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늘 저는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두 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마치 눈이 없는 사람이 볼 수 없고 귀가 없는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것 같이 영이 죽은 니고데모는 영적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녀들은 이처럼 다 죄 가운데서 영이 죽어서 태어납니다. 사망을 상속으로 받아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은 태어나자마자 영이 죽었으므로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고 무신론자로 유물론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죄로 인한 아담의 변화

죄로 인하여 아담과 하와의 생활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하나님 사람이 되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보통 인간입니다. 그냥 사람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육적인 형상만 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여 영이 죽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대화가 두절된 그냥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안돼요.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 간절히 원하지만 영이 죽어서 대화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있는 것입니까?

성경에 창세기 2장 7절에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생령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 것입니다. 죽지 않은 인간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생령이 죽어버렸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했는데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구를 사람에게 주셨는데 아담은 마귀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구를 마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마귀는 아담으로부터 지구 통제권을 자기 손에 넣었습니다. 아담은 마귀의 사람이 되어서 모든 죄악이 가득한 삶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지구를 마귀에게 양도하고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마귀의 수하에 넣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시키는 대로 온갖 죄악을 다 범하고 이 세상에 버림받은 존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누가 이 세상을 다시 구제할 수 있습니까? 그대로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악할지라도 우리 자식들이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죽여 버립니까? 그러지 못합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잘못되어도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최고 걸작품으로 우리 사람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자기 능력이 미치는 한도내에서 걸작품인 사람을 만들었는데 사람이 반역했다고 그대로 영영 죽여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고 구제하므로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비용이 듭니다.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게 되면 비용이 들어요. 입만 가지고 사랑하라고 하면 아주 쉽습니다. 부모도 자식보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입으로 말할 수 있지요. 이제 며칠내에 어버이날이 다가오는데 자식들이 걱정이 될 것입니다. 부모들을 어버이날에는 특수한 날에 잘 섬기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됩니다.

저는 최근에 마음에 굉장히 후회가 되고 마음이 괴로워요. 기도하는데 하나님 성령께서 제 마음속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너희 부모를 좀 더 기쁘게 했더라면 장수하셨지만 아버지, 어머니가 다 94살에 세상을 떴지만 적어도 100살까지는 살 수 있었는데... 마음이 괴롭습니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 생활비는 충분히 드리고 그리고 자유롭게 거하실 집도 전세를 내서 드리고 자동차도 사서 운전수 대어서 모시게 했고 그런 형식적인 일을 했다고 해서 별로 부모 찾아서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은 부모를 입술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대화를 해야 된다. 사람이 늙으면 외로워지고 대화하는 사람을 요구하는데 너는 물질적인 것만 다 했고 대화하지 않았지 않느냐? 마음속에 상당한 억울한 마음을 가지시고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마음이 참 안됐어요. 그런데 저도 요사이 집에 가서 손주, 손녀들이 와서 복잡하게 떠들면 귀찮기도 하지만 안 떠들면 마음이 섭섭합니다. 떠들면 사람 사는 것 같고 안 떠들면 죽은 집안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엄청나게 사랑하시고 사람과 대화하시기 위해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말상대를 갖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님 레벨이 된 사람을 만들어야 대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타락하고 고통 속에 빠졌으니 대가를 지불해야지요.

2.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건지려고 하니까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비쌉니다. 싸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려고 생각하거든 대가가 비싸게 나온다고 각오를 해야 돼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사랑은 주는 것이요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이 희생제물로 드리기로 작정했으니 이것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마이동풍의 태도를 취한 유대인들, 생존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4차원의 세계고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인 3차원의 세계입니다. 대화가 안돼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차원이 다른 이 인간을 구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영적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와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 알아 안 듣는다. 당신은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고 나는 4차원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니까... 차원이 다른데 네가 말을 해서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너는 알아들을 수 없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야 대화가 가능하다.”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뭔지 니고데모가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위대한 다른 점은 다른 종교는 율법과 의식을 집행하고 선한 일을 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노력을 하는데 우리 기독교는 그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를 감고 목욕 재개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빈민굴에 가서 봉사도 하고 육체로 아무리 노력해도 착한 일을 하니 좋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믿어서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신도 어떻게 거듭난지 모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며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그렇다고... 성령이 바람처럼 와서 내 마음을 살려 놓았다. 그 때부터 하나님이 아버지,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성령 보혜사 삼위일체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절로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차원이 다른 이야기 아닙니까? 예수님이 거듭나야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니까 니고데모는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태어나야 됩니까? 완전히 차원이 다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0절로 12절에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차원이 다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화를 해도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대화가 단절되는 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죄를 지은 영혼은 죽으리라. 죄를 짓고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59장 2절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나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려 너희에게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죄를 우리 스스로가 처리하지 못하니까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싱가폴에 있는 제자 콩히 목사는 참으로 능력 있는 젊은이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잘 설교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은혜를 받기 원하는 분인데 법적인 문제에 걸렸습니다. 그가 선교사업을 위해서 미국에 많이 돈을 보내는 것이 자기 개인적으로 사용했다고 고발을 해서 정부에서 그를 조사해서 지금 검찰에 불려가고 있는데 어제 그저께 나에게 편지가 오기를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부탁을 해서 좀 하나님이 도와주시도록 기도를 해 달라고... 왜냐하면 검찰에서 요구한 형은 50년 감옥이에요. 50년 되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인데...

그러니 아무리 재판을 해서 잘해 준다고 해도 50년을 요구한 그 해를 어떻게 10년, 5년으로 낮출 수 있습니까? 그냥 해외로 추방해버리면 우리 한국에서 재출발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는데 여러분 기도할 때 기억하고 기도해 주십시오. 굉장히 능력 있는 청년입니다. 제가 싱가폴에 가서 싱가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집회를 했는데 한 3만명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들것에 누운 환자들이 많이 왔는데 그때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콩히 목사는 이 들 것에 누워있는 사람을 돌보는 당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화장실도 왔다갔다 하게 해주고 기도 받을 때 일어나 앉아서 기도받게 해주고 하는데 사흘 동안 집회하는데 몇 사람 빼놓고는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다 일어났습니다. 거기에 기절초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 거기에서 그가 마음이 깨어져서 예수님을 믿고 주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 말씀을 증거했는데 싱가폴에서 5만 성도를 지금 목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열정적이고 훌륭한 주의 종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가 기도를 해 줘야 되고 하나님 성령께서 같이 계셔서 해를 받지 않을 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자손이 되어서 전부 영적으로 죽어서 버림받은 인생이 되었으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해 주시므로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얻는데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기를 역사상에 그들이 광야를 지나올 때 길이 험해서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다가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뱀에 물려서 독이 올라 죽었습니다.

회개하고 자복하고 모세에게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하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아 그들 가운데 세워 놓고 내가 명하는 대로 그 불뱀을 처다보고 믿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그래서 빨리 모세가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아서 높이 세워 놓고 불뱀에 물려서 죽어가는 사람들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게 하면 팔딱 살아 일어나고 팔딱 살아 일어나고...

이스라엘 역사상 아주 큰 하나님의 은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뱀을 보기만 하면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유해서 니고데모에게 말하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나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함이라. 죄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서 쳐다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뭘 쓸데 없는 소리하냐? 그런 엉터리 같은 말 하느냐? 안 쳐다보면 죽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혔지 않습니까? 우편에 강도가 있고 좌편에 강도가 있는데 어느 강도가 예수님께 기도했습니까? 우편입니까? 좌편입니까? 아무편도 아니지요. 사람들은 우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우편도 아니고 좌편도 아닙니다. 거기에 대한 암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운데 두시고 좌우에 같이 형벌을 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한 강도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니 회개할 시간도 없고 착한 일을 할 시간도 없고 교회 갈 시간도 없고 도무지 생각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주의 나라에 임하시거든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임금으로 인정하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거든 나를 인정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재깍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자기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데 주의 나라 임하거든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까 예수님이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당장 오늘 너는 거기서 죽고 나도 이 몸을 벗어버리고 낙원에 가리라.

그러나 다른 편에 잇는 강도는 웃기는 소리하네? 지도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처지에 누구를 구원한다 말이냐? 안 쳐다봤습니다. 비웃었습니다. 같이 못 박힌 강도가 욕을 했습니다. 이놈아! 너와 나는 정당하게 나무에 못 박힐 짓을 했으니까 억울하지 않지만 이분은 십자가에 못 박힐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두 사람이 똑같이 예수님의 좌우편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을 때 쳐다보고 독에서 해방된 것처럼 한 사람은 쳐다보고 구원을 얻고 다른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내 구주로 바라봤으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구원 받았어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도리인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이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선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믿고 시인하면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낙원에 들어가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말로 다할 수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낙원에 들어가게 된 여러분은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참 슬프고 불쌍합니다.

민수기 21장 9절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모두 살았습니다. 너무 이 세상에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나쁜 놈이니까 이 놈은 교회가도 구원 못 받는다. 천만에요.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믿기만 하면 모두다 구원을 얻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아주 고약한 죄도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것을 쭉 알면서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것은 참을 수가 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분명히 알면서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여러분의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고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막힌 담을 싹 헐어버렸습니다. 무엇이 인간이 만든 담이든지, 원수가 만든 담이든지, 마귀가 만든 담이든지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으로 막아 놓은 것 주님께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쫙 찢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지성소, 하나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올 수 있는 길을 예수님이 보혈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밖에 없네. 예수님의 보혈이 여러분의 길을 환히 열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이 영원이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초행길이지요? 여러분 사는데 초행길이지 여러분 왔다갔다 해봤습니까? 왔다갔다 못해봤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걱정을 하고 불안해 하는데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다. 나는 초행길이 아니라 나는 환히 아는 길이니까 나를 따라오면 거짓이 안 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면 나를 따르라. 우리가 죽음도 초행길이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면 겁나지 않습니다. 환영받는 길로 인생을 살다가 인생을 끝마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휘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 휘장을 다 찢어버린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믿고 달라진 삶의 정체성
그러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이 달라진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떻게 달라지느냐. 똑같은 사람인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옛사람이라고 말하고 믿는 사람은 거듭났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사람하고 옛사람하고 다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은 새로운 것이 된 사람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옛사람인 것입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인 것입니다.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과 대화가 이루어지는 4차원의 사람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으로서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5~7). 믿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사람이고 믿는 사람은 영의 사람인데 영의 사람과 육신의 사람이 대화가 안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고 안 믿는 사람은 육으로 난 사람인 것입니다. 육으로 난 사람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5절로 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러므로 여러분은 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물질적인 3차원의 세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영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되고 여러분은 육신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 사람, 그냥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 그러나 안 믿는 사람은 그냥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그냥 사람인 것입니다. 골리앗과 다윗이 싸울 때 다윗은 하나님이 같이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골리앗은 그냥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진표를 짰는데 골리앗과 다윗이 싸우는 것으로 대진표를 짰으나 그들이 안 보이는 4차원의 세계 하나님이 다윗과 같이 있는 것을 몰랐거든요. 하나님이 골리앗에게 질 턱이 없습니다. 이기는 것은 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은 성령으로 난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4차원 사람과 제3차원 사람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3차원의 사람입니다. 물질적인 세계는 3차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4차원은 눈에 안 보이는 영적인 세계, 성령이 4차원의 세계인데 여러분도 거듭나서 영적인 사람이 되므로 여러분은 4차원의 세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따라서 성령으로 영적인 세계를 통해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4차원의 세계 사람이 되면 그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4차원의 영적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조목사는 항상 4차원만 팔아먹고 산다고... 그런데 4차원의 세계를 모르면 늘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고 4차원의 세계를 잘 이해하면 창조적인 생활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4차원의 영적인 요소는 꼭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는 알았어. 알았어. 한쪽 귀로 들어가면 한쪽 귀로 넘쳐나오도록 될 때까지 제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4. 4차원의 영적요소
4차원의 세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생각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위에 것을 생각하라는 것은 신령한 세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차원에 있는 사람들은 신령한 세계를 인정 안합니다. 천당과 지옥도 인정 안하고 하나님도 인정 안하고 영생도 인정 안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영이 살아났으므로 영이 4차원의 세계에서 보고 듣고 말하고 아는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여러분이 잘 아는 꿈!

로마서 8장 24절로 25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꿈이라는 것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꿈인 것입니다. 꿈은 마음에 화폭에 그려놓고 늘 바라보고 소원하는 것입니다. 꿈은 적은 꿈도 있고 큰 꿈도 있고 모두 다 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가는 방향이 뚜렷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버림받지 않습니다. 나아갈 방향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 요사이 가만히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꿈꾸는 대로 다 이루어주시는 것을 보고 에라 그때 좀 더 큰 꿈을 꿀걸... 잘못했다. 요사이라도 꿈을 좀 크게 꾸어보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왕 꿀 바에야 좀 크게 꿈을 꾸십시오.

성경에 보면 과부가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빚을 많이 졌는데 애를 잡아서 빚을 갚으라고 하니까 그 과부가 엘리사에게 와서 눈물로 통곡을 하며 어떻게 할까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가서 그릇을 많이 빌려서 문을 닫고 그 그릇에 너희 참 기름병에 기름을 갖다 부어라. 찬기름병에 기름이 조금밖에 없는데요? 잔소리하지 말고 기름을 갖다 부어라. 그래서 애들에게 그릇을 빌려오게 해서 쭈욱 줄을 세워놓고 기름을 부었는데 조그마한 기름병에서 기름이 콸콸콸 나옵니다. 나오면 또 옮겨놓고 채우고 또 옮겨놓고 채우고... 또 그릇 가져오너라 하니까 애들이 엄마, 그릇이 없어요. 그러니까 기름이 탁 그쳐버렸습니다.

그릇은 꿈을 담는 수단인데 그릇이 적으면 적게 나오고 그릇이 많으면 많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 과부가 그릇을 좀 더 크게 빌려 왔더라면 기름을 더 많이 수용했을 것인데 기름을 적게 밖에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그릇이 적었습니다. 여러분, 꿈이 그릇입니다. 꿈을 크게 가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그 꿈을 크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인 꿈이 4차원의 영적인 요소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믿음인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이란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 능력으로 하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아무증거 안보이고 귀에 아무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내 앞길 칠흑같이 어두워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의 꿈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꿈이 믿음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뜨겁게 사랑해 주시는 것을 압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놓기까지 사랑했으니까 여러분 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믿을 도리가 없지요. 하나님이 자기 목숨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데 안 믿으면 무엇을 믿겠습니까? 그 다음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지요. 그러니 나를 하나님이 목숨같이 사랑하시고 그 하나님을 믿으면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능력이 계신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언제나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짐을 짊어져 주시겠다고 자원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창조적인 선언인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꿈꾸고 믿은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그 스위치 버튼을 누르는 것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냥 말하는 것이 실감이 안 나지만 창조적인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건강하다. 그러면 그 말이 나가서 건강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물질이 풍부하다. 그 말이 나가서 물질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좌우간 말에 대한 것은 너무 놀라운 일이고 증거가 많아서 몇 시간을 해도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닮은 것 중에 하나는 하나님처럼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숭이도 재잘거리지만 의미 있는 말을 못합니다. 말은 하나님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으로 우리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계, 행복하다. 기쁘다. 즐겁다. 평안하다. 그렇게 말하면 그 말씀이 그런 세계를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나는 슬프다. 괴롭다. 고통스럽다. 불행하다. 그렇게 말하면 말이 그대로 와서 부정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선언이 말을 통해서 나타나므로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적인 풍랑도 말씀으로 다스렸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매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진 것입니다. 말씀이 그와 같은 힘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통해서 환경을 이처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4차원은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씀으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라고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주인 노릇하기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 왕이 되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의 말로써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됨을 잘 이해하면 그냥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같이하는 하나님의 사람, 4차원의 영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을 이해하면 우리의 신앙생활 중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2015. 5. 3. 주일설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