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교수(기독문학 작가, 영문학 박사, 영남신대 외래교수).

크레타 출신이지만 한동안 다른 나라들을 떠돌며 살아온 ‘나’는 고국으로 돌아가 무엇인가 안정적인 수입을 거둘 일을 벌이면서 책을 읽으며 사는 삶을 꿈꾼다. … 크레타에 돌아온 나는 갑작스럽게 나의 인생에 개입하는 늙은이를 만나게 되는데, 이 늙은이는 거칠고 공격적이면서 매우 선언적인 말투로 나의 시선을 끈다.

그는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책을 읽고 생각하거나 가르침을 받은 일은 더군다나 없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은 그에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어린 나이에 크레타 독립전쟁을 위해 의용군으로 참전해 사람을 죽였고, 전쟁이 끝나서는 잡상인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거의 모든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노동판의 십장인 그다.

‘나’는 그를 통해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또 다른 삶을 보게 된다. 그것은 내가 꿈꾸어 온 삶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늙은이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로 인생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다.

<그리스인 조르바>, 사실 소설의 구성은 위 문단에서 서술한 형태처럼 단조롭다. 스토리 역시 화자인 ‘나’와 ‘조르바’ 두 사람이 처음 만나서부터 마지막에 사업을 망치고 헤어질 때까지, 그리고 작중 화자가 편지로 조르바의 죽음을 전해 받는 그 과정의 이야기이다. 늘 만나서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일하고, 그러다 조르바의 한 마디에 화자의 경탄이 이어지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런 단순함 속에 담아내는, 인생과 진리에 대한 조르바의 관념이 관찰자인 화자를 통해 재해석됨으로써, 독자인 나 역시 엄청난 충격 속에 매몰됐다. 우리는 늘 삶의 진리를 찾고자 책 속을 후벼파지 않았던가. 그러나 한 권의 책 속에서 자신이 찾던 궁극적인 질문의 해답이 한 인물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말을 재해석할 영혼의 여지를 마련할 때 느끼는 그 희열은 가히 은총의 차원이라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이 툭툭 던지는, 자칫 지나치기 쉬운 말도 놓지지 않고 잡아내려는 열망이 독자인 내 속에서 일어난다고 하는 것, 작가와 같은 시각을 공유하며, 소설의 단순 구조 속에 반복되는 것들도 매번 새롭게 바라보는 기쁨, 이 때문에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바로 이 같은 내면의 변화를 더 전율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었다. 물리적 변화가 아닌 형이상학적 가치 변화랄까. 그래서 이 책 전체가 조르바와 화자인 ‘나’ 사이의 성화의 과정 같았다.

이런 관점에서 조르바는 나코스 카잔차키스가 살았던 60여년간의 삶이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터키의 지배에 놓여 있던 크레타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가 맞닿은 전쟁터에서 자란 터라, 투쟁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살을 맞대고 있었다. 자유를 찾고자 저항하던 크레타인을 보고, 또 그 크레타가 실제로 자유를 맞는 모습을 보면서, 저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을 찾는 데 인생을 건다.

그래서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해 베르그송과 니체를 거치며 인간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자유의 최종점이 어디인가를 끝없이 고민한다. 그 해답을 찾고자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인생편력을 이어 왔다. 그 절망적인 영혼의 요구가 한 순간,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한 사나이에 의해서 흔들리고, 해체된 후 다시 뿌리를 박는다. 작품의 화자는 이를 영혼의 성숙을 위한 성화의 과정이라 했다.

성화는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고양되고, 고양된 영혼만이 자유할 수 있다. 때문에 그 옛날 시인 다윗도 늘 새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고 새 언어를 그분을 송축하기를 열망하였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이념, 새로운 학문, 새로 태어나 새 노래를 부르고 새로운 춤사위를 만든다는 것, 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만난 사람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은총의 차원일지 모른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싸움꾼이고 난봉꾼이며, 술꾼이고 사기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은총을 주제로 한 책’이라 말한다. 거룩에 이르는 인간의 여정을 다룬 책이라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의 영혼만이, 풀잎 하나가 별들의 운행에 못지 않다는 것을 바로소 깨달을 수 있다.