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9월 6일
본문: 고린도전서 7:1~9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말하기 곤란하지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7장 1-9절]

1.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욕망을 감추는 것이 문제입니다.
‘욕망’의 문제는 해결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원초적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식욕, 성욕 같은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하지 말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랍니다. 부모의 처지에서 볼 때, 어린아이들의 원초적인 욕망을 그냥 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이기는 한데, 그 욕망대로 놔두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성욕이란 늘 억제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성적인 욕망대로 놔둬서는 올바른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그가 편지를 보내는 대상이 ‘고린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욕을 ‘종교’라는 이름의 가면을 쓰고 타락해 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지 마라!’고 권면해도 그렇게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실제로 필요한 일이지만, 말하기 곤란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성적인 문제, 돈 문제 등과 같은 것이지요.
특히 사도 바울에게 당시 성적인 문란의 문제는 결혼과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했습니다.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가졌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와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중요한 원칙에서는 동일하게 적용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에 가장 원초적이고 필요한 일이기에 꼭 다루어야 할 일인데 왜 이렇게 힘든 것일까요? 어쩌면 너무나 삶과 밀접한 일이기에 언급하기를 꺼리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말씀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세요.
3.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4.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결혼을 서로의 ‘의무’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의무라는 말이 조금 거북하다면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혼은 ‘동반자적 관계’라고 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만연해 있던 노예개념이나 성적인 향락의 도구로서의 결혼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런 표현이 있지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4절)
남편과 아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자기주장을 양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깨지는 가정의 이유가 대부분 ‘성격 차이’입니다.
결국, 무슨 말일까요? 살다 보니 자기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내가 맞추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서로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며 참 힘들고 어려운 가정에 “당신이 믿음이 있으니 일방적으로 참고 인내하고 기도하고 사세요!”라는 말이 얼마나 가혹합니까?
그래서 말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말씀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주장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언젠가 몇몇 목사님 가정과 식사를 할 때입니다.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선택할 메뉴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앉자마자 어떤 목사님 부부가 “나는 이건 못 먹어요.”라고 말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참 힘들어지더군요.
속으로만 그랬습니다. “당신은 못 먹어도 나는 좋아해요!”
그렇지만 성숙한 사람들이 그것 때문에 싸울 수는 없지 않을까요?
한 목사님이 그러더군요.
“우리 아내는 먹는 문제는 절대로 양보를 안 해요.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양보해요.”
제 아내는 먹는 것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먹는 것 말고 다른 부분에서 저도 주장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사모님이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삽니다. 불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모님에게는 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한 끼는 자신이 만든 음식으로 식구들이 먹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음식을 만들 때는 바로 장을 봐서 만든다는 것, 어찌 보면 강박적으로 먹이는 것 때문에 무척 식구들이 힘들어 할 것 같은데, 잘 사는 것은 먹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다 양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사모님이 만들어 준 음식을 먹으며 “맛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담대함도 그냥 먹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감히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맛없다고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음식 타박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 맘대로 하는 것이 많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이 살면서 적절하게 서로를 생각하고 양보하고 하면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요? 

부부간의 성적인 문제에서도 이 부분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헤어지는 부부간의 문제가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격 차이의 내면에는 성적인 문제들이 아주 심각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성격 차이로 헤어지는 부부에게는 성적인 문제가 아주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행복한 부부와 가정에서 성적인 문제는 그렇게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자신의 몸은 서로 주장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는 것이 삶을 만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배려’라는 말은 쉽게 하지만, 실제로 배려가 참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또 하나의 독선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지혜로워야 하는 이유, 배워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젊은이들이 결혼하기 전에 교회에서 결혼 예비학교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 이제 욕망의 문제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죠? 우리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욕망을 다스릴 때 참다운 인간이 됩니다. 욕망대로 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8~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독신 생활을 선물로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 생활을 선물로 주십니다. … 그러나 욕구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겠거든, 어서 결혼하는 것이 좋습니다. 결혼 생활이 수고롭기는 해도, 홀로 살면서 정욕에 시달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7~9절 중)

욕망의 문제는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드러낸다’는 것은 ‘내 맘대로 한다.’가 아니라 때로는 약함과 때로는 추함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자신’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자유 하다거나,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신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그렇게 위대한 사역을 하고 있었음에도 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고뇌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을 보세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단순한 탄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호소입니다. 자신이 연약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씨가 쓴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한 젊은 기자가 기획 기사를 썼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다 저능아다.”라는 타이틀이었다. 물론 적절한 재료와 논리적인 글을 썼다. 이 기사를 다 읽어본 고참 기자가 그에게 충고했다.
“이 기사가 나가면 항의가 빗발칠 텐데 어지간히 시끄럽겠어요! 그러니 이 기사의 타이틀에 한 글자만 추가해줬으면 좋겠어.” 젊은 기자는 고참 기자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새로 타이틀을 만들었다. “미국 국회의원들은 한 명만 빼놓고 다 저능아다.” 이 기사가 나간 다음에 아무 항의도 없었다. 모두가 생각하기를 자기는 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며 삽니다. 자기는 아닌 것처럼, 자기는 예외인 것처럼, 자기만이 특별한 것처럼.
- 출처 /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자신의 약함에 정직하게 반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약함과 약점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용감할 수는 있지만,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사람은 ‘무식한데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이죠.


결혼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7장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확실한 관계 안에서만 그렇습니다. … 부부관계는 그 욕구를 다스릴 뿐 아니라 성적 무질서의 세상 속에서 균형 잡히고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지켜 줄만큼 강합니다. 부부의 잠자리는 서로를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 힘쓰고, 아내도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부부관계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부부관계는 침대 안에서든 침대 밖에서든 상대방을 섬기겠다는 결단입니다. 성관계의 절제는 부부가 기도나 금식에 전념하기 위해 서로가 동의하는 한에서만 일정 기간 허용될 수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장을 적습니다.
“여러분이 부부관계에 대한 기대를 접는 순간, 사탄이 교묘하게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서로에게 만족을 찾는다면 늘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만족이 채워지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불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평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금이 가게 하고 그 사이로 사탄은 비집고 들어옵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예수님은 구름 타고 오시고 사단은 틈을 타고 온다.”

결혼과 부부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면 귀하게 다루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명한 청소년 성 문제 전문가가 ‘아름다운 성’을 이야기하며 ‘즐김’과 ‘만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만일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성’과 ‘가정’을 즐김의 관점에서 본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중요하지만 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아마도 여러분이 이 의미를 잘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 ‘분방’이란 단순히 방을 따로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부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생활의 패턴에 따라 방을 따로 써야 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부의 성생활에 대하여서 서로에게 충실하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많은 교육을 통해 아는 일이죠. 성적인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것, 체형과 체력이 다르듯이 모두에게 같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을 이유로 서로에게 소홀한 것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합의상’이라는 말이 참 중요하죠. 우리 인간이 성장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무조건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절하고 절제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져 갑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태도는 늘 부작용을 낳습니다.

또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보기 싫다’는 이유로 방을 따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죠. 함께 있어야 부대끼기도 하고 해결되죠. 문제로 인해 서로에게 무감각해지기 시작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원수도 한 방에 있으면 정이 든다!”

초대 유명한 교부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운데 한 분도 목회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기 위해 사모님과 합의하고 병원을 찾아가 스스로 고자가 된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어린 시절 담임목사님이 이성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온전히 목회에 전념하려면 이 모든 유혹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유혹을 받을 수 없는 삶을 선택한 것이 굉장한 결단인 것 같지만, 사실은 유혹을 이겨내는 삶이 훨씬 위대하다고 말입니다. 늘 유혹에 넘어질 수 있기에 깨어있을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성숙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쉬운 길’을 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혹과 어려움이 와도 ‘옳은 길’을 가라는 것이 아닐까요?

설교를 시작하면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사도 바울은 결혼의 문제를 보편적 인류의 제도문제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 만연해 있던 성적 타락의 심각성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사용하면서 올바른 욕망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의 결혼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최선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9절을 보세요.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지난 2월 조사된 설문조사에 보면, 남자들의 37%, 여자들의 6% 정도가 결혼 이후에도 외도의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외도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비혼’이 미국은 약 30%, 일본은 40%에 이르고 있습니다. 비혼이란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도 결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욕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통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인류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말이 어떨까요?
“결혼은 방종으로부터의 자유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인간들이 가진 욕망의 자유를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잡아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참 힘들어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책임을 져야 하고, 누군가에게 매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질 사람이 있다는 것에 대한 특권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책임’은 ‘허무’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우리가 종종 듣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요즘 아플 시간도 없어!”
물론 이런 말이 이상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인생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이 훨씬 행복하고 복된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이 축복과 은혜로 고백되기 시작할 때,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아닐까요?
제가 종종 BTD 영성훈련을 인도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이보다 더 큰 믿음의 고백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견지하고 있는 태도는 결혼 제도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지체의 비유’를 통해서도 다루겠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와 상황이 있습니다. 종교적 문화적으로도, 유대인으로 혹은 이방인으로, 할례자로 혹은 무할례자로, 자유자로 혹은 매인 자로 불린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생각은 본문 6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사도 바울의 견해는 무엇이 옳다 혹은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유익하냐?”의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하지 아니함이 좋으나”라는 말이 모두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지내라는 말인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 하는 말이 ‘명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오늘 말씀이 결혼제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에 만연하던 음행에 대한 방지의 수단으로서 ‘정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결혼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말은 제가 늘 결혼 주례 때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한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가 신랑과 신부가 되는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셨고, 그 가정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가정을 허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정이 없이 살아야 하는 사람과 가정을 희생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 때문에 사는 것은 괜찮으나, 어쭙잖게 누군가를 흉내 내거나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혹여라도 사도 바울 자신을 흉내 내려고 산다고 육신의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우리의 정욕이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을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4~5절의 말씀을 보세요.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한데, 그 선한 것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기 2장에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양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금욕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선하게 사용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격적으로 창조하셔서 선한 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욕망의 문제에서 의도적으로 분별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선한 것은 선하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단호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보니까, 우리가 죄에 빠지는 이유는 단호하지 못하고 ‘묵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회식자리에서 1차 2차 3차를 가면서 결정적으로 “글쎄….”라고 말하는 것.
결혼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로 아는 우리가 그 귀한 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던 사도 바울이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요?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는 시대를 불문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오직 ‘회복’입니다.
우리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회복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크고 놀랍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나누며 참 하기 힘든 설교이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자신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서로에게 성실하도록 하십시오!
지켜진 가정에서 하나님의 소망이 나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