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운동연구가).

필자는 앞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유형의 성령세례론이, 영적 사실과 경험의 ‘성령세례의 양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전제해야 할 것은, 성령세례라는 경험의 내용이 신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피녹(Clark Pinnock)은 ‘세례’라는 용어를 전문적인 술어라기보다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보면서, 이 체험을 단지 ‘제2의 복’이라는 틀에만 맞추기보다는 최초의 은사 체험인 회심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이 구체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한수도 그의 글에서 “성령세례 자체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비로소 누리게 되는 권리들의 특별한 측면들이요 경험들이다. 이 점에서 신약성경은 두 개의 복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김광식도 역시 성령세례 체험이 전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바를 활성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부언하자면, 죄성의 제거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성령의 매개를 통한 십자가의 연합의 진리 속에 이미 포함된 것이다. 또 사역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지닌 능력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령은 이미 거듭날 때 내주하시는 것이다.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라 할지라도, 그 방언 체험이라는 현상은 이미 거듭난 신자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인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점은, 신자의 영적인 경험에만 호소하는 신앙은 복음적 신앙의 근거를 흐리게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 치우치게 될 때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한 예로 이한수는 “성령세례를 회심의 체험과 구별하는 것은, 하나의 경험론적 이원론으로서 성령운동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야기시킨다”고 보았다: (1) 경험론적 이원론은 아직 ‘극적인 경험’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성령 체험과 은사의 가능성에 관한 부정적 기대를 심어주게 되는 반면, 그런 경험을 하고 난 자들에게는 과도한 자긍심을 심어주게 된다. (2) 성령 체험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믿음의 성취로 생각하는 신자들은, 자칫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여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고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3) 더 나쁜 것은, 경험론적 이원론이 카리스마적 교단과 기성 교단의 분열에 투영되어 소위 발전된 경험론적 이원론을 끌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필자도 역시 이 같은 경험론적 이원론이 야기시키는 문제의 심각성을 좌시(坐視)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의 문제도 역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에 대한 조명을 성경 내용의 해석학적 연구에만 의존하고 인간의 신앙 경험 차원을 간과할 경우, 이것 역시 전술한 경험론적 이원론의 폐해에 못지 않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성경에는 분명한 영적 사실(spiritual truth)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 영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신자의 성령 체험이 성경의 영적 사실에 입각한  획일된 양상으로만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가? 만일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의 영적 사실의 차원 위에서 다양한 경험적 적용을 일구어내는 작업에 노력해야 할 줄로 안다. 적어도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 복음적 성령운동의 확산과 건전한 성령 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적 사실의 차원과 함께 경험의 차원 역시 심도 있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영적 사실의 차원’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명확하게, 그리고 획일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롬 6:1-10이나 고전 12: 13과 같은 구절은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 차원을 획일적으로 다룬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영적 사실로서의 성령세례는 당연히 획일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반드시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만 제시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의 ‘성령의 권능’, ‘성령 받는 것’, ‘성령이 임함’ 등에 대한 기록들은 성령세례의 경험적 차원에 더욱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서, 반드시 획일적이라고는 볼 수 없게 여러 양상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영적 사실의 차원과는 달리, 경험의 차원에서의 성령세례는 얼마든지 한 번 이상 경험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영태는 성령세례가 구속사적인 면에서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지만, 그러나 경험적인 차원에서는 신자들의 경험 속에 반복되며, 이 체험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세례’라고 하는 말이 반드시 일회적이어만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일회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세례를 자꾸 물세례와 연관 짓기 때문이 아닐까. 라이스(John R. Rice)는 “세례란 ‘담그고, 가라앉히고, 덮고, 압도하고, 적신다’는 등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그것은 ‘시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전에 받은 것처럼 두 번째 받지 못할 논리적인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나 성령충만이나 실제로는 똑같은 경험을 표현한다고 전제한다면, ‘성령세례는 일회적이요 초기적이며 그 후에는 성령충만의 경험이 반복된다’고 하는 통념적 이론도 결국 ‘세례는 반드시 일회적이어야만 한다’는 관념에서 솟아난 것이므로 재고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물세례야 당연히 그리스도인이 된 표식으로서 일생에 단 한 번 받으면 충분하다. 두 번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령세례의 경우를 볼 때, 먼저 영적 사실의 차원에서는 일회적으로 중생과 연관 지어 간결하게 설명을 마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경험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일회적이어야 한다고 제한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점에 대해 박명수는 성화의 단계가 중생과 성결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좋은 구조이지만, 이것을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개성을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모든 종교 체험을 언제나 두 단계로 고정시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견해이다. 세례라는 말의 용법상, ‘성령에 충만히 세례되었다’, 또는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그의 말이다.

더군다나 신자의 경험 차원을 볼 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세례의 내용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정결’, ‘사역의 능력’,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 ‘성령의 나타남’ 등이 일생에 걸쳐 단 한 번에 모두 경험되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분파된 ‘제3의 축복’(the Third Blessing) 그룹이 좋은 한 예이다. 그들은 웨슬리안 성결운동 속에서 성결과 능력 사이의 논제가 그치지 않는 것을 보아왔다. 경험적으로 볼 때, 그들은 ‘온전히 성화’되었다고 고백한 많은 이들에게 ‘사역의 능력’에 있어서는 힘 있게 사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제2의 축복은 온전한 성결이고, 그 뒤에 따르는 제3의 축복이 성령세례”라고 하는 입장으로 발전시켰다. 만일 ‘성령세례의 양 차원’에 대한 이해가 이들에게 있었더라면, 미국 웨슬리안-성결 그룹  내에서의 교단 분열을 억제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