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2015년 4월 26일
본문: 고린도전서 1:4-17
설교: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담임)
제목: 공동체로 산다는 것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고린도전서 1장 4-17절]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감사하는 이유!”
고린도 교회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두 번째 이야기는 ‘공동체’에 관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렇게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의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는 말씀이 없다면 아마도 커다란 절망감이 사도 바울에게 찾아왔을 것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세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 하노니”
‘아름다운 관계는 감사를 낳는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린도의 교인들은 가장 문제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이제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수없이 많은 문제, 더러움 치사한 것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도 바울을 참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사도 바울을 닮고 싶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사도 바울의 솔직함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보다는 그 허물을 드러내고 부족함 가운데 자신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말입니다.
지난주에 그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하여 강조한 것을 보았습니다. 강조한 것만큼이나 그것이 자신에게 부족한 면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주님께 직접 제자로 불림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제자들을 핍박하러 다녔던 그에게 이러한 과거는 커다란 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자신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족함도 드러냅니다. 그렇게 부족한데도 자신을 인정해주고 따라오는 교인들만 봐도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한 것은 성도로 불림을 받았지만, 성도 같지 못했던 그 모습을 그대로 품어주시고 오늘도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지요.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십니까?
그런데 우리 교인들을 보면 그냥 감사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그래서 눈물이 나요. 때로는 좋아서 눈물이 나고, 때로는 슬퍼서 눈물이 나고, 때로는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서 눈물이 나고 말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말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는 모습을 보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성도라 부르심을 받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니” 감사한 마음이 든 것이지요. 그럼 이 감사와 앞으로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어떻게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요?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린도 교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라는 확신이 아니었을까요? 8절 말씀을 보세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표현할 정도로 부끄러웠던 사도 바울이 그런 은혜를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도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열정의 결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 열정은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긍휼함도 용서하는 마음도, 하나님의 사랑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열정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난 후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과 ‘긍휼’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을 보아도 사랑하고 긍휼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자신을 용서해 주셨잖아요. 받아 주셨잖아요.
고린도 교인들의 부족함과 단점, 싸움 속에서도, 그래도 하나님께 불림을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이지요.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이 감사에서만 끝난 것은 아니지요. 그들의 삶이 변하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지요. 아니 분명히 변화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캐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Guardian](가디언)이라는 영화입니다. U.S Coast Guard로 일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해변에서 조난한 사람들을 구조하는 ‘랜달’이라는 사람이 구조학교 교관으로 부임하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랜달은 ‘제이크’라는 훈련생을 조련하게 됩니다. 구조분야에서 랜달은 전설적인 사람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해줬는지 모릅니다.
어느 날 훈련생 제이크가 묻습니다.
“지금까지 몇 명이나 구했습니까?”
“22명”
실망한 제이크가 다시 묻습니다.
“200명이 아니고 22명이라고요?”
그러자 랜달이 말합니다.
“아니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이 22명이라네, 나는 살린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리지 못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지.”
랜달은 사람을 구해낼 때, 어떤 누구의 생명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줄에 매달려 간신히 끌려가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절대로 당신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소망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습니다. 그 후에 그 바다에는 이런 전설이 흘러다닙니다.
“바닷속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네, 사람의 생명을 낚는 어부라네.”
그 영화에는 목숨을 건 한 사람 때문에 생명에 빚진 많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끝까지 손을 놓지 않았던 한 사람 때문에 살아난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자신의 몸을 던져 생명을 살린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바라보며 끝까지 소망을 품고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고린도 교인을 책망할 수밖에 없는 많은 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싸움을 어떻게 해서든지 말려야 하는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의 감정을 잘 억누르고 고린도 교인에게 편지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를 통해 그 마음의 많은 격정과 분노가 걸러졌을 것입니다.
감사의 눈으로 사도 바울의 눈에 들어오게 된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수없이 지저분하고 추잡한 문제들이 있는데도 그들을 지켜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편지는 비난에 불과할 것입니다. 비난은 사람을 죽이지만, 감사는 살리는 일을 합니다. 소망 가운데 미리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기대를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분의 신실하심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6절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싸움을 해도 예수 안에서 싸우고 있구나!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구나! 너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예수를 믿는 믿음 위에 서 있구나!’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있음이 소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하나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강력하게 고린도 교회에 권면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권면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것입니다.
사역자에게 가장 큰 권위가 무엇일까요? 리더들에게 종종 찾아오는 유혹이 무엇인가요? 주님의 이름으로가 아닌, ‘나’의 권위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싸움은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려는 교만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 가운데는 사도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인 자격으로 이야기한다면 문제의 해결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갈라져 있는 이들에게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처음으로 지적한 부분이 바로 교회의 분열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으므로 온전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교회인 것은 지체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분열의 시작은 끝까지 자기 것을 지키겠다는 사람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참 흥미롭죠. 나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것을 지키겠다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 때문에 분쟁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참 쉬운 일인데, 한 사람만 포기하고 한 사람만 양보하면 되는데 그게 되지 않습니다. 일단 분쟁이 시작되면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가 중요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는 사라져 버립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의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생긴 일임에도 이제 세상 법정으로 이 문제를 가져가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까지 많은 사람의 가슴에 멍이 들고 상처를 입습니다. 예배시간을 달리해서 신실하게 예배를 드립니다. 맘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로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승리했다고 합시다. 그 승리를 하나님도 기뻐하실까요?
이 교회의 싸움을 보고 있는 사도 바울의 아픈 권면이 들리시나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절)
사도 바울의 마음이 아픈 것은 교회가 분열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주 쉽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분열을 부추기는 것이 누구일까요?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이 말은 우리가 불의한 것을 눈감아 주라거나, 잘못된 것에 대하여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의 평안함을 위해 목회자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일방적으로 누가 참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공동체라면 일방적인 참음과 인내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 교회의 구성원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답이 없는 답답한 해결책일 것 같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 전가에 대한 차원이 아니라, 내가 한마음을 품기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노력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보았던 고린도교회 분열의 문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머리로 삼고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 12절을 보세요.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사도 바울이 문제를 지적하는 요점을 보세요.
고린도교회에는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속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사람들이 왜 사도 바울을 주장하는가 했더니 ‘세례’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례를 사도 바울에게 받았으니 나는 사도 바울의 사람이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례를 베풀었다는 행위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한 것이지, 그것으로 인하여 성도들에게 구원이 온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지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드러날 때 교회입니다. 어떤 사역자도 그리스도의 능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자신의 신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왜 그럴까요? 사실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자만심’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 가장 무서운 것이 자신의 자만심이 드러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야겠습니다.
먼저는 자신이 ‘아볼로’에게 속한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린도교회의 지도자가 아볼로였으니까 자신들이 실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리고 고린도에는 ‘게바’에게 속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하루에 3천 명, 5천 명씩 세례를 베풀 때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초대 교회 부흥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겠습니까?
또한, 이들 중에는 ‘바울파’가 있었습니다. 바울에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우던 1년 6개월 동안 직접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고린도 교회의 ‘원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은 ‘예수파’도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이었겠지요. 얼마나 큰 권위였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권위, 누구에게 속하였다는 우월감이 교회의 ‘하나 됨’을 헤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가운데서 사도 바울이 감사하는 것이 있지요. 본문 14~16절을 보십시오.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아마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머무는 동안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더라면, 자신에게 속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을 터인데, 다행히도 세례를 많이 주지 않아 ‘바울파’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음에 대하여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이지만 한 번도 자신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일도 없고, 이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가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파벌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를 생각하고 목회를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 문제는 전임 목사와 후임 목사의 갈등, 먼저 예수를 믿은 사람과 늦게 교회를 나온 사람들의 갈등의 문제가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우리 교회에 장로님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을 지나며 만나 교회는 참 좋아진 모범적인 모습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만나 교회에서 장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매번 반복되는 현상인데, 뽑을 때마다 새로 된 분들이 미흡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가 장로가 된 다음부터는 그 기득권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에 인색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장로뿐인가요? 목사가 되는데도 감리교회에서는 3년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보고 자격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심사를 하는 목사님들이 어깃장을 놓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내가 될 때의 부족했음과 받았던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이지요.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 이름의 권위가 사라지고 내 권위와 기득권이 주장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에게 도전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내가 누구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다툼이 바로 그런 것이고, 현재 한국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감독이 되기 위해, 총회장이 되기 위해 예수 이름의 권위와 거룩성이 실추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도 무슨 정치 라인이 존재하기 시작하지요. 이것이 바로 경계해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목사님이 여럿이 있는데, 담임목사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도 아니고, 담임목사의 이름으로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아닌데, 특별한 권세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목사도, 그런 교인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고 성례를 베푸는 목회자에게 분명한 신앙의 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사실 교회의 모든 사역은 ‘틀림’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주장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교회를 다니지만, 다른 사역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지만, 당신과 틀린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저 자신도, 우리 만나 교회도 많이 반성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이름과 영광을 드러내기보다 우리 교회가 드러나려고 애쓰지 않았나요?
저희 교회에서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본인이 신앙의 고백으로 꼭 받아야겠다는 경우는 다시 베풀지만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당의 신부님이 세례를 베풀 때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른 점이 많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권세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직도 성당에서는 개신교회에서 베푼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세례를 주려고 하는데, 교회에서만 가톨릭의 세례를 인정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세례가 유효한 것은 어디에서 받았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우리의 이름을 포기하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지고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보 같은 것이 옳은 일이라면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이어야 할까요?

교회의 역사를 보면 참 작은 일로 인해 갈라졌던 것을 경험합니다.
16세기 네덜란드에는 소위 재세례파라 불리는 ‘메노나이트’라는 파가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 했던 신앙 운동으로 크게 부흥했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 퍼져있습니다. 그런데 17세기와 18세기에 이르면서 분열이 생기고 ‘아미쉬’라는 교파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 분열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더 깊은 교리적 내용이 있지만, 참 우스운 곳에서 분열이 시작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옷을 입을 때 옷고름을 매듯이 끈으로 다 묶었는데 당시에 단추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단추를 다니까 옷이 번쩍거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사치하다고 생각했기에, ‘단추 파’와 ‘옷고름 파’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그리스도교파에서는 ‘악기파’와 ‘무악기파’로 나뉜 것을 아십니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악기를 사용해도 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갈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분열은 장로교에서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다는 우월감을 가진 교단과 그렇지 못한 교단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감리교에서는 법을 지키는 ‘호헌파’와 ‘정동파’가 분리되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따지고 보면 다 자신들이 의롭고 잘났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감격과 감사보다는 자신이 누구보다 신앙을 잘 지켰으니 낫다는 우월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모두 더 잘하려고 해서 싸우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유기성 목사님이 쓴[우리 서로 사랑하자]라는 책에 감자탕 교회 조현삼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자탕 교회로 잘 알려진 서울 광염교회의 조현삼 목사님이 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교회 초창기 때였는데, 한번은 교인들이 그렇게 싸우더랍니다. 왜 싸우나 싶어서 물어봤더니 잘해 보려고 싸운다고 하더랍니다.
“목사님,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게 다 잘해 보려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니까 정말 잘못되자고 싸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잘하지 맙시다. 잘하려고 싸울 거면 싸우지 말고 그냥 보통만 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습니다.”
그러자 지금은 그 교회가 부흥되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습니다. 잘하자고 싸우는 것은 정말 미련한 일입니다. 싸움 자체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아직도 마음에 미움이 막 일어나서 힘들어하는 분 “정말 미운데 어떠하나”하는 분들을 위해 요한 사도가 이렇게 썼습니다. 요한 일서 2장 12절, “자녀 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분열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Radical 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오늘 본문 중의 일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는 법을 익히고, 공동체로 살아가기를 힘쓰십시오. … 나는 바울 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 나는 베드로의 사람이다. 나는 메시아 그룹에 속해있다 고 말하면서 돌아다닌다고 하더군요. …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저마다 나누어 가지도록 조각조각 갈라지기라도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의 추종자들을 모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친히 이루신 일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고, 그분의 추종자를 모으라고 나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 듯합니다. 주님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만드는 사람들 말입니다. 아니,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을 전하는 사람들을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들 말입니다.
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추종하거나 단체를 추종하려는 경향이 있을까요? 그 누군가를 세우신 목적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어떤 단체를 세우셨을 때는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고 만들어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섬기려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향이 숨어 있는 듯합니다. 아니 조금은 쉬운 것을 찾아가려는 시도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씨름하여 답을 얻기보다는 쉬운 답을 알려주는 사람을 추종하려는 그런 잘못된 경향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면 ‘이단’이 되거나 ‘사이비 교주’가 되는 듯합니다. 교단이나 교파가 신성시되고, 사람이 신격화될 때, 타락하는 것이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죠.

그렇게 고린도의 교인들이 쉬운 길을 찾아가려고 사람들을 추종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추종하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무조건 추종하는 사람을 변호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교단’, ‘내 교회’에 대한 조건 없는 추종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저는 감리교회 목사입니다. 언젠가 ‘위대한 감리교회’라는 표어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감리교회는 뒤로 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섬기는 교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그것이 본질을 앞서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입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세요!
어떤 교단이 이단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것은 참 힘들고, 어쩌면 하나님만이 아실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교회와 교단이라면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옳은 것은 놓치지 않도록 하되,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우리가 교회를 주님보다 앞세우고 있지 않은지, 교단을 주님보다 중요하다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미국에서는 아버지들의 회개 운동인 ‘promise keepers’가 있었습니다. 당시 워싱턴에 백만이 넘는 남자들이 모였습니다. 당시 모인 사람들에게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들의 교파가 무엇입니까?”
저마다 교파를 이야기하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 때문에 모였습니까?”
그러자 그 많은 사람의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습니다.
“Jesus Christ!”
너무나 분명한 목소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