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8월 2일
본문: 고린도전서 4:9~21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나를 본받으십시오!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4장 9-21절]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14.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신앙적 해석이…
오늘 말씀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지요. 바울과 아볼로가 하나님의 사역을 하고 있음에도 자기중심적인 고린도 교인들 때문에 많은 비방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의 인격이란 일상의 삶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드러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인격이 어떠한지가 잘 드러나는 말씀이지요. 지금 사도 바울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바로 보여주는 것이 13절의 말씀입니다.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여기에서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라는 두 단어는 당시의 배경에서 볼 때, ‘자연적인 재앙이나 질병들을 추방할 목적으로 신에게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뽑힌 미천한 인간이나 죄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이해가 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잘난 척하는 것을 보니 참 지혜로운 것 같은데, ‘우리’는 미련해 보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보니 참 강한 것 같은데, ‘우리’는 연약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도인 ‘우리’를 미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지요. 바로 이 시점에서 억울한 가운데서 인격이 드러납니다. 14절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고 12절과 13절에서도
“12 …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를 압니다. 억울한 소리를 들으나 변명할 수 없을 때, 누군가와 싸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꼬여갈 때.
목사로서 저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많이 이해가 됩니다.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변명하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오히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참고 권면합니다. 아니,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처럼 권하려 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 행동을 종종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사울 왕을 죽일 기회에서 참았을 뿐 아니라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때가 있습니다. 참 억울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떠나 피난 가야 했을 때 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배신으로 도망을 가는 것도 힘든 일인데, 피난길에서 자신의 신하였던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피난 가는 왕이지만, 아직 왕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놓고 저주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다윗의 부하들이 분을 참지 못하여 칼을 빼 들고 시므이의 목을 치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엘 하 16장 10절에서 다윗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만류합니다.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라고 하며 그의 저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그대로 갑니다.
억울했을 것입니다.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그 모욕을 참고 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회복시키고 복을 주셨던 것을 압니다. 그의 마음 자세와 신앙을 보시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억울한 이 순간 사도 바울 역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사도 바울이 신앙적인 해석을 한 것입니다. 믿음의 언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비천한 사람 취급을 받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셨구나!’ 
삼선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서형선 목사님이 쓰신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라는 시입니다.

주님, 참 감사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행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를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계의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비록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당신이 나에게 바라시던 그 모든 것을 주셨사오니
 주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율법에 규정된 40대의 채찍에서 한 대 감한 39대의 채찍을 유대인에게서 맞았고, 한 대만 맞고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로마의 태장을 세 번 맞았습니다. 어쩌면 좌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가요?
좌절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인생이 되지 않을 때 찾아옵니다. 자기 생각대로 사람도 환경도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감사하다고’ 고백할 수 있나요? 이런 감사의 고백이 억지로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진정한 신앙적 고백인가요?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삶을 변명하기보다는,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보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어떤 비방을 받든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가 꺾이지 않으므로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고백은 아닐까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런 신앙적 해석이 자신에게서 일어나자 원망과 욕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고 비방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권면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만물의 찌꺼기 취급을 했지만, 이들은 결코 찌꺼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찌꺼기라고 인정하는 순간, 더는 찌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참 난해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억울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억울함을 씻으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비천한 취급 받는 것을 참고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를 높이시는 하나님,
바로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요즘 방송에 관계된 일로 방송국에 자주 가다 보니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방송하고 싶어서 때로는 애원하기도 하고 “나를 좀 뜨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방송국에서 제발 방송국에 나와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문제는 방송국에서 방송을 내 보내주지 않는데,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민망합니다. 실제로 자격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몰라주기 때문에 써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제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항의하는 것보다 겸허하게 자신을 받아들이고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을 세워 놓으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되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실력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느낄 때 욕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들을 축복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바라보며 실력을 키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원망하는 사람보다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십니다. 정말 너무나 억울해서 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미울 때, 억울함을 풀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억울함을 당하게 하시는지 바라보십시오. 이때가 여러분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며 신앙적인 해석이 필요할 때입니다.

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사모 Mother Wise를 할 때입니다.
제 아내가 그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모님이 공부하다 안 나온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답니다.
“나는 아주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의 아내인데, 큰 교회에서 사역하는 사모님이 미웠습니다. 나도 아버지 잘 만나서 그런 교회를 이어서 목회하는 목사의 사모가 되었다면 저런 위치에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마음에 원망이 가득 찼습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그릇을 만들어서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그 그릇에 합당한 사역을 맡기신다고 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축복과 기회를 함께 축복해 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께서 큰 사역을 맡겨 주시겠습니까?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원망’이라는 놈이 모든 것을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신앙적 렌즈를 가지고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수없이 많은 일 가운데 여러분의 신앙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신앙적인 해석을 내리는 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앙적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으로 넘어갑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아마도 사역자라면 모두가 꿈꾸는 말이 아닐까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사실 가장 겸손한 것 같지만, 가장 불신앙적인 말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저의 모습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세요.”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아주 교만한 말 같이 들리지만,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아빠처럼, 엄마처럼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아니면 “엄마 아빠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너는 잘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나요?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인가요? 아니 아직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 해도, 앞으로 여러분의 삶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요?
혹시 신앙적인 면에서도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나요?
이 사회의 비극, 가정의 비극은 젊은이들에게 닮아갈 모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한답니다.
“부모는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서도 가만히 보면 같은 것 같습니다.
“성경책은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스승은 되지만 전적인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복음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알았고,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식에서 최고라고 생각하고, 자신들의 주장, 주관적인 생각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회의 가장 큰 선교의 장애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오늘날 가장 무서운 Anti-Christians는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인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교회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이지요.
언젠가 제가 언급했던 SBS PD는 목회자의 아들로 자라면서 너무나 어려웠던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았고, “신의 길 인간의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예수를 믿는 사람 때문에 누군가 예수님을 멀리하고 상처를 입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셨나요?
언젠가도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교단의 큰 행사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행사하면 교인들이 와서 봉사하는데, 목사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상처를 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어떤 여행가이드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단체손님들을 안내하다 보면 가장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 목사님, 그다음이 장로님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조금만 불편한 것도 참지 못합니다. 늘 교회에서 대접을 받다 보니 늘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습니다. 도대체 삶의 모습을 보고 본받기가 너무 힘들어진 것이지요.
지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듣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의 삶을 본받을 수 없다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여러분이 가정에서 자녀들을 훈계할 때, 그 말을 듣는 자녀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혹시 어머니 중에 자녀들에게 훈계하면서 “제발 네 아비는 닮지 마라!”고 훈계하는 가정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교회가 이 땅의 소망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추구하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고 소망을 갖지 못한다면, 누군가 여러분의 모습을 바라보며 복음에 대한 열망을 갖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자녀가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다른 삶의 가치관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교회와 크리스천은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성형수술을 하면 누구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한다지요. 매력은 누군가의 눈길을 사로잡는 능력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의 권면은 어쩌면 신앙생활의 핵심일 수 있습니다.

“나를 본받으십시오!”라는 말은 둘 중의 하나겠지요.
아주 교만하든지, 아니면 아주 정직하든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그들이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과장하는 자랑은 정직하지 못한 데서 나옵니다.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랑한 것은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본이 되지 않는다면, 누군가 모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영원히 자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에 보면 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왕과 그 왕의 어리석음을 노리는 하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비밀스러운 천으로 만든 옷은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옷이 보이지 않는 자는 정죄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옷을 멋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이제 왕은 그 옷을 입고 시가행진을 합니다. 백성도 그 소문을 익히 알고 있기에 지나가는 왕을 바라보며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순진한 한 아이가 그 일을 고발합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어요!”
그제야 사람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왕도 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정직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모습을 수치로 여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이었고,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만과 거짓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눈이 바로 뜨이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을 본받기를 원했던 사도 바울의 마음은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지나가는 애를 붙잡고 “얘야, 제발 나를 본받고, 나와 같이 될 수 없겠니?”라고 권면하는 분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을 닮기 원하는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 15절을 보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스승’과 ‘아버지’를 구분하여 이야기합니다.
당시 헬라 문화에서 스승이란 지금의 선생님과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trainer’ 혹은 ‘tutor’라고 번역했고, 한자로는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귀족들은 아이를 낳으면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항시 붙어 다니는 사람을 골랐습니다.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노예 중에 가장 신실하고, 머리도 좋고, 학식도 있고, 순종도 잘하고 덕도 있는 아주 모범적인 노예를 말입니다. 그래서 이 스승은 아이들과 늘 같이 있으면서 생활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승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하나입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bear’의 낳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후손을 이어가며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대물림의 ‘beget’이라는 단어입니다. 유업을 이을 아버지입니다.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대를 이어가도록 원하는 아버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생각할 때, 단순한 교리를 가르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복음으로 낳은 자녀들, 즉 자신의 믿음의 계보를 이어갈 자식들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을 본받는 자식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주목하고 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 때, 이것은 자신의 학식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사역자가 되었으므로 너희도 사역자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독신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요, 여러분에게 좀 더 확실한 이해를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애썼던 것처럼,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권면이 교만이 아닌 이유는, 그의 목적이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품었던 소원과 목적을 고린도 교인들도 닮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강력한 도전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오늘 우리 교인들을 향해 저의 소원과 우리 교회의 비전을 여러분도 닮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향하여 엄마 아버지의 꿈을 함께 꾸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의 위대함은 그에게 그런 자식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7절)

그의 영의 아들이었던 디모데를 보내는데, 그를 보면 내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너희가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 19~22절에도 같은 말씀이 등장합니다.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그렇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가장 확실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디모데가 나에게 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행하고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향해 그렇게 나를 닮으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저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해 우리 교회를 바라보며 소망을 두십시오. 소망을 두려면 우리 교회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본받으십시오!”라는 말이 거짓이나 허세가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슴에서 깊숙이 가장 절절하게 나오는 절규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닮는 것이 소원일 때,
내 자식이 나와 같기를 바랄 때,
성공적인 삶이 아닐까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기를 원했던 것처럼 내 믿음의 자식들도 그렇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