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본지 편집고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님이 3월 29일 강변교회에서 전할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본지는 김명혁 목사님의 동의를 얻어 이를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제가 강변교회에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1년에 두 번씩 와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성도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해주시고 후원해 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여러분들을 사랑하며 매일 위해서 기도합니다. 제가 지난 10여 년 이상 매일 중얼거리는 두 가지 고백과 한 가지 소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년 3월 16일 주일 명성교회에 가서 설교하면서 고백한 고백과 소원입니다. 첫째 고백은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라는 고백입니다. 둘째 고백은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셋째로 제가 지난 10여 년 이상 하루에도 백여 번씩 중얼거리는 나의 소원과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저는 자격이 아무것도 없는 죄인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라는 소원과 기도입니다.

제가 지난 7년 동안 부활주일마다 강변교회에 와서 설교를 했는데 오늘은 고난주일에 와서 설교를 합니다. 십자가와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2015년 3월 29일 고난주일에 강변교회에 와서 “십자가와 고난의 복음”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할 때인 2001년 1월부터 “십자가와 나” 라는 주제를 가지고 주일 아침마다 15번 계속해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10번을 하고 100번을 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 세계 최고의 설교자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나는 지난 26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강단에서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충분히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할 것이 없다고 어리석게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이 마귀가 만들어낸 생각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조금 시작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십자가에 대한 영광스러운 메시지에는 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언제나 이전에 아무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과 참신한 것과 황홀한 것과 감동적인 것과 끌어올리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고백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을 영어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There is no end to this glorious message of the cross, for there is always something new and fresh and entrancing and moving and uplifting that one has never seen before.”(The Cross, 서문)

그러면 이제부터 “십자가와 고난의 복음”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석 주 전에 원주 세인교회에 가서 “십자가와 고난의 복음”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같은 제목의 설교이지만 지난 몇 주 동안 설교 원고를 열 번 이상 읽으면서 설교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고 또 수정 보완했습니다. 어제 토요일 아침에도 수정보완했습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고 “고난”은 복음의 방식입니다. “십자가”를 무시하는 복음은 가짜 복음이고 “고난”을 무시하는 삶은 복음적인 삶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성탄의 새벽에 천사들이 밖에서 밤에 양떼를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즉 큰 기쁨의 “복음”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구유에 누인 아기로 세상에 오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구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헬라의 지식도 로마의 웅변술도 다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만을 알고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선언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 다음 “복음”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은 “고난”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반드시 “고난”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영광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고 “가난”과 “고난”을 통해서 나타나고 “멸시”와 “천대”를 통해서 나타나고 “핍박”과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또 지적합니다. 복음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가난”과 “고난”의 길로 걸어가셨고 “멸시”와 “천대”의 길로 걸어가셨고 “핍박”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가난”과 “고난”의 길로 “멸시”와 “천대”의 길로 “핍박”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33년 동안의 예수님의 삶에는 “가난”과 “고난”이 따랐고 “멸시”와 “천대”가 따랐고 “핍박”과 “죽음”이 따랐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8:20).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고난”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 예수님께서는 조금 후에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다시 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마20:18,19).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예수님께서는 만찬석상에서 자기가 조만간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실 것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마태복음 27장은 “고난”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마27:1,2).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27:27-30).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멸시”와 “천대”와 “희롱”과 “침 뱉음”과 “머리 침”을 받는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였고 복음의 방식은 “가난”과 “고난”이었고 “멸시”와 “천대”였고 “핍박”과 “죽음”이었습니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는 오래 전에 메시야가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 않고 “멸시”와 “싫어 버림”과 “간고”와 “질고”와 “슬픔”과 “아픔”과 “징벌”과 “고난”과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과 “죽임”을 당하시는 13가지 “고난”과 “고통”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실 것을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3-5).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53:12).

왜 구약과 신약의 성경이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을 이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또 묘사했습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님은 죄와 허물이 너무 많은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으시면서 당한 “고난”과 “고통”과 “저주”와 “죽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라고 이렇게 자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과 “저주”와 “죽음”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의 운명이 바뀌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무시하면서 멋진 가르침만을 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전부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좋은 소식인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며 중심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고상한 윤리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고난과 고통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며 중심입니다.”(The Cross, pp.25,26). 로이드 존스 박사님은 그의 저서 마지막 부분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고 기원이고 중심입니다. 십자가를 떠나서 주어지는 축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입니다. 십자가를 떠나서는 어떤 축복도 불가능합니다.”(The Cross, p.175).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의 운명이 바뀌어집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기만 하다가 저주받을 운명이 축복받은 운명으로 바뀌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던 로마 군인들이었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가던 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모순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까? 십자가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런 모순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금 이 시간 십자가를 한 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한 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나타내 보여주신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와서 자기를 잡으려고 하는 자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들을 향해서 칼을 뽑으려는 베드로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2-54). 그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공의’와는 어긋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진리’와는 어긋나는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너무 이상하고 너무너무 놀라운 바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종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조롱까지 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약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루신 일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죄악의 세력들을 처벌하신 공의로운 심판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악독한 죄인들에게 지옥의 심판대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는 대신 오히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지니고 저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로마 군인들은 너무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바라보던 로마 군인들의 대장인 백부장은 너무너무 놀랐을 것입니다. 결국 백부장은 자기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의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23:47). 악독한 죄인들인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에게 지옥의 심판대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성부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악독한 죄인들이 자기들 대신 아니 자기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주님의 고난과 고통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놀라운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는 바라보기만 해도 운명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운명이 변화된 백부장은 평생 어디를 가든지 울면서 이렇게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그 분은 정말 의인이었습니다.” “그 분은 정말 의인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평생 죄만 짓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악독한 강도 한 사람에게도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그 강도는 신앙 고백을 제대로 한 일이 없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일도 물론 없었고 착한 일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악독한 강도에게도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강도가 한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본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를 한 것뿐이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23:42). 그런데 악독한 강도에게 놀라운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시면서 이룩하신 일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악독한 죄인들에게 그리고 평생 죄만 짓던 악독한 강도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기 두 종류의 죄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악독한 죄인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수도 셀 수 없는 수 많은 종류의 악독한 죄인들에게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벤 박춘권에게도, 불교와 선도의 길을 달려가던 길선주 도사에게도, 선교사와 교회당을 때려 부신 이기풍 깡패에게도 정욕과 위선과 거짓이 가득한 저에게도 놀라운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모순되는 듯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흘리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과 고통과 심판과 저주를 몸소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은 심판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악독한 우리들 모두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가져다 주신 놀라운 길이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할 일은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알입니다. 우리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만 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138).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도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은 주님의 제자들도 세상의 길로 평안의 길로 걸어가지 말고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십자가와 고난”의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잃는 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사람들과 자기가 의지하던 것들과 자기가 귀중히 여기던 목숨까지 버리면서 주님만 따르는 순교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은 주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길인데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결국 주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기뻐했습니다. “저희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0,41)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말로는 십자가를 예찬하면서도 실제로는 싫어하며 거부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난”과 “멸시”를 받기 보다는 ‘평안’과 ‘높임’을 받기를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분노’와 ‘증오’와 ‘저주’의 마음을 품고 쏟아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면서 감성적으로는 십자가를 예찬하고, 유창하게 설교와 강의를 하면서 머리로는 십자가를 예찬하면서도 실제로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기를 싫어하며 피해서 가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가난”과 “고난”도 “멸시”와 “천대”도 “핍박”과 “죽음”도 받아드리기를 싫어하며 피하려고 합니다. 사실 주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처음에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싫어하며 거부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십자가와 고난”의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56). 그러나 십자가를 버리지도 떠나지고 않고 마지막까지 십자가 아래 머물면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았던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은 십자가의 은혜를 온 몸으로 흠뻑 받고 또 받은 축복 받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울면서 사랑을 쏟으면서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배신의 길을 거듭해서 걸어가던 베드로와 여섯 제자들도 나중에는 디베랴 바다 가로 자기들을 찾아오신 사랑의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일곱 마디 사랑의 말씀들을 들으면서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또 회개하게 되었고 결국 “가난”과 “고난”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나중에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면서 맨날 울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료와 후배들에게 이런 권면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4:12-14,16). “십자가와 고난”의 길은 우리들이 피해야 할 길이 아니고 기뻐하고 사모하면서 달여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 중에서 네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제일 먼저 걸어간 사람이 스데반 집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 “고난”과 “핍박”과 “멸시”와 “천대”와 “죽음”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받으며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의 가슴과 입에서는 자기를 향해서 이를 갈며 돌을 던지는 악독한 사람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와 ‘저주’가 쏟아져 나오는 대신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증언만을 쏟아 내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우리 죄인들이 부족하지만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갈 때 하늘이 열리게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 보이게 되고,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이게 되고, 성령님께서 임재하심을 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와 ‘증오’와 ‘저주’를 쏟아내는 대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쏟아내면서 저들을 위한 사죄의 기도까지 드렸습니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서 나타내 보이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나타내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간절한 호소의 기도를 귀담아 들으시고 그대로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면서 사죄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핍박자 사울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간절한 사죄의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박윤선 목사님께서 올바로 지적하셨습니다. 또한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일로 안디옥에 이방인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세계선교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은 참으로 놀라운 길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과 구원이 임하는 축복의 길이 되고 자기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광의 길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그 다음에 걸어간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다음 세상의 유익하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에 못 박히신 것만을 알고 전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인 가문이나 학문이나 종교적인 열심 등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며 버린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사도 바울은 또한 자기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세상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1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그리고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6:14). 사도 바울은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면서 수 많은 “수고”와 “위험”을 당했다고 길게 나열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며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결국 사도 바울은 예수 죽인 것을 자기 몸에 짊어지고 다니게 되었고 예수의 흔적을 자기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한다고 고백했습니다(고후12:1).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기쁨으로 자기 몸에 채우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미친 사람이었고 고난을 기뻐하고 사모하면서 추구한 “고행주의자” 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주님을 닮기 위해서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고 사모하면서 추구했던 성 프랜시스와 중세 수도원주의를 부정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지만 사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고난”과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고 기뻐하면서 사모했던 “고행주의의 원조” 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철두철미 자기 몸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간 “십자가와 고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간 “십자가와 고난”의 길 때문에 로마 시대에 살던 수 많은 악독한 죄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간 “십자가와 고난”의 길 때문에 성 어거스틴도 성 프랜시스도 칼빈도 길선주 도사도 이기풍 깡패도 회개하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도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귀중하게 여기고 사모하면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갈 수가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 중에서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하여 목회하시다가 순교하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 참배를 선봉에 서서 반대하다가 1938년 2월 경찰에 1차 검속되었다가 27일만에 석방되었고, 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대구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가 석방되었으며, 1939년 8월 3차 검속되었다가 9개월 후에 석방되었고, 1940년 9월 다시 4차 검속되어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1938년 8월 2차 검속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아침 평양 산정현교회로 달려가서 교회당에 엎드리어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한 다음 마5:11-12과 롬 8:18, 31-39을 봉독한 후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종목의 기도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2)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5)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고백한 기도와 같은 설교에는 순교적인 각오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충성과 헌신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고 백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살고 천 년 살면 무엇합니까?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하여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 각오가 있을 뿐이올시다…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아! 내 주여!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아멘.” 주기철 목사님은 이 설교를 하시기 전에 교회당에 엎드리어 눈물을 쏟으면서 기도하시면서 하늘 나라에 가서도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하시는 동안 주기철 목사님의 음성은 울음으로 떨렸고 교회당에 가득히 모인 교우들은 모두 흐느껴 울었다고 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940년 9월 4차 검속되어 평양 경찰서와 형무소에서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며 온갖 고문을 당하시다가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를 일기로 순교의 제물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너무너무 귀중한 한국교회의 목자였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죄가 너무 많은 나를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심부름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 소리와 저의 아버지의 기도 소리와 이성봉 목사님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기 때문은 아닐까?

그 다음 주기철 목사님의 수제자였던 손양원 목사님께서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이야기를 간단하게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릴 때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주님께 대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가 나중에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계2:10 말씀을 붙잡고 감옥에 붙잡혀 가서 온갖 고초를 당했으며 마지막에는 스스로 총살을 당하시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선생님으로 삼으면서 사셨고 주님을 위해서 “죽기를” 소원하면서 사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순교의 길을 걸어가시기 전에는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자기의 부모나 형제나 처자보다 더 사랑하려고 하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 아들로 삼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고 자기를 총살한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시다가 숨을 거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시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손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 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총살한 공산당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하늘 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 닮은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다가 주님 닮은 “가난”과 “고난”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과 “죽음”의 길인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저는 앞으로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를 드리고 또 드리고 또 드릴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고난”의 길보다는 세속화와 인간화의 길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보다는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전에는 무릎을 꿇고 울면서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려고 애를 썼는데 지금은 시끄러운 음악과 각종 프로그램으로 성령을 지배하려고 대든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적하시곤 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피 소리를 중계하는 중계소인데 지금은 사람들의 소리를 많이 중계하고 있다고 지적하시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십자가와 고난의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할 자격이 전혀 없는 죄와 허물이 너무 많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신 스데반 집사님과 사도 바울과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못난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와 고난의 길”로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지난 십여 년 이상 하루에도 백여 번씩 중얼거리는 "나의 소원과 기도"의 내용을 읽어드림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주님의 피로 도말시켜 주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들과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시고 찾아가서 어루만지시며 돌아보신 것처럼, 나도 작은 교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계속해서 펴게 하시고 그리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펴게 하시옵소서! 나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사도 바울과 주님의 제자들을 본받아서 그리고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본받아서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특히 고통 당하는 북한 동포들과 모슬렘 형제들을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게 하시옵소서! 미움과 분노와 증오가 있는 곳에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심고 분열과 갈등과 대결이 있는 곳에 화해와 일치와 평화를 심는 작은 거름과 씨앗이 되게 하시옵소서!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를 하기 전에 주님께서 지니셨던 긍휼의 눈물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품으셨던 사랑의 심장을 지니게 하시고 주님이 지니셨던 죽음의 흔적을 지니게 하시옵소서! 죄인 중의 괴수가 주님께서 흘리신 대속의 피와 순교자들이 흘린 충성의 피를 의지하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인자와 사랑을 의지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한국교회와 한국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북한동포들과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