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땅은 하나로되 하늘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보좌를 배설하고 계시는 그 하늘을 마귀가 빼앗아가려고 달려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셔서 그 마귀를 공중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와 가장 가까운 공중 이 하늘로 내쫓았어요. 지금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고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 지은 죄로 인해서 죽은 아담이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고 영혼이 죽었는데, 그 죽은 영을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살려낼 수 있습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어떠한 양식을 먹어도 죽은 영혼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죄의 짐을 벗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꼭 합당한 자라고 칭찬까지 들었던 다윗도 죄로 인하여 영원히 고통을 당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편 32편 3절에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으로 힘들어 하는데 심하면 우울증에 걸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 세상에 오셔서 첫 아담 안에서 저지른 죄악을 남김없이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형벌을 받아 그 모든 죄를 청산하시고 그 대신 자유와 해방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아버지 어머니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으나 영혼이 죽은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성령을 통해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죄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와의 몸을 성령을 통해서 빌려서 태어나서 서로 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통해서 죄를 들어왔고 다른 한 사람 죄 없는 사람이 그 죄를 다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육신을 쓰고 나타나셔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사는 영원한 제사요. 그의 속죄는 영원한 속죄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 사함을 주실 때, 영원한 죄 사함을 주었습니다. 조금 죄지었다가 용서 받았다가 또 죄를 지어서 또 버림받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번 그리스도에게서 죄 용서를 받으면 또 용서 받고, 또 용서 받고, 또 용서 받고, 또 용서 받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버리고 나가기 전에 예수님 안에 있는 이상 영원한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것은 세상 사람으로 상상할 수가 없는 구원인 것입니다. 온 인류에게 주님은 믿음과 믿음을 통한 자유와 해방을 값없이 주셨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여 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선지자를 통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7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몸 찢고 피 흘린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저주 때문에, 우리의 죽음 때문에 대신해서 고난당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예수님 자신이 잘못해서 하나님께 매를 맞고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깊이 알아야 될 것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여러분께서도 한 번 따라 말씀해주십시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라.”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나 때문에 주님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내 죄를 사하고 내 허물 때문에 고난을 당해서 나를 성결하게 만드시고 나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므로 나를 저주에서 해방시키고, 나 때문에 채찍에 맞아서 병에서 우리를 놔주셨다. 이 예수 믿는 것 보통이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 구주가 되었다. 그런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나의 인생 전체를 주님이 새롭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을 듣고 진짜 믿고 여러분 춤을 추어야 됩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영원히 내가 용서 받고 영원히 거룩함을 입고 영원히 축복을 받고 영원히 병고침을 받고 우리가 참 믿음을 갖고 따르면 이런 기적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조금도 불평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러분,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보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안 짊어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은 당신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오늘 주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했는데 이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 인간 실존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름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인 것입니다. 죄악의 짐, 질병의 짐, 의식주의 무거운 짐, 불안과 공포의 짐, 삶의 무의미와 불행의 짐, 죽음과 절망의 짐, 짐이 참 많습니다. 인간은 실존의 절망에 빠진 자라고 철학자들이 말합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인 것입니까?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 참 적극적인 초청인 것입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어제 짐을 짊어지시고 오늘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우리의 짐을 지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고달픈 인생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도 이런 말을 한 종교 창시자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누가 이런 초청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님도 배우자도 죄의 짐, 질병의 짐, 죽음의 짐, 절망의 짐을 대신 져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같은 초청을 할 수 있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짐을 좀처럼 맡기지 않습니다. 한국에 선교하러 나온 선교사가 하루 차를 타고 시골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앞에 할머니 한 분이 무거운 짐을 머리에 걸머지고 비틀비틀하면서 걸어갑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차를 드르륵 대고 “할머니 어디까지 가십니까?” 어디까지 간다고, 바로 선교사가 가는 그 곳입니다. “내가 거기 같이 가는 곳이니까 여기 차에 타라”고. “아유 나는 괜찮다”는 것을 억지로 태웠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태우기 전에는 자동차가 조용했는데 할머니를 뒤에 태우고 나니깐 화다딱~ 화다딱~ 화다딱~ 소리가 자꾸 나는데, 그 짐을 차에 타고 머리에 이고 있으니까, 차가 덜렁 거릴 때마다 짐을 땅에 엎드려 차안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또 주워 모아서 머리에 이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 짐 머리에 이지 마세요. 내려놓으세요.” 그 할머니가 운전사를 보고, “참 마음 좋은 사람도 있네. 몸을 태워주는 것도 고마운데, 뭐 짐쳐라? 짐 태워놓으면 차가 얼마나 고생스럽냐? 몸만 태워줘서 고맙습니다. 짐은 내가 이고 가겠습니다.” “짐을 이고가나 차에 내려놓으나 차는 똑같이 무겁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차가 무거워서 안 됩니다.”

그래 내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할머니는 결국 타고 끝까지 보따리를 내려놓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사람들 많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재미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재미있는 것이 여러분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데 주님이 뭐라고 말하십니까? 여기에 와서. “그 짐 내가 다 이루었으니 십자가에 내려놓아라.” “아이고, 주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것도 감사한데 짐조차 내려놓으라고요? 그건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고 짐을 진 사람 많습니다.

시편 68편 19절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짐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잠언서 16장 3절에 ‘너희 행사를 야훼께 맡겨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은 우리의 짐을 짊어지고 우리의 일을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면 더 이상 그것은 우리의 짐이 아닙니다.

저는 유달리 짐을 지고 짐을 잘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설교할 때는 짐을 맡겨라 해놓고 자기는 짐을 못 맡기고 발버둥치는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주님께서 제가 기도를 하고 잠을 자는데 아주 요상한 꿈을 꾸었어요. 제가 자라기를 부산 초량동에서 자랐는데, 그 산 중턱에 올라가면 부산 앞바다 배가 정박되어 있고 짐들을 실어내리는 것이 늘 눈에 보입니다. 그래 꿈에 제가 뭔 짐을 짊어지고 부둣가에 와 있는데 예수님께서 큰 배를 부둣가에 가지고 와서 제 배를 정박시켜놓고 난 다음, 저를 보고 “용기야 이리 오너라. 그 짐을 배에 실어라. 네가 짊어지고 갈 짐이 아니다. 내가 가져가야 되니까 빨리 배에 실으라”고, 그래 제가 낑낑거리면서 짐을 배에 실었습니다.

그러니 “어, 너는 나오지 말고, 너는 타지 마라. 너는 아직 탈 시간이 안됐다. 짐만 내려놓아라.” 짐을 내려놓으니까, “난 떠난다.” 부우웅~ 고동을 올리면서 배가 떠났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잠에서 깨어났어요. 하도 이상한 꿈이라 내가 기도를 하니까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니가 짊어지고 가려고 했는데 그건 니가 걸머질 짐이 아니다. 짐은 예수님이 보혈을 주고 다 샀다. 너 짐도 내 짐이다. 그러니 내가 너 짐을 보혈로 값을 주고 샀으니까 내가 내 배에 싣고 떠나니 다시는 그 짐 볼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때부터 저는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마다 상상을 합니다. 내가 큰 짐을 주님 배에 싣습니다. 싣고 난 다음에는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헤엄쳐서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마귀가 와서 너 짐 짊어지고 있다고 말하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예수님이 가지고 온 배에 다 싣고 나는 짐을 지고 있지 않다. 도로 질 수도 없다. 나는 해방되었다. 나는 감사드린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응답을 많이 쉽게 받게 된 것입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하나님의 배에 싣고 나면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믿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덕은 믿음입니다. 내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그 법이 다 있지마는 그 하나하나의 법이 아무리 중요해도 하나님을 믿으라. 그보다 더 놀라운 덕은 없습니다. 그보다 더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 내가 이런 법, 저런 법을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않고, 이웃을 탐하지 않고...” 그런데 그 옆에 한 사람이,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니 “오냐, 니가 제일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제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믿음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행사를 할 수 있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율법이 믿음보다 낫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찾으시고, 높여주시는 덕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용하시고, 높이 들어준 사람들은 모두 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집안이 좋은 사람, 공부를 많이 한 사람, 덕이 있는 사람, 그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2절로 40절에 보면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히브리서 10장 38절에 ‘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이 아무리 믿음이 적다해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실제로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은 태산을 옮겨 주신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실제로 알고 보면 해결 못할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시고 하나님을 믿으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 하고 그것이 이룰 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여러분이 지금 문제라고 가지고 있는 것 하나님이 보시면 문제가 아닙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다른 일하라고 말 안 했습니다. “마르다야, 하나님을 믿으라.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 그래서 모두 오라버니 무덤에 가냐. 믿음의 행동으로 그 무덤 문을 옮겨 놓아라.” 예수님이 무덤 문 앞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 즉시로 수의를 몸에 감은 채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거짓말 같지요? 그래도 참말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가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우리를 살리시는 주 예수님을 가슴에 깊이 모시고 항상 예수님은 믿음의 주,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으로 바라보며 감사, 찬송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죄의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절대 은혜로 믿고 높이고, 믿고 감사하고, 믿고 기뻐하는 춤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는 길은 믿음 뿐입니다.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오늘 다 지고 주님께 나왔습니다만, 우리의 죄와 불의와 추악을 십자가에 담당하신 예수님은 우리 건강도, 우리의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생활도, 살고 죽는 것도 다 짊어 졌었습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고 우리가 주님 품에 안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지을 때, 아주 극단의 고통에 처한 경험을 했습니다. 건축회사에서는 돈을 안 준다고 나를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교회 성도들은 돈 있는 성도들은 이 교회 망했다고 교회를 떠나가고, 나같이 바보스러운 사람들은 남았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이 가운데 있어서 위를 쳐다보면 위에 쇠에서 녹물이 뚝뚝뚝뚝 떨어집니다. “아이고 하나님.. 날 죽여주십시오.” 그때는 죽는 것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저 뒤에 순복음 아파트 살았으니까 들어가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눈을 감자마자 내가 엘리베이터에 갇혔어요. 엘리베이터에 갇혔는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요렇게 엘리베이터에가 움직였는데 나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 없습니까? 날 좀 건져 내 주십시오!!” 그러니까 누가 내 앞에 딱 서기에 쳐다보니깐 예수님이에요. 저는 꿈에 예수님을 종종 잘 봅니다. 그러니 “왜 부르짖느냐?”, “아이고 주님 엘리베이터에 갇혀서 들어가도 나가도 못 합니다.”, “하하하. 내가 곧 길이요.” 그 말만 합니다. 진리요, 생명의 말은 안 하시고 내가 곧 길이요. 그래서 “아이고 주님이 길 같으면 주님 붙잡으면 나갈 수 있겠네요?”하고 주님을 딱 끌어안으니깐 내가 엘리베이터 밖에 나와 있어요.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길을 찾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죽고 싶다고 생각하던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꽉 들어찼습니다. 주님이 내 길이니 그 길에는 없지 않느냐? 여러분 오늘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도 어려운 일을 다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러분의 길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해방을 얻는 길이요, 자유를 얻는 길이요, 생명을 얻는 길이요, 기쁨의 길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 거기에서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삶의 이미지를 뚜렷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장 17절)’. 오늘 우리가 성찬을 뗌으로 주님의 깨어진 몸과 흘리신 피를 먹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훌륭한 삶이 아니라 진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고 그것이 우리의 삶의 전체적인 길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는 감각적인 인생만 실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져 보고, 귀로 들어보고, 눈으로 보고, 그 실체인 줄 알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만이 네가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눈에는 아무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게 없어도 주님의 말씀은 무조건하고 믿고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하겠네. 주 예수를 믿어서 하신 일을 힘입어 예수께로 나오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병은 고침 받았습니다. 저주에서 해방을 얻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왜냐면 주님이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멘.

/2015. 10. 4. 주일 4부예배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