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6월 14일
본문: 고린도전서 3:10~15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드러나리라!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3장 10-15절]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때가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이며,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둔 것이죠.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삶을 설계하고 건축하는가?” “어떤 시련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가장 견고한 터는 무엇인가?”
우리가 쉽게 흔들리는 이유는 ‘성공’이라는 터 위에 우리의 인생을 세우기 때문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이기라는 것이 아닐까요?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과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수천 년의 기독교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하나님의 역사는 성공한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핍박도 이겨낸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는 300년 동안 로마의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1991년 쿠바는 공산당대회에서 “종교인도 공산당원이 될 수 있다.”는 강령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공산당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온갖 차별과 박해가 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성공을 다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핍박과 차별도 중궁에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출세를 포기하고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늘어 갔습니다. 아무리 막아도 되지 않기에 오히려 공산당이 강령을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겠다는 고백이고 선언입니다.


“터”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 신앙에서, 그리고 교회에 있어서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본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이지요. 오늘 본문 10~12절에는 계속해서 ‘터’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foundation’이라는 단어입니다. ‘기초’ 혹은 ‘기본’이라는 말이겠지요.
자신이 고린도에 교회를 세운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세웠고, 그 터 위에 다음 사람이 세울 것도 기본을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지요.
전 주에 우리가 보았던,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전3:6)라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11절)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어떤 기초와 틀을 잡느냐에 따라 그다음 건물이 지어집니다. 교회와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지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겠지요? 그럼 교회와 신앙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 근거하지 않고도 세워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이런 질문으로 시작하면 좀 더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에서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그리스도 때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유물론’ 다시 말하면 ‘무신론’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신론의 출발점은 진화론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고, 사회가 유토피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동물에서 비롯되었기에 끝까지 동물의 영역에 머무를 뿐입니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됩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피의 숙청도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면 인간의 존재 자체가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공산주의를 시험한 나라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기본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참다운 존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난 다음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나를 인정하게 되고, 타인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만이 이기적인 자아에서 이타적인 자아로 변해갑니다.

왜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교회를 세웠는데,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사람을 인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자랑하지 않고, 누구의 연줄에 섰는가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과 다른 라인에 서 있는 사람,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타락과 무서움은 하나님을 주인 삼지 않고 교회를 주인 삼고 사람을 주인 삼았을 때 일어났습니다.
왜 유럽의 교회가 타락했습니까?
자신들이 핍박을 받을 때, 늘 약자들 편에 서서 위로해 주시던 주님, 그리고 자신들의 원수조차도 사랑하라는 말씀에 따라 기도하고 용서할 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강성해지자 교회와 다른 사람들을, 아니 엄밀히 말해서 교회 안에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중세 시대의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한 일, 그리고 마녀 사냥이라는 이름 아래 화형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은 많은 사람이 그러한 예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의 터에 세워지지 아니하고, 언제부터인가 어떤 사람, 어떤 교리에 근거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어떤 사람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졌느냐에 따라 그렇게 무섭게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핍박할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두 가지를 구독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가능하면 두 신문의 사설을 다 읽게 시켰습니다. 두 신문을 보면 정말 다른 나라의 신문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요? 어쩌면 그렇게 다른 의견들이 존재할 수 있고, 그런 확신을 할 수 있는지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자기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두렵지 않으십니까? 6.25 전쟁을 통해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서로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지 않습니까?
촛불시위를 하는 종교인들을 바라보며 승복을 입고, 성의를 입고 거리에 나간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과연 옳은 일인지,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들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이 모든 갈등이 가장 기본적인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기 생각과 사상을 주장하기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질 때 교회입니다.
‘변질’된다는 것은 기초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온전한 기초 위에 잘못된 것을 얹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의 생각인지, 하나님의 마음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교회는 적어도 ‘하나의 교회’ ‘보편적 교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 말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문화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교회’를 이해할 때, 가정적인 의미에서의 집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민족, 어떤 나라,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하나의 집,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姓)’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누구 아들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성이 없이 이름만 있습니다. 다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무슨 성이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김씨, 박씨, 이씨, 최씨, 그리고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어느 학교, 어떤 라인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하나님의 식구,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시지요?
당신의 며느리를 당신의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친구의 아들과 딸을 당신의 아들과 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다른 일이 발생할까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 터 위에 세운다는 것
조금 전 10절 말씀을 통해 지혜로운 자가 그 터 위에 집을 짓는다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운다는 것이 교회론의 기초라는 것이지요.
이제 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졌으면 이제 다른 터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인생을 가장 지혜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한 달 전 미국으로 공부하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떠난 어떤 집사님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 땅에 사는 대부분 부모님이 고민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이곳에 남편도 앉아 있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편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이 집사님의 고민은 미국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남편과 아이들이 떨어져 지내는 시간보다 의미 있는 시간이냐는 근본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아주 간단하게 답을 보냈습니다.
“집사님! 지금 당신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일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분명하다면 참고 견뎌야 하는 이유도 분명할 것이고, 만일 지금 겪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빨리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과 인생의 가장 큰 고민, 그리고 인생을 후회하는 것, 교회가 잘못 돼가는 근본적인 원인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잃어버리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보셨나요?
목수에게는 하나의 규칙이 있습니다! “한 번 자르기 위해 두 번을 재라“
목적을 안다는 것, 목적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을 잘 설명하는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카네기는 집을 지으면서 거실의 벽난로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넣어 달라고 건축기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벽난로는 우리의 제단이고 불꽃은 우리의 희생이다.'
벽난로가 설치된 후 건축기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다른 글을 선택하셔야 하겠습니다."
"안되오, 글은 바꿀 수 없소. 벽난로를 더 크게 만드시오."
"거실이 더 크기 전에는 벽난로를 바꿀 수 없는데요?"
"그럼 거실을 더 크게 만드시오."
"그럼 거실 크기와 집의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
"그럼 집을 더 크게 지으시오."
내 삶의 가치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어떤 터 위에 놓아야 할까요? 기본이 되는 터는 앞으로 올라갈 건물의 크기와 가치를 이미 결정하는 것입니다. 높은 빌딩을 세우기 위해서는 아주 깊이 기초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에 그리스도의 터가 주어진 순간부터,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여러분의 열매가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가장 수치스러운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지만, 자신이 세운 교회의 터가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 이곳저곳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지만,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에게 이 그리스도론이 아주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합니까? 많은 기사와 이적으로, 병 고치는 기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는 이유로 선전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1장 8절을 보세요.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올바른 복음을 전하는가?’

오래 전 제가 책을 읽다 당혹스러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신문기사를 인용한 글이었습니다. “분당의 김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는 마케팅에 물든 잘못된 교회의 모델입니다. 그 교회는 흡연실을 만들고 교회와 지역 주민들의 의식 조사를 통해…”
가만히 읽다 보니까, 우리 만나교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분에 대하여 확실한 믿음이 있습니다. 제가 교회에 흡연실을 만들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흡연실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권장하기 때문에 만들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신가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셨던 것처럼, 저도 아니 만나교회가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는 contact point로 흡연실을 만든 것이지요.
우리 교회의 자랑인 카페 파구스에서 저는 성가곡이나 십자가를 걸어놓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일단 교회에 발걸음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장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을 보세요.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굳게 믿는 한, 우리 만나교회는 끊임없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리를 가르치고, 우리 교인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어떤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은 왜 귀에 거는 마이크를 쓰시나요? 그런 마이크는 노래하는 가수들만 쓰는 것이 아닌가요? 은혜가 되지 않는데 바꾸시면 안 될까요?”
제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이 마이크를 쓰는 이유는 설교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동안 교회에서 오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어색할지 몰라도,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굉장히 친숙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 교회론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이 교회에서 기준이 되기 시작한다면 빨리 가장 중요한 곳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구원과 상급은 다르다!”
본문 12~15절입니다.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그 공적이 나나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조안나 위버가 쓴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상태를 영적 시소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시소를 타면 무거운 쪽이 내려갑니다. 그리고 가벼운 쪽이 올라가지요. 그래서 균형을 잡으려면 무거운 쪽은 앞으로 가벼운 쪽은 뒤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균형을 맞춰주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누군가 가운데 서서 양쪽 발을 디디고 있다고 올라가는 쪽에 힘을 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균형을 잡게 됩니다.
적절한 비유일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집을 지어갑니다. 즉, 우리가 사역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13절에서 ‘공적’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에는 ‘work’, 헬라어로 ‘에르곤’이라는 말은 ‘수고’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수고하는 것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지요.
어떤 이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어떤 이는 나무나 풀이나 짚 같은 것으로 수고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고를 시험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적에 따라 상급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구원과 상급은 다른 것입니다.”
제가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도들의 거룩함이란 이 세상 속에서 빛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우리가 쌓아가는 공적은 이 세상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라는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리아는 예수님이 집에 찾아오셨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말씀만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것이 옳다고 지지하시거나 어느 쪽 편을 나무라신 것이 아닙니다. 결국, 마리아와 마르다는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영적인 것과 세상의 것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적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적을 따라 판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터’는 가상의 공간이나 허황되게 세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세워진 것입니다. 즉, 구원받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시겠다는 것, 판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사상은 여기저기에서 발견됩니다.
유명한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달란트 비유’도 바로 그런 맥락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종에게 달란트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악하고 게으른 종은 그 달란트를 묻어둔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에게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었겠지요.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를 남겼느냐가 아니고 그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까?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의 ‘수고’를 하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주제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출발합니다. 10절의 말씀을 보세요.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그가 고린도 교회에 그리스도의 터를 닦아둔 수고를 한 이유, 그의 공적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입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구원받은 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의 삶 속에 떠나지 않고 늘 기억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에 매여 죽도록 충성했으며, 주의 은혜에 겨워 매를 맞았습니다. 그가 주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열정으로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 토론토 코스타에서 말씀을 전하며 또 들으며 저에게 가장 은혜가 되었던 것은 목사님들의 설교가 아니라 ‘일터의 현장’이라는 시간에 3일 동안 계속된 평신도들의 간증이었습니다.
한 분은 단동에 있는 샘 복지병원에서 만났던 이근욱 선교사였습니다. 의사로서 잘 살 기회가 있었지만, 주의 사랑에 겨워 아내와 3명의 자녀를 데리고 중국 땅에서 살아갑니다. 아이들을 교육시킬 돈이 넉넉지 않아 공짜로 보낼 수 있는 학교에 보내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런데 그분이 어느 날 심양의 모택동 동상에 모여 있는 젊은이들이 안타까워 광장에서 가발을 쓰고 클라리넷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의 사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구나.’

그리고 둘째 날은 박수웅 장로님의 간증이 있었습니다.
젊은 날 한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미국에 건너가게 된 이유, 그가 미국에서 마취과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온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삶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살 것인가가 고민되기 시작했답니다.
그분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목사로서의 부르심 없이 현실을 피해가려고 목사가 되려 하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야! 너는 가만히 있는 게 나를 도와주는 거야!”
이 땅에는 부르심이 분명한 목사가 필요하고 각계각층에서 탁월하게 사역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박수웅 장로님이 미국에 가게 된 이유는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였고, 그곳에서 어떤 과를 선택할까 고민하며 결정한 것이 ‘마취과’였답니다. 자신이 미국에서 청년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마취과보다 더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과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는 사역을 위해 선택한 마취가가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분은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에게 자신의 간증을 이야기합니다. 다 자신의 돈으로 비용을 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집도 줄이고, 옷도 싼 것을 입습니다. 이분의 표현입니다. 왜 명품을 입고 옷 신세를 지느냐고 말입니다. 오히려 나 때문에 옷이 빛나야지, 옷이 내 신세를 져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입니다.
멋진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인생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인생은 B 와 D이다.”
B와 D 사이에는 무엇이 있나요? ‘C’가 존재합니다. 즉 ‘Birth와 Death 사이에서 Choice’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자로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느냐? 금과 은과 보석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고, 불에 타버릴 지푸라기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따른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매년 몇 차례씩 코스타에서 말씀을 전하며 그곳에 모이는 청년들을 보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보고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가 잘 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이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가치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그 은혜에 겨워 헌신하기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주는 도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평가를 하나님께 받으시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어윈 루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을까요? 칼럼니스트 암브로스 비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낙타들은 무릎을 꿇고 그들의 짐을 받는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해야 할 것이 생각나고, 그렇게 살아간 인생이라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게 펼쳐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구원의 감격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삶을 살아가고 증명되는 것이야말로 가슴 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