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8월 30일
본문: 에베소서 3:14~21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의무에서 자유하라!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에베소서 3장 14-21절]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오늘은 한 가지 실험으로 말씀을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부터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숫자 하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어떤 숫자를 생각하셨나요?
신기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숫자 하나를 생각하라고 하면 1에서 100가지 숫자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가 있는데 우리는 꼭 그 안에서만 고를까요?
제가 이번 변화산을 페리 노블의 책 ‘Unleash’(해방)를 읽으며 준비하게 된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참 많은 감옥 속에 갇혀 삽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삶의 태도, 지속적인 프로그램, 혹은 영적인 문제에서도 갇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만물에 이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 이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존재로서의 의미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혹시 창세기를 기억하시나요?
창세기 2장 19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창세기 1장 27~28절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를 잘 알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 대한 평을 누군가 했습니다.
김춘수의 꽃은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꽃이라는 이름으로 존재 이유를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꽃이 될 수도, 누군가를 꽃으로 품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능력이 있는 분이신가요?
오늘 본문을 보니까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물건들을 사용하는 데는 매뉴얼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는 매뉴얼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우리는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한’ 길을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이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실 때는 앞으로 할 일의 목록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단지 ‘부르심’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고 있던 제자, 세금을 받고 있던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시키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주님과 함께하자고 부르셨을 뿐입니다.

이제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님과 동행하며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동행하면 행동과 삶의 규범, 그리고 습관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먼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다윗입니다. 그의 엄청난 업적들, 그의 주옥같은 시편의 이야기, 또한 그의 신앙의 간증들, 그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그는 결국 수많은 역경을 뚫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죄를 범하였으나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그는 단지 목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position’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가능성’, 다시 말하면 준비된 성품을 보셨을 뿐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심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그는 양치기였지만 더는 양치기의 삶에 매여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가 사는 삶 그 이상의 것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인생을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삶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이죠. 기대만큼 풍성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풍성함은 ‘비교’에서가 아니라 ‘가치’에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양치기의 삶은 다른 누구의 삶과 비교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의 삶의 부르심 이후에는 자신이 양을 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남과 비교할 일이 없어졌을 것 같습니다. 그 비교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의 삶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가치 있는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풍성함은 이제 시작됩니다.

좋은 예가 될 듯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사역자들에게 부담되는 일을 시킬 때가 있습니다. 그가 가진 것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합니다. 그리고 제 머릿속에서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게 할지 계획이 세워집니다.
하지만 그 일에 부름 받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 순간부터 걱정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풍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시키신 분의 능력 안에, 풍성함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18절) 그리고 이어서 19절에는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 아니 우리에게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지 못하면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풍성함이란 그분의 기쁨 가운데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사도행전 9장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물은 것이 있습니다.
“주여, 누구시니까?”
그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순간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됩니다.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을 알게 될 때, 그 사랑이 우리를 풍성하게 합니다.

이 놀라운 지식에서 우리는 놀라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우리의 관심은 “내가 뭘 할 수 있을까?”입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한 지식과 나를 향한 사랑은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우리의 인생은 내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함이 찾아옵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은 자기 능력의 감옥 속에 가둬놓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부요함이 찾아옵니다. 내가 가진 지식이 아닌, 그분의 사랑 속에서 깨닫게 된 새로운 지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의 사람’인가가 중요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위대함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 된 것은 그들이 원했거나 충분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며 평범하게 살던 삶의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얽매고 있던 과거의 관습과 우상의 습관에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떠남은 풍성한 인생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자유와 희망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불림을 받았으나 그들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노릇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거나 특별한 신앙이 있어서였을까요? 아직 그들은 십계명을 받기 전이고, 오랜 노예생활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고 해방하셨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괜찮은 사람들이 되었나요? 그들은 여전히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정적이고, 불평하고,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복 받을 만한 짓을 한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사랑을 얻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풍성하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충만하심’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세요.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풀어서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낌없이 베푸시는 사랑의 크기를,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손을 뻗어 그 사랑의 넓이를 경험해 보십시오! 그 사랑의 길이를 재어 보십시오! 그 사랑의 깊이를 측량해 보십시오! 그 사랑의 높이까지 올라가 보십시오!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충만해져, 충만한 삶을 사십시오.”

우리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충만하십시오!”
성령도, 축복도, 우리의 삶도….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그 충만함이 우리의 능력에서 오는 것이 아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에서….” 우리가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의 넓이, 그 사랑의 길이, 그 사랑의 깊이를 측량해 보십시오. 측량한다는 것이,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 바다의 깊이는 얼마나 될까?
제가 지난해 사이판에 있는 우리 권사님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바로 해변의 물은 옥색을 띠고 있는데, 조금 나가니까 바다색이 푸르다 못해 검어지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이 바다의 깊이가 얼마나 되나요?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 중의 하나인데, 약 8,000m 정도 된다고 합니다.
낚싯줄을 드려서 그 깊이를 알 수 있을까요? 돌을 던져서 내려가는 속도를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무지하게 깊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될까요?

[Unleash]라는 책에서 페리 노블 목사가 네 살배기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딸에게 물었다.
“얘야, 아빠가 널 사랑하는 걸 아니?”
“예, 알아요.”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할까?”
룸미러를 보니 딸이 두 팔을 최대한 활짝 펴며 대답했다.
“이만큼요.”
아빠가 널 왜 사랑하는지 아니?“
딸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건 그냥 네가 내 딸이기 때문이야.”
딸이 빙긋 웃기에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아빠가 널 그만 사랑할 수 있을까?”
“아뇨, 절대 그럴 리가 없어요.”
딸이 다시 배시시 웃었다.
“왜 그렇지?”
“왜냐하면, 나는 항상 아빠 딸이니까요.”
우리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알고 있다. 당신은 어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랑을 받는다. 우리가 뭘 잘해서 사랑을 받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충만한 사랑 안에 거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뭘 잘해서가 아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끊임없는 의무감에 시달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 있다면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언젠가 제가 그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 몸을 당신께 드립니다. 모든 것을 드립니다!”라는 기도를 보며 종종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형편없는 기도가 아닐까요? 내가 정말 하나님 쓰실 만한 사람인가요? 나를 쓰시려면 오히려 하나님께서 참 힘드시지 않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무모한 고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용납하는 것은 결코 자격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충만함’을 생각하는데 유독 두 개의 단어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20절)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1절)
우리가 누리는 자유함은 단순히 지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라고 할 때는 조금은 객관화된 차원을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충만함은 그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흔히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고백만으로는 누릴 수 없습니다. 구원의 사건은 어떤 사건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 내재되어 일어나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입니다.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면죄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은혜를 체험하고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으니 조금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사고 말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사랑하지만 사랑 안에 거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종종 쓰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in’ 즉, 안에 있을 때입니다.
끊임없이 내 안에 살아있는 그 은혜의 충만함으로 인해, 충만하게 나오는 내 삶의 이야기 말입니다.

‘…안에서’ 더는 의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 기쁨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더 알기 원하기 때문에 말씀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의 안전을 보장받거나 위험에 벗어나기 위해 보험을 들듯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충만함으로 인해 예배를 드립니다.
혹시 여러분은 보험을 들면서 아깝지 않으신가요? 그래서 요즘 그런 보험 상품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만기형 상품” 돈을 다시 찾는다는 것이죠.
만일 여러분이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고 의무감에서 행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손해 보는 느낌이 많겠습니까?
하나님께 혼날까 봐 기도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기도한다면 억울한 시간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누리는 기쁨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거하기 시작할 때,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우월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우월의식’은 율법주의에 근거합니다. 내가 누구보다 ‘더’ 수고했다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용납되고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자격도 이유도 사라진 것입니다.
더는 비교하지 않을 때 우리가 누리는 것이 ‘자유함’입니다.
더는 ‘의무’가 아닌 자유함입니다.
의무가 아닌 것을 우리는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때로 약하고, 실패해서 넘어지고, 아프고, 슬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충만함이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비행기 사고 중에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 중의 하나가 비자 문제로 한 가족이 비행기를 탔다 실종된 일입니다. 선교사 가족 말입니다. 정말 마음 아픈 일은 누군가 악성 댓글을 달았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다. …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
더욱 슬픈 일 중의 하나는 탑승객 중 41명이 인도네시아 한 교회의 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곳에서 믿음을 지키던 사람들이 조금 싸게 표를 사려고 공동으로 구매하고 여행을 하다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충만함이 사라지는 것인가요?
죽음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 세상의 재앙은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일어나는 불의한 일들로 인하여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불의한 세상과 수없이 일어나는 사고 가운데서도 우리가 ‘…안에’ 거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자유함은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펀하다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오늘부터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자유’를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얽어맬 수 없음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자유는 우리에게 펼쳐진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나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함을 선포할 자유가 있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할 자유가 있고,
그 어떤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자유함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케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