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8월 9일
본문: 고린도전서 5:1~13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어찌해야 할까요?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5장 1-13절]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J. D. 그리어의 [지저스 컨티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크레이그 그로쉘이 겨울을 나러 남쪽으로 날아가는 작은 새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작은 새는 꾸물거리다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눈보라에 갇히고 말았다. 결국 날개가 얼어붙어 추락하고 말았다. ‘휴, 이젠 꼼짝없이 얼어 죽겠구나.’ 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소가 새 위에 똥을 쌌다. 처음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똥의 열기에 날개가 녹는 게 아닌가. 새는 너무 기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랫소리가 그만 고양이의 시선을 끌었다. 결국 고양이가 달려들어 새를 한 입에 먹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인생에 관한 세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교훈1: 우리 위에 똥을 싼다고 해서 다 적은 아니다.
교훈2: 똥에 묻은 우리를 꺼내 준다고 해서 다 친구는 아니다.
교훈3: 똥 속을 있을 때는 때로 입을 다물고 기다리는 것이 유익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교회 안에서, 설교시간에 다루기가 참 힘든 내용입니다. 하지만 너무도 명백하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사도 바울이 고민했던 일이 현재 교회에서도 같기에 힘들지만, 다루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본래 고린도라는 도시가 성적으로 문란했던 곳이고 복음이 들어갔지만, 이러한 불건전한 일로 인해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목회하면서 참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드러내는 것이 너무 무안한 것이죠. 특히 성적인 부분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목회자를 참 당황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어렵다고 해서 감추거나 회피해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 듯합니다.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죠. 사도 바울의 편지를 접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쩌면 그 시대의 문제가 오늘날에도 이렇게 같을 수 있는지.

지난주에 청년 설교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남자 중의 여자들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저에게 참 감사한 것이 있다면 아직 이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한 아리따운 여인인 제 아내를 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 자신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자신할 수 없는 것은 제 존재의 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스캔달’이라는 원래의 말은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이죠.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해도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은 늘 존재하고 실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의미는 ‘걸림돌’이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겠다는 것이죠. 걸림돌이 오히려 우리 신앙의 디딤돌이 되도록 살겠다는 몸부림이죠. 걸림돌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필요한 것은 분명하게 문제를 직시하는 것입니다. 아프고 힘들기는 하지만 지적과 견책 때로는 징계도 있어야 할 듯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부분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 교회의 가족 가운데서 수치스러운 성행위가 행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 자기 계모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그 일로 비탄에 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로 무릎을 꿇고 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일을 저지른 자와 그 소행에 맞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저 외면한 채 그런 행위가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 공동체의 교우들을 모으십시오. 그 사람의 행위를 공개적으로 조사하십시오. 그에게 자기 행위를 변호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변호하지 못하거든 그를 쫓아내십시오! … 여러분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지옥에 떨어뜨리기보다 그가 충격을 받고 여러분이 당혹스러움을 겪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다시 일어서서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용서 받기를 원할 것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무서운 영적 세력이 있는데, 성적인 타락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 지도자들을 공략하므로 교회 전체가 상처를 입고, 그 상처를 감추다 곪아 터져 버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는 더러움의 정체를 드러내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순결함’이란 우리가 아무런 오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더러운 것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쉽게 죄를 짓지 못할 것입니다. 순결함이란 ‘민감함’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아주 작은 오점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누룩의 비유를 말하는군요.
“누룩은 ‘작은 것’이지만, 빵 반죽 전체를 아주 빨리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그러니 그 ‘누룩’을 제거하십시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한결같고 순수해야지 나쁜 성분 때문에 부풀려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불완전함을 드러내야 완전을 향해 달려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만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적인 타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분리하는 가장 무서운 사단의 계략입니다. 감추어진 죄는 자꾸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도록 할 것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인생은 점점 더 큰 죄 가운데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공동체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남들이 다 그래도 우리는 그렇지 않아야 할 것을 향해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 어거스틴이 남긴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못하시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돌아가시지 못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결코 구원하실 수 없다.
셋째는, 회개하는 죄인을 벌하시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적은 누룩의 위험성을 판단하라!”
지난 4장까지 우리는 주관적인 판단과 이기적인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배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교만의 원인이 자신의 판단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우리가 명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거룩함을, 우리의 영적 생활의 위험성이 무엇인지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옛 습성이 완전히 버려지지 못함으로 발생한 ‘음행’의 문제였습니다. 역사가들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은, 고린도는 성적으로 아주 타락하고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복음이 떨어진 것이지요. 문제는 그들의 옛 습관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는 것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내 즉 첩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도 금하는 것이고, 심지어 이방 사람들도 죄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교린도 교인 중에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교인이 타락하면 이렇게 무서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의 거룩함이 무너져 내립니다.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55분 6척의 항공모함에서 출발한 일본 공군기 353대가 벌떼같이 하와이 진주만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미국 해군 기지를 공격해서 21척의 군함을 침몰시키고 117대의 항공기를 파괴하고, 2,003명의 사상자를 내고 960명의 실종자와 1,100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이것이 태평양 전쟁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실이 한 사람의 무관심으로 인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진주만 기습 55분 전, 정확하게 오전 7시에 태평양에 있는 미군 레이더기지에서 두 명의 병사가 스크린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레이더에 이상한 점이 점점 많아지더니 스크린을 꽉 채운 것입니다. 그 순간 깜짝 놀라서 중위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위는, “걱정 마라, 우리 편 비행기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55분 후에 폭탄이 떨어진 것입니다. 한 사람의 무관심으로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타이타닉호가 출발할 때, 인간의 자만심은 “이 배는 절대로 침몰하지 않는다!”고 했기에 구명보트와 구명조끼도 다 갖추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죄와 교만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런 음행의 죄를 ‘누룩’으로 표현합니다. 6절을 보세요.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죄의 위험성을 판단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죄가 가진 속성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5장에서 죄에 대해 무섭게 다루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3.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을 때, 죄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교만으로 발전합니다. 당연히 죄에 대하여 자기 정당화를 하다 보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죄는 변명을 동반합니다.
그다음에 죄는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을 찾습니다. 죄인들끼리 뭉치며 죄의 세력을 넓혀갑니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서 죄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죄가 죄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자신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만나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래서 죄 지은 자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남의 죄를 이야기하기 즐깁니다. 아니 숨겨진 남의 죄를 들춰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문제 근원은 처리되지 못한 죄의 문제입니다. 고백하지 못한 죄의 문제가 교만으로 이어지고, 자신을 정당화하다 보니 자꾸 다른 사람을 헐뜯게 된 것이지요.

쉽게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중에 누군가 예배시간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죄송합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조금만 일찍 서둘렀더라면….’하고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처럼 늦게 들어오는 사람을 보는 순간 죄책감이 덜해집니다. ‘나 말고도 늦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늦게 들어온 사람이 권사님이나 장로님쯤 되면 상당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반갑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할 구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패턴이 모든 삶에서 적용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죄는 언제든지 정당화할 수 있어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죄를 아주 무섭게 다룹니다.


어떻게 살아요?
본문 9~10절입니다.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린도전서 5장부터는 구체적인 크리스천의 삶의 규범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삶의 규범’이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전체를 통해 흐르는 하나의 맥이 있지요. 가장 타락한 도시였던 고린도에서 교인들이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할 것이냐의 문제 말입니다.
계속되는 강조점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삶에서 빛이 나야 합니다. 그럼 그런 빛 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삶의 규범이 필요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음행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하여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이 이 세상을 떠나서 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워야 크리스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크리스천의 삶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세속화된 크리스천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예 세속에 물들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다가 주일이 되면 훌훌 털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세상에 나가서는 죄를 짓고, 교회에 와서는 회개하는 삶이 반복되는 유형입니다. 어쩌면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이 자신에게 면죄부를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분명히 이런 세속화된 크리스천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24편 3~4절의 말씀을 보세요.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에게는 일상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고 구별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규범은 하나님의 평가에 달린 문제이지, 자신의 기준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세속화된 크리스천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에게도, 교인들에게도, 세상 사람에게도 얼굴을 들지 못할 때가 옵니다. 세속화된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에게 만만하게 보입니다. 조금만 협박을 해도, 조금만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것 같아도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이 우습게 봅니다.
이러한 일은 교인들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교회를 짓기 위해 불법을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이 그렇게 세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왜 하나님의 성전이 조롱거리가 되어야 합니까?

제가 아는 목회자 중에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예배를 인도하지만, 평일에 술집에 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하게 되었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 한 교인을 만났는데 서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사님이 자주 가던 술집의 마담을 그 교회에서 만난 것입니다.
만나 교회의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목사님 중에 한 분이 수치스럽게 교회를 떠난 적이 있습니다. 담배를 끊지 못한 목사님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린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십시오.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고는 구원의 기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교회에서 주일에, 성도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는 일을 숨어서 한다면 올바른 크리스천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 주변에 이런 세속적인 크리스천이 많다는 것이지요.

둘째는, 금욕적인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늘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에세네파’라 하여 숫제 광야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고대와 중세에 수도원 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물론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한 영성을 유지하려는 의도가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상 그 어떤 영성 훈련장에서도 죄의 문제는 항시 존재해 왔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죄의 문제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이 싫어서 떠나도 그 싫은 부분이 그곳에서 역시 존재하는 것이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고,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단 가운데 ‘신앙촌’을 기억하시나요?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마을을 만들어 살겠다고 했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신앙촌에도 술집이 생겼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직장을 다니고, 학교에 다니면서 크리스천 공동체를 형성해 모이십니까? 신앙적인 모임이 중요하고, 여러분의 영성을 지켜줄지 모르지만, 그 공동체가 사회성을 상실해 버린다면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대개가 삶을 쉽게 살려는 편의주의에서 시작합니다. 삶에서 고민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끝까지 세상 가운데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의 투쟁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다는 것을 너무 쉽게 목회자로 불림을 받았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사실 이 시대는 목회자보다 삶에서 전문적인 영역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느 곳에서도 여러분이 도피할 곳은 없습니다.

셋째는,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싶은 크리스천의 유형이 여기에 속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음행과 탐심, 속임, 우상 숭배라는 삶의 현실에서 떠나지 말고 그들과 함께 크리스천으로 사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이런 유형의 사람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빛과 소금’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어둠 속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빛’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싱거운 음식에 맛을 내고,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소금’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영적 갈증’을 유발하는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생활에서 어떻게 신앙을 구체화하느냐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유한한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영원한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끌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Opinion Leader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이 세상에서 삶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시편 15편 1~5절의 말씀을 보세요.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여러분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삶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까?
크리스천들은 유행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삶의 패턴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세요. 나치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을 들라면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디트리히 본 회퍼 라는 젊은 신학자를 들 것입니다. 당시 많은 신학자가 나치의 핍박을 피해 미국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본 회퍼는 그곳에서 의로운 싸움을 하다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아주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의 사상과 삶은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6.25 전쟁 때 수백만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그중에 크리스천이 아주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을 각오하고 크리스천이 그 자리를 지켰더라면 오늘날 북한이 이런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성숙한 크리스천은 어려움을 피해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자리를 지키는 성숙한 크리스천이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남편이 너무 힘들게 해서 그 가정을 떠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직장이 너무 힘들어서 신앙을 지키기가 너무 힘들어서 떠나고 싶은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나마 당신이 있어서 그 가정을 축복하고 그 직장을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좀 괴롭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룰 말씀이지만, 고린도전서 7장 14절을 보세요.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성경을 유심히 보세요. 우리 신앙인의 삶에 믿음의 모델을 제시하는 족장들의 삶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이방 땅에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를 하면서 전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주변 사람이 다 알았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제사를 지내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는 우물을 파서 물이 나올 때마다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양보하고 떠나고, 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결국에는 이삭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인정하지요. 창세기 26장 28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야곱을 보세요. 그가 집을 떠나 하란에서 외삼촌과 함께 살아야 하던 때, 그곳의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었음에도 야곱 때문에 그 가정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가 종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 머물 때, 요셉의 신실함과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하고 그 집안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지 않아도 그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삶에서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는 사람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형제라 일컫는 자에 대하여
본문 11~13절입니다.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하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모든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 아닙니까?
크리스천에게 무서운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잘못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 사람과는 쉽게 구분이 되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같은 교회 안에서 누룩과 같이 죄를 옮기는 자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사도 바울이 아주 단호합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크리스천 회중 가운데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하여는 분명한 구분이 필요합니다. 아주 강력한 조치를 합니다. “내쫓으라!”
어쩌면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늘 용서와 사랑,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 되라고 강조한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써야 했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신앙생활 하는 같은 공동체의 사람을 위해,
다른 하나는, 지금 죄를 범하는 형제를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함께 생활하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합니다. 믿는 사람들과는 확실하게 구분이 되니까 괜찮은데, 믿는 사람이 잘못 살면 헷갈립니다. 기준이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죄의 속성이 한 번 범하기가 힘들지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집니다. 그리고 죄가 무섭다는 것을 잊게 됩니다.
또한, 죄의 속성 중의 하나는 동료들을 자꾸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함께 죄를 지으면 담대하게 되고, 죄의 심각성이 희석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 속에 살면서 믿는 사람이 잘못되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핍박할 때는 신앙생활을 아주 잘했습니다. 구별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물들어 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에 대하여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성경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입니다. 알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사람들을 용인하면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를 놓치게 되지요.
단호하게 내어 쫓으라는 사도 바울의 의도는 오히려 그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징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안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잘못되는 것은 반드시 지적해야 합니다. 그것이 크리스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부도덕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며, 그 안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느냐가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부도덕한 자가 있다면 멀리하십시오.
죄를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삶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법이 적용되는 장소입니다.
언제까지 여러분의 삶이 용서를 구하는 삶으로 만족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