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역사신학/성령운동연구가).

웨슬리안과 은사주의자들과의 대화

1950년대 초에 오순절 운동의 지도자들과 개신교 주류 교단들의 대표자들 간에 발전적인 대화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합 회의들을 통해서 일치하게 된 것은, 은사 체험은 그 모든 현상에 있어서 합당한(legitimate)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긍정적인 대화는 60년대와 70년대의 은사적 갱신의 발전기를 거치면서 더욱 진전되어갔다. 캐리(George Carey)는 말하기를, “그것(은사운동)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에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복음주의자들과, 성례전들에 강조를 두고 있는 로마가톨릭 신자들을 하나로 묶어온, 역사상 유일한 부흥이다. 어쨌든 그 동안 은사 체험은 신학적으로 공감대를 별로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일치시켜 왔다.”(A Tale of Two Churches, 17)고 했다.

그렇다면 웨슬리안-성결 전통은 이 같은 교회의 일치적인 소명에 대해서 얼마나 충실해 왔는가?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안-성결 그룹의 사람들은 데이톤(Donald Dayton)의 업적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19세기와 20세기 기독교의 방대한 영어권 자료들을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1987년 Wesleyan Theological Journal의 논문 발표를 통해 오늘의 보편적 교회의 적용을 위한 기초를 수축하는 일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비록 처음의 일치 분위기는 지극히 형식적인 수준이었지만, 웨슬리안-성결 그룹과 오순절 그룹 간 획기적이고도 실제적인 유대는 사이난(Vinson Synan)과 데이톤의 괄목할 만한 역할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웨슬리 당시의 오순절적 성령에 관한 용어 사용에 대한 연구라든가 19세기 성결론 논쟁 등에 관한 내용을 1973년부터 1980년 사이에 Wesleyan Theological Journal에서 광범위하게 다뤘다.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뿌리」(The Theological Roots of Pentecostalism)가 출간된 1987년에 데이톤은 오순절연구협회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애즈베리(Asbury)신학교에서 그 협회를 열기로 주선했으며, 그 협회에서는 웨슬리안-성결 신학자들이 강단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역시 포함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오순절연구학회(Society of Pentecostal Studies)에 공동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성결 그룹과 오순절 그룹의 연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밝히고, 복음적 기독교의 특질에 대해서도 선명한 제시를 해주었다.

웨슬리와 프레처-일치의 모형

웨슬리안-성결 그룹과 은사주의운동 사이의 점증되는 일치의 국면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일치의 모형이 성결 전통 안에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웨슬리와 프레처(John Fletcher) 간의 관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레처도 역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전형적인 감리교 설교자였지만,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히 세례 받는 일에 있었다. 그가 배운 어떤 책의 내용보다도 성령세례는 목회 사역을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종종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다른 방으로 불러 모아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기도해 주곤 했다.

결국 프레처와 또 그와 같이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벤슨(Joseph Benson)의 노선이 웨슬리에게 하나의 큰 골칫거리로서 다가왔다. 벤슨은 자신의 ‘성령세례’에 대한 입장을 담은 논문을 웨슬리에게 보냈고, 웨슬리는 벤슨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도 역시 성령의 증거를 지닌다고 확고히 답변하였다. 그러자 벤슨과 프레처는 함께 연대하여 웨슬리의 입장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웨슬리가 ‘성령을 받다’(receive the Spirit)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종종 ‘성령의 증거를 받는 것’(receiving the witness of the Spirit)을 의미했고, 또한 ‘성결케 하는 은혜’로서의 의미도 포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후자의 의미가 벤슨과 프레처가 취했던 노선이고, 이 용어들의 서로 다른 시각의 차이가 웨슬리와 프레처 사이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주원인이었다. 그러나 의견이 교환되자 결국 둘 사이의 오해가 풀리게 되었고, 이에 대한 모든 논쟁은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1775년에 웨슬리가 자신의 친구에게 쓴 글에서 프레처의 노선을 흔쾌히 추천하며 동조하는 내용이 보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왕국 그 이상이 아니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웨슬리와 벤슨 그리고 프레처는 완전한 동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프레처의 오순절적 성령세례론은 감리교도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이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후 ‘교회에 대해’(On the Church, 1785)라는 설교에서 웨슬리는 물세례와 성령세례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제시하였다. 모든 의롭다함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낮은 의미에서’ 성령을 받은 자들이며, 성령세례의 체험은 온전히 성화된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풍성한 용어 사용을 하였으며,  이런 다양한 용어들을 통하여 이 체험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꾀하였다.

1935년에 셀(George Craft Cell)이 저술한 「존 웨슬리의 재발견」(The Rediscovery of John Wesley)은 웨슬리에 대한 많은 연구들의 결과를 발표한 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셀은 웨슬리 생애의 마지막 20년간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말로 웨슬리에게 있어서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다고 본다. 19세기말까지의 이 시기는 감리교 설교자들에 의해 웨슬리가 이해되고 설교되던 때였고, 또한 감리교도들이 <알미니안 잡지>(Arminian Magazine)를 통해 웨슬리를 배우던 때였고, 그런가 하면 프레처가 웨슬리의 <율법무용론을 체크함>(Checks to Antinomianism)에 뉘앙스(nuance)를 주기 위해 조력하던 때였다. 이 시기야말로 ‘오순절적 웨슬리’(Pentecostal Wesley)의 때였다.

접촉점

복음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이처럼 웨슬리는 온전한 성화와 오순절적 체험을 연결시키는 프레처의 입장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승인해 주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웨슬리는 프레처의 가르침이야말로 감리교 교리의 유일한 다른 원천이라고 회의의 의사록(minutes)에 기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웨슬리는 프레처의 입장이 비록 자신이 주장해 온 신학체계와 이질성을 보이는 점에 한동안 고민했었으나, 프레처의 주장이 자신의 주장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복음적 경험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합치한 것이다.

웨슬리안신학협회(WTS)에서 1970년대에 이러한 일치성을 부각시키기까지는 아무도 웨슬리와 프레처 사이의 조화의 의미를 발견해 내지 못했었다. 현대의 복음주의 내에도 동일한 복음적 경험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이견이 존재한다는 점은 현대의 부흥운동에 웨슬리와 프레처와의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