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5월 3일
본문: 고린도전서 1:18~31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1장 18-31절]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이제 세 번째 고린도교회 속으로 들어갑니다.
첫 번째 말씀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마음이 얼마나 사무치게 간절했는지를 알았고, 마음만큼이나 교회의 갈라진 모습이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도 보았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아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을 뿐인데,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는지 말입니다. 마치 선물을 주시는 분은 바라보지 않고 선물에 감격하는 유치한 어린아이들처럼 말이죠.

오늘 말씀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방식이자 가장 중요한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방식’이란 마치 수학 공식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문제를 보느냐는 것이죠.
얼마 전에 한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너무너무 오토바이가 타고 싶은데, 사모님이 계속해서 반대합니다. 자꾸 목사님이 조르니까, 사모님이 극단적인 말을 한 것이죠. “여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안 돼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갑자기 밖으로 나가더니 흙을 한 줌 쥐어 와서 사모님의 눈에 뿌리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참 답답한 사람, 그리고 절대로 자기 생각이 바뀌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프레임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 결국 신앙이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사람의 문제를 사람이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방법과 지혜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회를 다시 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유진 피터슨이 쓴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 내가 세상의 지혜를 뒤집어엎고 전문가라는 자들이 얼마나 정신 나간 사람들인지 폭로하겠다.”

하나님의 방식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장단점을 계속해서 대비하고 있습니다.
지혜와 어리석음, 약함과 강함, 천함과 귀함.
세상의 관점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식과 사람의 방식이 같다면 왜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 중에 가장 특별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 자체가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제 다시 십자가의 복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십자가의 방식).
십자가 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십자가를 걸어놓고 바라봅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도 다닙니다. 밤에 높은 빌딩에 올라 아래를 보면 참 많은 십자가 네온사인을 봅니다. 요즘 드라마를 보면 배경에 잡히는 그림에 여지없이 십자가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십자가가 있는데, 십자가의 정신, 아니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달아놓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 “달아놓고 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누가복음서 기자는 ‘날마다’라는 말을 적어 놓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주어진 십자가를 지라는 것으로 들었던 모양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영광으로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길은 필연적으로 ‘골고다 언덕’을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이기신 최후 승리의 길입니다.

제가 지난해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고민했던 마음이 요즘 교회를 보면서 고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 그 마음이 이 부분을 가장 잘 정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은 ‘지식’으로 일하지만, 교회는 '지혜'로 일합니다. 지식은 사람들이 배워서 쌓아가는 것이지만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교회의 문제는 지혜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식으로 풀려 한다는 것이지요. 왜 교회의 문제를 세상으로 가져갑니까? 더 이상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세상의 전문성을 의지하겠다는 것이죠. 그 순간 교회의 기능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든 가치와 상식을 무시하는 공동체 즉 '몰상식'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세상의 가치와 상식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을 모르거나 전문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전해진 "십자가의 복음"이 그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자랑해도 "하나님의 약함"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제 말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번 주일도 예기치 않게 작은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참 어렵게 저에게 설교 부탁을 합니다.
"교회가 너무 작아서…."
제가 설교하는 한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사례비를 주지 않으면 설교를 합니다."
제가 모든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례비를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저라고 돈이 싫겠습니까? 그 사례비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주고 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지난해 제가 섬기던 미국의 교회에서 집회하고 사례비를 다 놓고 왔습니다. (혹시라도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저를 초청하는 교회가 있다면 실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감사하는 옛 교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죠.
제가 깨끗하거나 청빈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모든 목회자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에게는 만나교회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받은 사례비, 결혼 주례비를 다시 교회에 헌금하는 것이죠. 조금씩 돈을 모으다 보면 돈을 모으는 목사가 될까 봐 스스로 경계합니다. 저 자신 속에 있는 약함과 세속적인 면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는 그렇게 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환경이기에 그렇게 합니다. 단지 목회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생각할 뿐이죠.
적절한 예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세상에는 모든 일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들어온 십자가 때문에 세상의 상식을 적용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제가 담임목사가 되고 참 당황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큰 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사를 할 때마다 '리베이트'라는 말이 나옵니다.
"목사님 조심하세요! 혹은 목사님은 공사에 관여하지 마세요!"
저에게 답답한 것은 왜 교회에서, 교회 일을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냐는 것이죠. 한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목사님! 세상에서는 공사를 하면 리베이트라는 것이 관행입니다!"
그런데 종종 교회에서 공사를 하고, 건축을 하면 리베이트가 오고 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교회를 세상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죠.
이쯤 되면 교회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지난번 공사를 하면서 공사를 담당하는 테스크포스 팀이 참 바보 같이 일했습니다.
‘공사를 책임진 장로님들이 밥 한 끼도 업자들에게 얻어먹지 말고, 일하는 모든 업자의 모임에서는 장로님들이 돈을 낸다.’
세상 사람이 보면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교회에서 일하는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는 '리베이트'는 생각도 못 하는 곳입니다.
미련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십자가의 방식"이라면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사도 바울이 오늘날 교회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 가졌던 답답한 마음을 가질 듯합니다. 어쩌면 교회에서 ‘성공’이라는 것이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느냐고. 어쩌면 교회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느냐고.
언젠가 제가 꿈꿨던 것이 있습니다. 집 팔아서 돈이 많이 남았다고 감사헌금하기 쉽습니다. 우리 자식이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얻어서 감사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집을 손해 보고 팔게 되었는데 왜 그리 감사한지 눈물이 나온다고, 우리 자식이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데도 사명 따라 다른 대학에 간 것이 매우 기쁘다고, 우리 남편 좋은 직장에서 편히 살 수 있는데, 그곳에 있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것 같아 직장을 옮겼는데 감사하다고.
세상과 다른 감사를 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완전할 수는 없지만, 십자가를 생각하며 다른 가치 때문에 고민하며 살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다 보면 조금은 십자가에 가까워지지 않겠습니까?
이번 주간을 시작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가장 미련한 일" 하나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이 지식으로가 아닌 하늘로부터 행하는 "지혜로운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방식이라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나요?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기로 작정할 때, 십자가의 방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18~19절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가 교회의 분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모든 분열의 시작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우월감,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 학식과 위치를 자랑하는 데서 왔다는 것이지요. 즉 자신들의 지혜에 의존하는 자들이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가졌느냐, 자신이 어떤 존재이냐를 자랑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폐하시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도’가 선포되는 곳이요,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본질을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우리 교회에,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도전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는 일들이 십자가의 능력에서 행해지는 일이냐, 아니면 교회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이냐, 오늘 여러분이 하는 수없이 많은 사역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눈물, 사랑의 흔적이 있느냐는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아니 조금 더 본질에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세상의 가치와 기준, 지혜에 의존하여 믿는 것이냐 아니면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냐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 두 가지 경향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또 하나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가 능력이 되지 못할까요?
유대인들이 바랐던 것은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정치적인 변혁, 놀라운 힘, 삶의 영광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당하고,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며, 매를 맞고 벌거벗은 채 돌아가신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밑에서 소리 지르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그러면 믿겠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비참하게 죽지 말고 천사들을 보내어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멸해라!”
바로 이것이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능력이 아니라 패배의 상징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단의 세력 앞에서 허무하게 무릎을 꿇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백합니다. 십자가 없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도 용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십자가의 피와 눈물을 통해 우리가 변화되었고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바로 이런 유대인들처럼 십자가는 너무 무능해 보여서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이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내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한 그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하며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은 우리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지신 사건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이해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고, 우리를 얽매고 있던 율법에서 해방됩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두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신비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의 표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능력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지 너무나 불합리한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왕권을 휘두르지 않고, 인간이 되신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해하려고 하니까, 설명하려고 하니까 설명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상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 누리라고 주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내가 너를 사랑해!”
“그래, 왜 사랑하는데?”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유를 찾으면 찾을수록 그 이유가 불합리해집니다. 가진 것으로, 생긴 것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사랑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그냥!”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가 믿을 때 와지는 확신이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눈물이 나고, 위로가 되며, 확신이 생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원수가 용서되고, 실망 가운데 용기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음을 믿기에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과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십자가 외에 그 어떤 능력도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믿으시나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입니다(하나님의 택하심).
본문 27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또 하나의 놀라운 방식은 미련한 것을 통해 지혜롭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올해로 제가 만나 교회 목회를 시작한 지 만 11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제일 힘들었던 때는 교인들을 설득해서 끌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때에는 저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했고, 제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여 년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제가 목회를 가장 편안하게 잘할 수 있었던 때는, 제가 가진 것으로 교인들을 설득하려 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늘, 제가 아프고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하고 나면 교인들이 ‘순한 양’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시키려 하지 않아도 저를 이해하려는 교인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지혜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회를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주님께서는 힘으로 증명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힘을 쓰지 않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위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과 피 흘림을 통해 그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문제를 제기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교만과 우월성, 비교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지혜와 표적을 구함으로 신앙을 부인하는 세대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힘 있고 잘 난 사람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26~29절을 보세요.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잘난 사람이 잘 되고, 못난 사람이 못 된다면 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의 지혜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정말 약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세요. 잘 나가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자신이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주변을 보세요! 예수를 믿고 부자 된 사람들은 많지만, 부자들이 예수를 믿는 데는 문제가 생겼을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옛날 로마 시대에는 힘이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 소위 ‘팍스 로마나’라는 ‘평화의 로마 시대’는 힘으로 짓누르는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로마 제국에는 6천만 명 정도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믿은 자들은 대부분 노예였습니다. 간혹 귀족들이 예수를 믿으면 부도덕한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귀족들이 노예들을 사람 취급 안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예를 힘으로 다스리지 않는 귀족들은 형편없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로마제국을 복음화시킨 것이 귀족들과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예들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노예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고통 가운데 찬송을 하고, 자신을 학대하는 주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검투장에서 순교를 당할 때 당당하게 죽어가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강력한 로마가 가장 비천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통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루살렘에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그람마타’라고 불렸던 사실을 아십니까?
이 말은 문법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제사장들이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았을 때 일어난 일들을 보십시오. 사도행전 4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그렇습니다.
그들이 말하고 기적을 행함을 보고 똑똑한 체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힘과 실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랑하는 모든 것이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지난달 몇몇 목사님들과 교제하며 하룻밤을 지낼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꽤 큰 사역을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다 인생의 문제,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문제와 약함이 없다면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지고, 나의 삶에서 나의 자랑거리가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자랑이 됩니다.
우리의 참된 진리는 주 안에서 자랑할 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들어 쓰셔서 내가 이렇게 불림을 받았다는 고백,
미련한 나를 주님께서 이렇게 지혜롭게 사용하신다는 고백,
연약한 내가 이렇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부흥회 때,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우리의 지혜나 자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시는 그 믿음 위에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하나님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지금 우리가 안는 문제와의 싸움이 하나님과 문제와의 싸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불신앙인들은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나를 믿으시고,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의 부요함을 믿습니다.
이것이 참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주인이 되시며, 그리스도의 보혈 가운데 우리가 여기 불림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보혈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이끌어 가실 것에 대한 확신이 오늘 여러분 각자에게 참된 진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