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두레마을의 공식적인 이름은 ‘땅과 사람을 살리는 공동체 마을, 두레마을’이다. 내가 이 이름으로 공동체 마을을 시작한 내력이 이러하다.

1974-75년 내가 옥살이를 할 때다. 나 같은 정치범들은 주로 독방에 수감되어 있었으나, 가끔 일반수들이 있는 방에 합방시키는 때도 있었다. 한번은 일반수 8명이 있는 방으로 합방이 되었다. 나까지 9명이 있는 방인데 겨우 2평이 못 되는 좁은 방이었다. 낮 동안 앉아 있을 때는 견딜만 하였으나, 밤에 취침할 때가 문제였다. 9명이 도저히 바로 누울 수 없기에 한쪽 어깨만 붙이고 모로 누워 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는 잠을 ‘칼잠 잔다’ 하였다.

그렇게 칼잠을 자는 처지에서도 방 식구끼리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특히 그런 방에서도 빈부 차이가 심하여 부자 죄수는 불고기 사식을 들여다 먹고, 가난한 죄수들은 고기 냄새만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가 치밀어 서로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다. 참다 못한 나는 네 것 내 것 없이 현금도 치약도 사식도 모두 합하여 공동체로 살아보자고 제안하였다.

나의 제안에 양쪽이 모두 반발하였다. 있는 측에서는 “당신 빨갱이 사상 아냐?” 하고 반발하고, 없는 측에서는 “예수쟁이들은 말만 하는 거여. 그럼 당신 것부터 다 털어놔 봐” 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나는 좁은 방에서 서로 으르렁 거리며 다투고 살아가는 분위기에 참을 수 없어서 기도드렸다.

“하나님 이들이 서로 나누고 함께 가지며 서로 위로하고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때 마침 19세 된 청년이 절도범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발에 걸린 동상이 악화되어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처지가 측은하여 아침 저녁으로 발 마사지를 해 주며 기도하여 주었다. 그러기를 열흘 정도 계속하였더니 상처가 낫기 시작하였다.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 본 사람들이 감동이 되었던지, 너 것 내 것 없이 공동체로 살아보자고 하게 되었다. 그 날부터 방 분위기가 달라졌다. 소유 구조가 달라지면 인심이 달라진다. 늘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 위로해 주고, 이젠 범죄생활 청산하고 새롭게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하며 공동체의 힘을 실감케 되었다. 그리고 다짐하기를 언젠가 징역살이가 풀리면, 공동체 교회를 세워 공동체 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석방되기 전에 공동체 마을 이름을 ‘두레마을’로 작명까지 하게 되었다.

두레마을이란 이름은 조상들이 세웠던 마을 공동체의 이름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교회가 시작되자 너 것 내 것 없이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성령공동체, 생활공동체가 출현하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기를 조상들이 살았던 두레전통과 성경의 성령공동체를 합하면 어떤 삶의 모습이 될까를 생각한 끝에 두레마을 공동체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면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추진하는 체질이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남양만에서 두레마을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이다. 두레마을 공동체를 시작한지 30년 넘는 세월이 지났다. 두레마을은 그간 엎치락뒤치락 온갖 사연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내 나이도 70 중반에 들었기에 시간이 별로 없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제대로 된 공동체 마을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야구에 비유하여 표현하자면 9회 말에 멋있는 안타를 날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