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잠시 나는 생각해 본다. 왜 선배를 만났을 때 나의 상념이 미도리카와에게로 전이되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주인공은 다자키 스쿠루인데.

하루키는 우연하게 형성되어 시발하는 쓰쿠루의 세계, 그 평범한 세계를 특별한 시선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확장하고자 한다. 그는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고, 권태로 오염된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필터의 기능을 쓰쿠루에게 부여하였다. 어쩌면 미도리카와는 스쿠루의 기능을 가장 완벽한 언어로 드러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랬다. 미도리카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깃든 과거의 기억들, 특히 상처들과 화해하는 방법을 영혼의 심해를 탐험하는 듯한 언어로 말했다. 특별하고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 잔잔한 일상으로 영혼의 심해를 탐험하는 신비를 보여준 것이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나는 선배의 음악 인생을 조심스럽게 터치했다. 그의 내면에 동요가 이는 듯했다. 성급한 판단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에 이르는 어떤 에너지의 분출이 선배의 내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내과 의사인 그는 지금도 자신의 기억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을 터이다.

3파운드 정도 되는 자신의 두뇌 속에 13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며, 수십 조가 넘는 단백질 분자가 뇌세포 속에 들어 있어 모든 행동까지 잊지 않도록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하니 그 가벼운 터치가 선배를 작은 흥분 속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믿어도 되었다.

그는 잠시 과거의 시간 속을 오가며 오감이 맛본 자신의 지각, 소리, 맛, 냄새, 그가 부른 노래와 연주를 더듬는 듯 보였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모든 행동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순간의 평온이 그의 얼굴을 덮는다.

추억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심상은 때로 제각기 무슨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그 빛이 영혼에 닿을 때, 절망적 상황에서도 지극히 행복스러운 비전을 지닐 수 있다.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루키의 인물 미도리카와가 말한 진실의 정경일 터이다. 미도리카와는 이러한 인식의 가능성을 헉슬리의 이론으로 힌트를 보냈다. 

그렇다. 헉슬리의 <인식의 문>에서다. 나는 오래 전에 탐닉한 적이 있었던 올더스 헉슬리(Aldouc Leonard Huxley, 1894-1963)를 떠올렸다. 그는 적나라한 존재의 기적과 함께, 이러한 신비스런 감각을 얼마나 알기 쉽게 묘사하였던가. 아주 세밀하고 특별한 존재들이 이율배반적으로 모든 존재의 성스러운 근원으로 파악되는 과정을 쉽게 이해되도록 설명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선배에게서 잠시 자유로워졌다. 여러 가지 꽃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또렷이 그 형태를 드러냈다. 정원을 덮은 어둠 속에서도 나는 꽃들의 환한 빛깔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햇살 눈부신 언덕의 꽃나무들에게서 느꼈던 것처럼, 지극히 행복스러운 극치감을 본 것이다.

내 눈에 비친 모든 것은 시공을 초월한 존재의 강렬함으로 영혼을 흔들었고,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상호 관련성으로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깊이를 잴 수 없는 신비 사이에 어둠과 별과 구름과 꽃과 나무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였다. 이 경험은 끊임 없이 변하는 계시들로 이루어진 영원한 현재라는 생각, 누군가 그랬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고. 생명의 신비 사이로 즐기는 것이라고.

나는 자유로웠고 평온했다. 삶과 죽음과 선배로부터 해방되어, 총체적인 마음을 얻게 되었다고 할까. 사람과 사물에 대하여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열려 있는 자유함의 순간, 이것만이 영원한 현재인 듯 느껴졌다. 인간은 이렇게 의식의 문을 열어젖히는 것일까. 미도리카와에게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직관으로서의 인식을 언어로 드러내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이 힘은 로고스의 생명의 한 자락이며, 은혜의 영역이다. <계속>

/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